〈 124화 〉 #53 던전 동행 (2)
몬스터가 몰려오는 이상 상황. 이은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10… 아니 20… 전부, 전부 오고 있어요!"
굳이 알리지 않더라도 무수한 발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에 궁수는 목청을 높였다.
"후퇴, 후퇴합니다!"
달려드는 무리. 창잡이는 연막탄을 던졌지만, 고작 그런 거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연기를 뚫고 달리는 몬스터 무리. 어느새 이은하는 배낭에서 랜턴을 꺼내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이은하가 손을 뻗었다.
"β-Sheet!"
좁은 길목. 아까 거미를 막다 후퇴했던 곳까지 도착해 준비한 대로 구현한다. 거미줄과 같은 그물이 펼쳐지자 지척까지 따라온 몬스터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 재치에 창잡이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했어!"
창잡이는 걸려 넘어진 몬스터들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어차피 길은 랜턴이 밝히고 있으니까. 거미줄은 단백질이 아니라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 불에 타지 않지만, 몬스터의 털과 살은 다르리라. 몬스터들은 동굴 바닥에 몸을 구르더니 서로 엉키고 뒹굴어 불을 꺼트렸다. 비록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시간을 끄는 건 성공했다.
"안 도와줄 거냐?"
후퇴하는 헌터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둘. 강태호가 묻자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기지를 발휘해 막아냈으니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소모품들도 남아있으니 던전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늑대가 예상한 대로 헌터들이 빠져나가는 중- 무리가 미는 힘에 거미줄이 찢기고 말았다. 서로 엉킨 몬스터들은 발버둥 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 발악했고, 늑대의 눈은 그 너머를 보았다.
[하이 라이혼]
[체장 4.69m] [체고 1.78m] [체중 632kg]
[힘 398] [민첩 379] [체력 374]
[보유 스킬]
[약한 괴력(D)] [약한 은신(E)] [포식(F)]
"……!"
순간, 섬뜩한 시선을 느낀 라이혼이 걸음을 멈췄다. 마치 움직였다간 곧바로 죽을 것만 같은… 그 시선을 착각이라 치부한 라이혼은 금세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라이혼…'
대형 고양잇과 동물. 마치 검치호와 사자를 섞은 듯한 외견. 비록 마력은 없지만 스테이터스의 기본이 탄탄하다. 아마 탕아들의 꼬리와 맞먹을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아라네아와 싸움을 붙이면 조금 밀리겠지만, 나름 좋은 승부가 되지 않겠나 싶었다.
놈이 거미줄이 펼쳐진 곳까지 왔을 때 늑대와 강태호는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랜턴의 빛이 가까워져왔을 때는 이미 발 빠른 몇몇 몬스터들은 헌터들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
창잡이는 안 되겠다 여겼는지 등에 멘 창을 뽑아 들고 뒤를 맡았다. 앞으로 나서며 창을 찔러 미간 사이를 꿰뚫었으나 멈추지 않는다. 되려 죽은 몬스터를 방패 삼아 달려들었다. 파괴적인 돌진에 휩쓸려 깔리기 전, 빛무리가 모이더니 거리를 벌렸다.
스크롤의 타이밍은 좋지만 벌려진 거리는 짧다. 또다시 잡히고 말리라 생각했을 때, 마력이 그를 견인해 끌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끌려가 아슬아슬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휴…"
한숨 돌린 순간, 마침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던전 입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무리의 발소리가 커졌다. 등 뒤까지 바짝 쫓아온 포식자의 공포. 헌터들이 빠져나왔지만, 무언가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이건…"
어둠 속에서 몬스터들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너 인마. 이래도 안 도울 거냐?"
답이 없는 상황이라 생각했는지 헌터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강태호는 턱 아래를 긁었지만, 여전히 알파는 움직일 기미가 없다. 오히려 조급함을 느낀 건 강태호였다. 그라고 이 상황이 답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입장상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감독 역으로 따라온 건 어디까지나 알파였고 자신은 알파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왔을 뿐. 먼저 움직였다간 알파를 믿지 못했다는 뜻이니 여기까지 온 의미가 사라진다.
"그래도 진짜 위험해지면 바로 나설 테니까. 알겠냐?"
강태호의 으름장에 늑대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향하는 곳― 늑대는 아직 이 상황을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충분히 타파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이은하가 영창하고 있었으니까.
"―Explosion!"
폭발은 동굴 입구의 천장을 무너뜨렸다. 몬스터들은 탈출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지만, 결국 무너진 천장에 매몰되거나 저편에서 헌터들과 격리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강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어차피 임시방편일 뿐이니까. 결국 몬스터들이 빠져나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놈들이 들이박기 시작하자 잔해가 들썩였다. 쿵- 쿵-! 머잖아 동굴 안으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창잡이는 그 틈새를 찔렀고, 그런데도 무리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듯 더욱 격렬해졌다.
"……!"
결국 몬스터들이 던전을 빠져나오자 강태호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무리가 헌터들에게 달려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포효에 혼비백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으니까. 헌터들이 당황한 순간, 무너진 잔해가 괴력에 의해 무너지고 산탄총처럼 쏘아지자 창잡이는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까 늑대가 확인했던 던전의 보스, 라이혼이었다.
"우월종…"
"…으음."
그들이 알고 있는 라이혼보다 훨씬 커다란 우월종. 안 그래도 쉽지 않은 몬스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희박해 보여 궁수와 전사가 침음을 흘렸다. 동굴 안에서부터 진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무너진 천장에 깔려 죽은 몬스터도 있겠지만, 살아남았더라도 라이혼이 먹어치웠으리라.
"―――!"
위협적인 포효. 그에 이은하의 시선이 늑대에게로 향했다. 이건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파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건 2팀장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짢은 안색이기는 했지만, 일단 팔짱을 끼고 지켜보겠다는 듯 서 있다. 피로 입가를 적신 라이혼이 한 발자국 다가오자 창잡이와 전사는 마력을 끌어올렸고 그에 라이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대열 유지!"
궁수의 오더에 창잡이와 전사가 앞으로 나서 라이혼을 가로막았다. 물러서지 않는다. 헌터로서 사명을 다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뒤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아니라도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분명 나서리라.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여겨졌다. 목숨도 걸지 않고 강한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두 번 다시없을지 모르는 기회에 궁수는 활에 시위를 걸며 말했다.
"정면에서 받으면…!"
받으면 안 된다고 그리 말하려던 순간, 라이혼이 도약했다. 던전 바깥으로 나와서 편해진 건 오히려 커다란 덩치의 라이혼이 더 그랬다. 높게 뛰어오른 놈이 노린 건 궁수였다. 궁수는 거리를 벌리면서 파우치를 열어 스크롤을 찢었다.
압도적인 스테이터스 차. 전열의 둘을 단숨에 뛰어넘어 지나친 라이혼이 착지하고 궁수를 향해 달렸다. 창잡이가 투창했으나 라이혼은 어렵지 않게 피했다. 고작 몬스터 한 마리에 대열이 순식간에 망가진 셈. 창잡이와 전사가 뒤늦게 라이혼을 쫓았으나, 이미 라이혼이 궁수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앞발에 짓눌려 척추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 숨통을 끊으려 라이혼이 턱을 벌렸다. 빛무리가 모여들고 있기는 하지만 이대로라면 전송되는 건 시체뿐이리라.
"이…!"
참지 못한 강태호가 주먹을 뻗었고 무시무시한 풍압이 덮치기 전, 돌풍에 상쇄되고 말았다. 누가 그랬는지는 볼 것도 없다. 강태호는 눈을 부릅뜨고 늑대를 노려봤다.
"너, 뭐 하는 짓이냐!"
라이혼의 턱이 궁수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 발이 궁수의 머리통을 부수는 게 먼저. 이대로라면 스크롤의 효과가 발동되기도 전에 죽고 말리라.
"Distort!"
그걸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빠져나온 궁수는 다시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설마 또 막을 셈이냐?"
여기까지다. 저들이 우월종 라이혼에게 승리를 쟁취하는 건 무리다. 좁은 동굴에서 침착하게 싸운다면 모를까 탁 트인 장소에선 승산이 없다. 도와야만 한다는 강태호의 생각과는 달리 늑대는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아직."
그 말에 강태호는 이를 갈았다. 일단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낼 수 없다. 그렇다고 속도로 우위를 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싸움이 끝나는 건 시간문제다. 경험을 쌓을 수는 있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
시위를 당기려던 궁수는 줄이 끊어져있음에 이마를 찌푸렸다. 안주머니에서 새로운 줄을 꺼내 묶었지만, 그 사이 공간 왜곡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은하는 얼얼한 손을 감싸 쥐며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혼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었기 때문에. 다른 헌터들보다 셋보다 자신을 먼저 처리하는 게 낫다는 판단한 것이리라. 대열 중앙에 서 있기는 했지만 과연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2팀장님과 알파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10초. 10초만 벌어주세요."
헌터들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대치 상황이 계속되기를 바랐지만, 그들이라면 몰라도 라이혼에게 망설일 이유는 없다. 추진력을 받아 뛰어들듯 앞발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을 보고 전사는 오히려 앞으로 달렸다. 방패를 들고 커다란 사자의 아래로 들어가다가 되려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라이혼의 걸음도 멈추고 말았다. 겨드랑이 사이로 검이 찔리고 말았으니까.
창잡이가 전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밀려나갔다. 라이혼이 으르렁거리며 검을 뽑았다. 피가 흘러나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짓밟자 칼날과 손잡이 사이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렇게 두 헌터가 무기를 잃었을 때, 이미 궁수는 시위를 놓고 있었다. 마력이 잔뜩 담긴 화살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라이혼은 고개만 틀어 피해냈다. 화살이 스치며 쓸린 상처는 생겼지만 그게 고작이다.
"……."
압도적인 격차 앞에서 그저 아연해져있을 때, 라이혼이 이은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Embiggen!"
어느샌가 머리 위에 떠 있던 거대한 말뚝이 라이혼을 향해 날았다. 분명 빠르지만, 고작 그런 것에 당할 리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Distort―!"
따라서 준비한 영창은 둘. 라이혼의 피하는 방향을 직감적으로 느낀 이은하가 공간을 일그러뜨렸고, 거대한 말뚝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놈은 자신이 가진 괴력으로 마력을 찢어발겼고 그렇게 탈출하려는 순간, 궁수의 화살이 라이혼의 눈을 꿰뚫었다. 그 일순, 고통으로 판단이 흐려진 라이혼에게 거대한 말뚝이 닿았다. 하지만 이은하는 입술을 짓씹어야만 했다. 놈이 몸을 비틀면서 앞발로 말뚝을 쳐냈기 때문에 앞다리 하나가 뜯겨나가는 데 그치고 말았으니까. 비틀려 뽑힌 어깨로부터 피가 철철 흘러넘치지만 여전히 그 눈빛은 살기등등하다.
"……."
그 사이, 창잡이는 던졌던 창을 회수했고 다시 대열로 복귀했다. 다리 하나를 잃었고 눈을 꿰뚫렸지만 라이혼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전사는 부서진 방패와 검을 대신해 단검이라도 투척하려 준비했다. 시간을 끌면 유리해지는 건 분명 헌터들이다.
"크흠."
상황이 급변하자 강태호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토했다. 어쩌면이라는 기대가 생기자 굳은 표정이 풀렸다.
'가능할지도…'
으르렁거리는 라이혼이 헌터들에게 다가오다가 균형이 맞지 않아 비틀거렸다. 다시 대열을 찾은 헌터들. 라이혼의 섬뜩한 눈과 마주하며 이은하는 침을 삼켰다.
'할 수 있어.'
어젯밤 옥상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이은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기서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영약까지 받았는데. 기대하는 게 있다면 그걸 보여줘야만 한다……. 그렇게 대치하는 사이, 던전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부스럭거렸다. ―라이혼에게 쫓겨 정면으로 달린 무리는 혼비백산 도망쳤지만 세 갈래 길의 왼쪽 길로 숨어든 몬스터들이었다.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답이 없다고 강태호가 늑대를 재촉하자, 마침 던전 밖으로 뛰쳐나오던 몬스터들을 그림자가 덮었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뻘쭘하구만."
그 모습에 강태호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어찌 됐건 헌터들과 라이혼만이 남게 된 건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