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53 던전 동행 (3)
"무슨…"
터무니없다. 몬스터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쉽게 처리한다고? 그림자가 파도쳐 일어나자 동굴 밖으로 뛰쳐나오려던 몬스터들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아카데미가 습격받았을 때, 창잡이는 늑대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강아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림자를 다루던 모습은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다.
"……."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고 압도적인 괴물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상상의 범주 밖에 있다. 단적으로 말해 차원이 다르다. 최악의 던전 네버랜드의 구획 보스급의 괴물이라고 말은 들었으나 네버랜드에 가본 적 없던 창잡이로서는 그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괴물의 편린을 엿보고 말았다.
"……미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요정용과 놀아주고 있는 그 모습에 창잡이는 창대를 비틀어 잡았다. …조금 한심한 생각이기는 해도 죽을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맘 놓고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
놀란 건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동굴 안에서 느꼈던 시선의 정체를 깨닫고 라이혼은 도망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먼저 던전을 빠져나갔던 무리가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도주하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도망치면 죽는다. 그럴 바에야 저 괴물이 나서기 전에 다리와 눈을 앗아간 복수라도 하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우월종 라이혼과 네 명의 헌터들이 대치하는 상황에 늑대는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데…'
수준 차이 때문인지 경험치가 제대로 차오르질 않는다. 아쉽게 입맛을 다셨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는 있으니 경험치에 대해선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라이혼이 달리는 것에 맞춰 헌터들 또한 달렸다. 다리 하나가 잘린 만큼 균형이 맞지 않고 격렬히 움직일수록 출혈은 더욱 심해진다. 시간을 끌면 유리해진다는 생각에 거리를 벌렸지만 라이혼은 금세 헌터들을 따라잡고 말았다. 뒷발만으로 뛰어 올라 덮치자 창잡이가 창을 들어 올려 막았다. 힘과 중량에 짓눌러 발이 깊게 파고들었지만, 마력까지 끌어올리니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지금!"
창잡이가 소리치자 이은하가 영창했고 바닥에서 가시가 솟아올라 라이혼의 뒷발을 꿰뚫었다.
"Embiggen!"
거대화의 주문. 그에 따라 솟구친 가시가 거대해졌지만, 이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창잡이를 짓누른 그대로 앞발에 힘을 실어 무게를 지탱한 라이혼이 뛰어올랐으니까. 두 다리가 멀쩡히 붙어있다면 모를까 한쪽 다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동작이었지만 압도적인 힘과 창잡이라는 튼튼한 지지대가 그걸 가능케 했다. 커다랗게 솟아오른 가시를 피한 라이혼은 그대로 무게를 실어 창잡이를 짓눌렀고, 전사는 어깨로 라이혼을 밀쳐내 창잡이를 구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창잡이의 창대가 휘어져 써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됐다. 전사나 창잡이나 둘 다 무기를 잃어버린 셈.
약간의 편두통을 느낀 이은하는 재빨리 포션을 마셨고 라이혼에게 병을 던졌다. 그래도 헌터라고 어지간한 야구선수 못지않았지만, 라이혼은 눈 하나 감지 않았다. 머리에 부딪혀 깨졌지만 어차피 유리 조각 따위에 상처입을 리는 없다.
"괜찮으세요?"
"어. 뻐근한 정도뿐이야."
상처는 없다. 하지만 무기가 없어진 이상 라이혼을 막을 방법이 사라졌다는 게 문제였다. 창잡이 또한 전사처럼 단검을 꺼냈지만, 어디까지나 투척용에 불과하다. 정신 나간 게 아니라면 저런 몬스터를 단검으로 막겠다고 생각할 리는 없으니까.
"이제 알아서 피해야합니다."
앞에서 막아줄 전열이 사라졌다. 하지만 라이혼 또한 출혈로 비틀거리고 있다. 반대로 헌터들에게 기력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 그에 강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전사와 창잡이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단검을 집어 던졌고 라이혼은 아까처럼 쉽게 피하진 못했다. 몸을 비틀고 입으로 단검을 물어뜯었지만, 단검 몇 개가 틀어박히고 말았다.
"―――!"
분하다는 듯이 포효하는 라이혼. 하지만 놈이 달려들면 궁수가 당긴 시위― 어김없이 화살이 날아와 발을 헌터들을 쫓는 건 요원했다.
"음…"
이미 승패는 명확해 보인다. 뒷다리라면 모를까 공격할 때도 사용하는 앞다리를 잃었다는 건 치명적이니까. 강태호는 작게 끄덕이며 이은하를 바라보았다.
"당장 C클래스로 올려도 남겠는데."
홍유리가 가르쳤다더니 역시 재능은 있는 모양…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 움츠러들었던 기색도 사라졌다. 자신감을 찾은 게 아닐까. 아니, 던전의 기준이 네버랜드였기 때문일 터. 막상 암담해 보이는 저 하이 라이혼도 네버랜드에선 많고 많은 몬스터 중 한 마리일 뿐. 이미 더한 사선을 경험했던 만큼 당혹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흠…"
인연이 있다고 했던가. 어쩌면 알파가 보고 싶었던 건 이 모습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발악처럼 라이혼이 달려들자 헌터들은 산개해 흩어졌다. 라이혼이 노리는 게 누구인지는 명확했지만, 웬 이상한 탈것을 구현해 씽씽 이동하니 차마 따라잡질 못하고 있다. 결국엔 지칠대로 지친 라이혼이 제자리에 멈춰 서자 헌터들은 과할 정도로 신중하게 거리를 두었고 궁수의 화살이 라이혼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런데도 시위를 한 번 더 당겨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죽었습니다."
그제야 다가가 라이혼의 죽음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라이혼에게 쫓겨 혼비백산 도망쳤던 몬스터들이 떠올라 기겁했지만, 강태호가 주변을 둘러보라는 듯 턱짓했고 제멋대로 죽어있는 몬스터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음을 보곤 다시 안도했다.
"……."
그게 누구의 소행인지는 물을 것도 없으리라. 몬스터들의 사체를 수습하고 무너진 던전의 탐색을 끝마쳤을 때는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이것만 옮기면 되겠다. 난 저쪽에 갔다 올 테니까 은하 너는…"
이은하의 시선이 어쩐지 멍해 보이자 창잡이는 그녀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뭐야.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만 안색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 다친 곳은 없었을 텐데… 의아해하는 그에게 이은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 저었다. 일단 이것만 옮겨 두라는 말에 알겠다고 답한 이은하는 죽은 몬스터의 두 다리를 질질 끌어 옮기기 시작했다.
"……."
분명, 우월종 라이혼을 쓰러뜨린 건 큰 성과가 맞다. 보스를 처리할 때만큼은 알파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잘한 게 맞는데… 고민하던 이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맡은 일부터 끝내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오는 요정용의 모습에 이은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와."
아름다운 빛가루가 노을빛에 반짝이며 반사된다. 나비처럼 날아오는 요정용이 코앞에 올 때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뀨우~"
어깨에 내려앉자 그제야 퍼뜩 정신 차린 이은하의 눈이 빙빙 돌았다. 던전에 들어갔다 와서 피와 먼지로 가득한데 혹시 더러워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끙끙대며 몬스터를 옮기던 이은하는 손을 놓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수고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은하는 허둥거리며 몸을 돌렸고 알파의 모습을 확인하곤 안심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아~ 놀라라."
"던전은 어땠지?"
조금은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이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던 고민이었으니까.
"…티 났어?"
고개를 끄덕이는 늑대. 이은하는 어깨 위의 요정용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모르겠어. 그런데…"
"아쉽나?"
"……응."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다. 늑대의 말대로 이은하는 아쉬워하고 있었다. 조금 뜬금없거나 건방질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 좀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혹시 알파가 나서지 않게 할 수 있지는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알파가 없었다면 교전 중에 뛰쳐나온 몬스터들에게 낭패를 겪었으리라. 애초에 그전에 도망친 몬스터들을 붙잡을 수도 없었을 테고… 강태준이 알파를 써먹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던전을 탐사시켰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은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늑대는 이미 알아채고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마라."
어쨌든 간에 여명에서 머무르는 시간도 이제 끝이다. 비록 헌터 전체와 가까워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여명의 일원들과 적대할 일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다른 헌터들과 마찰을 빚더라도 중재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고.
'…부질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강태준은 오늘 갔다 오면 맡겨뒀던 조사가 끝날 거라고 했었다. 찾을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른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있거나 없거나 사실 어느 쪽이라도 이상할 건 없다. 잠깐 생각에 잠긴 늑대에게 페리가 등에 내려앉았다. 이제 휴식은 여기서 끝― 생각보다 괜찮은 시간이었다. 알파는 촉수를 뻗어 이은하가 옮기던 사체를 들어 올렸다.
"어? 안 도와줘도 괜찮…"
"영약은… 좀 더 두고 가겠다."
"어?"
멀어지는 늑대의 모습에 이은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간다고?"
***
"와. 존나 안 가는구만."
가죽같은 필요한 부산물만 챙겼을 뿐인데 트렁크가 가득해 도무지 차가 나아가질 않는다. 극악의 연비로 한참을 나아가 주유소에 들른 다음에야 클랜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먼저 퇴근들 해."
강태호는 무거운 부산물들을 커다란 봉투에 집어넣더니 가볍게 들어 클랜 안으로 날랐다.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클랜 밖에서 촉수를 뻗어낼 수도 없는 법. 강태호는 먼저 들어가 보라며 턱짓했고 가능한 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끔 클랜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부분 퇴근한 듯 보인다. 피곤한 모양인지 고개를 꾸벅거리는 페리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중, 흠칫거리는 붉은 머리 소녀를 본 알파는 대강 촉수를 뻗어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7층까지 도착했을 때, 강태준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늑대를 반겼다.
"조금 늦었군."
혼자라면 은신으로 먼저 왔을지도 모르겠지만 페리까지 있으니 그러기는 힘들다. 물론 어련히 알아서 따라오겠냐마는. 강태준이 서류를 건네자 늑대는 감정을 토해내듯 긴 숨을 내뱉었다.
"……."
―징조는 있었다. 아니,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 위화감을 깨달았던 건 서해안의 섬을 정리했을 때였다. 창살 너머의 흔적. 그 현장을 직접 본 것도 아니건만, 감정이 끓어올랐던 것. 그리고 가장 최근에 느꼈던 건…
'…침묵하는 입.'
그 꼭두각시와 싸웠을 때 뇌리에 떠올랐던 광경. 그때 느꼈던 건 감정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 기억이 흘러들어왔었다. 전해지는 감정과 기억. 날이 갈수록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 기억을 보았을 때, 시스템의 정체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이 남아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시스템을 만나러 갈 때가 되었다…….
늑대는 찬찬히 숨을 고르며 서류를 읽어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