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54 진실
서류를 모두 읽은 늑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동명이인을 포함해 2~3명의 인물이 있었지만, 착각할 리 없다.
"그래서, 떠날 생각인가?"
"…아마도."
앞으로의 예정은 생각해 둔 바 있다. 환계에도 들리고 환영의 나비가 탕아들에 영입되는 걸 막기 위해 스퀘어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일단 시스템을 만나야 한다. 혹시라도 무언가가 달라진다면…
"……돌아오나?"
…그럴 생각이다. 예정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강태준의 물음에 늑대는 반문했다.
"잡지는 않나?"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신뢰는 증명했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그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에 돌아올 일이 생기더라도 불편함은 없을 것 같다.
"오래 걸릴 것 같나?"
"글쎄…"
금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늑대는 아공간을 열어 강태준의 서류를 보관하곤 영약을 꺼냈다. 늑대의 언질에 강태준은 그러겠다 답했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밑 작업은 진행 중이니 편하게 돌아와도 좋다."
별로 죽으러 가는 건 아닌데… 늑대는 실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방에는 강태준 혼자만이 남게 됐다.
***
옥상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던 늑대는 요정용의 이름을 불렀다.
"페리."
"뀨우우?"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자 늑대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더니 종국에는 거대한 늑대로 화했다. 검은 마랑― 먹어치우는 자. 스멀거리는 검은 안개를 두르고 여명의 밤에 마랑이 내려앉았다.
"가자."
오랜만에 본 늑대의 모습에 친근감을 느낀 페리가 얼른 날아와 뺨을 비볐다. 애교라도 부리듯 달라붙은 요정용은 머리 위에 올라앉아 안심한 듯 날개를 접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듯 스쳤다. 높게 뛰어올라 검은 안개에 휩싸여 둘은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누군가가 옥상 문을 열었을 땐,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
밤을 달려 검은 안개가 내려선 곳은 어느 납골당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곳곳을 둘러보던 늑대는 감정을 토해내듯 숨을 쉬었다.
"―――."
유골함에 적힌 이름에 늑대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뀨우우~?"
페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녀석을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
이제야 일의 전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순간, 페리가 깜짝 놀라 뛰어올랐다. 늑대의 전신에 둘린 문양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업이라 불리는 미지. 또한 시스템이라는 존재를 이루는 근간이었다. 빛나던 문양은 이내 잠잠해졌고 깜짝 놀란 페리는 늑대의 머리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페리는 늑대의 눈에 초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뀨?"
***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세계―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가득 차 있었다. 이따금 보았던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로. 어느 순간부터 늑대는 그것이 업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무의 공간에 오로지 업만이 가득 차 있다.
갑작스럽게 세계가 변해도 늑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여왕과 만났을 때도 같았으니까. 또한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던 건 시스템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칠흑과 같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한 줄기 빛.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려온 목소리. 여태 몇 번이나 자신을 이끌었던 그 목소리에 늑대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시스템… 아니, 단세혁."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시스템은 긍정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왜 네가 죽어있는 거지?"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그것이었다. 소설 속 세계의 주인공… 도대체 왜 그가 죽어있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대체 왜 시스템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는 의문이 맴돌았다. 빛무리, 시스템은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을 건넸다.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해해버렸기 때문에. 거울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환계였다. 더 정확히는 환계의 주인인 여왕의 말이었고.
'그래. 알고 있단다. 머지않아 이곳에도 멸망, 아니 종말이 찾아올 것을.'
―그 말에서 나는 힌트를 찾지 못했었다. 멸망과 종말이 별개라는 여왕이 넌지시 알려준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전부 착각이었다고?"
[그렇습니다. 당신이 있는 세계는, 제가 있던 세계와는 다릅니다]
2071년의 2월. 단세혁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 원작의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아니, 없게 됐다. 내가 있는 세계는 소설 속, 단세혁이 활약했던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여왕이 말했던 '이곳에도'라는 건 환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이었으니.
"거울… 평행 세계."
서로를 비추는 무수한 거울. 세계와 세계가 이어지는 거울상. 단세혁의 세계와 내가 있는 세계는 평행 세계였다는 뜻이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도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 세계에서 저는 죽어 있으니까요]
―시간의 오차. 주인공의 죽음. 시간이 되돌려진 게 아니라 한없이 비슷한 다른 세계에 있었다는 거다. 그 진실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합니다. 신이 아니라면]
그리고 여왕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전체를 움직여야만 한다. 세계 전체를 웃도는 존재. 시스템의 말대로 신이라도 되는 게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럼 대체 넌 왜. 아니 그전에 나는…"
의문이 풀릴수록 더한 의문이 들어차고 있었다. 너는 왜 시스템이라는 존재가 되었는가. 나는 왜 이 세계에 불려오고 말았는가…….
[당신만이 진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불합리한 결말을 맞은 세계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올바른 결말로 이끌 수 있을 거라고.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역시 작가도 너였구나."
주인공 시점의 1인칭 이야기. 그건 단세혁이 살아왔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소설로 남겼다는 뜻…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여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왔던가.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얼마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가. 하지만 결국 시스템이 날 끌고 왔다는 말이다. 여태 날 이끌어왔던…….
[……]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여태 쉬었던 한숨 중에 가장 긴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였나?"
[…무너지려 했으니까요. 오래 견디지는 못 했을 겁니다]
"……."
단정 짓는 말에 이가 갈렸다. 무엇보다 비참한 건 그게 사실이라는 거다. 손 위에서 놀아났고, 그러지 않았다면 무너졌으리라.
"차라리 인간이었다면…"
아니, 그랬다면 절박할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그건 이해하고 있다. 시스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득해 보이는 업이라는 힘도 무한하지는 않다. 어쩌면 나를 데려오기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시스템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나는?'
사선을 넘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도 버렸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에 타의에 의해 떨어져 멸망을 막으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지치고 무너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걸 막기 위해 시스템은 계속 말을 걸어 나를 지탱해왔다. ―실제로 페리를 만난 이후 그 빈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만, 감정과 기억이 흘러들어오는 건 점점 심해졌다.
[……화를 내셔도 좋습니다. 그 어떤 비난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직 이 굴레 속에서 당신만이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저희의 마지막 희망이니]
부디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 달라고 시스템은 그리 말했다. 그 말에 질끈 눈을 감았지만, 그런다고 현실이 변할 리는 없다. 살아남기 위해, 그러기 위해 매번 선택해야 했다. 타의에 의해 내 삶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비틀린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나아갈 거야. 네가 그러지 않더라도."
내게 남은 선택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야."
네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그렇게 되고 말았으니까.
"착각하지 마. 너희한테 놀아날 생각은 없어."
무수한, 의미 없는 시선을 받으며 나는 으르렁거렸다.
"너희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평행 세계의 주민이었던, 이제는 멸망한 세계의 주민들. 자아조차 흐려져 그저 업이라는 존재로 남은 잔재― '잃어버린 자들'로부터 흘러들어온 감정과 기억 속에서 나는 진실을 엿보았다.
[나는 죽었고,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다(完)]
단세혁은 멸망을 막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종말은 막지 못했다. 멸망 확률이란, 단세혁이 없는 세계에서 그가 했던 만큼 멸망을 막으라는 뜻. 그래서 내 행동으로밖에 내려가지 않았던 거다. 모든 진실 앞에서 나는 오롯이 선언했다.
"멸망과 종말. 전부 막고 말겠어. 그러니까―"
그 의지에 세계가 서서히 밝아져왔다.
[극기 15 → 30]
극기(克己)란,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한 의지. 자신을 극복한 늑대의 의지에 이끌려 잃어버린 자들이 눈 뜨기 시작했다.
[멸망 확률 86.27% → 86.12%]
[0.15%만큼의 업을 획득합니다]
―깨어난 업은 늑대에게 귀속된다.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늑대는 유일하게 자아를 잃지 않은 빛을 마주 보며 '자신을 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오롯이 선언했다.
"―더 이상 멋대로 끼어들지 마."
그 순간, 세계가 흔들렸다.
***
'―――!'
온전한 그의 의지가 솟구치자, 흑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잃어버린 자들이 끼어들지 않은 오롯하고 순수한 불순물 없는 감정. 딱 한 번 느껴보았던 감정이 다시 흑린을 감쌌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감정을 먹어보고 싶다. 잃어버린 자들의 희망이 쓰러진다면…? 더한 절망에 그 굳은 결의가 무너지고 자신에게 기대게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 황홀감이 밀려와 침을 삼켰다.
***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아가기로 했다. 희망은 꺼지지 않고 더욱더 거세게 타오른다. 딱 한 번. 그 싸움을 직접 보았던 소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허밍이 역병이 가득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