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54 진실 (2)
"뀨~!"
페리의 울음에 정신을 차렸다. 무의 세계에서 돌아왔으나 현계가 아닌 환계― 발각될지도 모르니 페리가 옮겨준 걸까? 어차피 환계에 들를 필요가 있기는 했다. 여왕과 대화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페리와 함께 환계를 거닐고 있는 와중, 어쩐지 급한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니 흰 사슴 한 마리가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긴장한 듯 둘러보던 백록은 이내 내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휴. 자네였나?"
반응을 보아하니 적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진화한 이후 환계에 온 건 처음이니까. 백록은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건지… 그가 돌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네."
"그?"
"…미안하군. 아무것도 아닐세. 그보다 진화한 겐가?"
의아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백록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페리는 오랜만에 본 백록의 주변을 날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래."
유심히 살피던 백록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태준이 가진 스퀘어의 걸작으로도 볼 수 없었는데 백록이 가진 안목 스킬로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머잖아 백록이 절레절래 고개를 저었다.
"자네라서 다행이군."
그 말에 포함된 의미를 느끼곤 쓰게 웃었다.
"여왕은 만날 수 있을까?"
"……거절하진 않겠지. 문제없을 걸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원치 않았더라면 환계의 주인인 여왕이 내가 오는 걸 허락했을 리 없으니까.
"자네도 어린 용도…"
백록은 말을 흐렸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나도 강해졌지만, 페리의 성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침묵하는 입의 매개체를 집어삼키고 저거노트의 살점을 먹어 성장한 페리는 이제 농담으로라도 작다고 부르긴 힘들어졌다. 나 정도 되는 게 아니라면 머리 위에 똬리를 트는 것도 힘들다. 뭐니 뭐니 해도 이젠 10kg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으니까.
[페리(페어리 드래곤)]
[체장 108.9cm] [체고 7.4cm] [체중 8.72kg]
[힘 61] [민첩 56] [체력 64] [마력 196]
[보유 스킬]
[뛰어난 점멸(C)] [마력 재생(D)] [미약한 독 내성(F)]
스테이터스는 물론이고 자주 사용했던 점멸도 뛰어난 점멸로 변해 있었고 부정한 것을 먹어왔기 때문인지 독 내성이 생겨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니 환계의 풍경이 변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자네 덕분일세."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요정용의 모습― 비천망의 고기를 먹인 녀석들이었다. 네버랜드에 다녀오는 동안 우화하는 데 성공한 모양. 그에 잠깐 넋을 잃고 쳐다봤고 날아다니던 요정용들이 우릴 발견하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뀨우우~!"
"뀨으~!"
용벌레와 요정용들이 모여들자 페리는 동족들과 교감하며 즐거워했다. 조그마한 녀석들과 함께 있으니 페리의 성장이 더 눈에 띈다. 마치 어미 용과 새끼 용을 보는 듯한 모습. 선두를 달리는 페리를 따라 수십 수백의 요정용들이 빛가루를 흩뿌리며 날아다니는 모습에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뀨뀨뀨~"
처음에 경계하며 조심스러워하던 녀석들은 내게도 호기심을 보이더니 내가 미끄럼틀이라도 된다는 양 등줄기를 타고 놀았다. 뒤늦게 요정들도 날아와 시끌벅적해졌지만 그게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후후."
능글맞게 웃는 백록의 모습에 요정들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자기네끼리 재잘거렸다. 그러는 사이, 저 높은 곳에서 커다란 나비가 춤추듯 내려왔다. ―불꽃 나비. 여왕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위에 올라타 에메랄드빛 바다를 넘어 거꾸로 자란 나무 속 궁전의 문을 여니 왕관을 쓴 전령 요정이 달려들었다. 왜 이리 오랜만이냐며 칭얼거리는 녀석을 달래주고 왕관을 쓰자 또 다시 세계가 변했다. …정확히는 내 정신만이 옮겨진 거겠지만.
【아가, 왔구나】
또 다른 칠흑의 세계. 별로 빚은 듯한 형상. 여전한 모습으로 여왕이 나를 반겼다. 위아래로 나를 살피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그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보았던 건 음영랑으로 진화하기 전이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당신이 말한 멸망과 종말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아가의 말은 정말 잘 들렸어. 끝을 막겠다는 말에는 그만 설레고 말았을 정도란다】
여왕은 입이 있을 위치를 가리며 웃었다.
【확인하러 온 거니? 내가 아가에게 적이 될지 아닐지를】
"아니요."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여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라고?】
되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호의를 보였던 여왕을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물론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그녀가 적이라면 환계에 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 내가 여왕을 만나러 온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진실은 알았지만, 여전히 당신들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여왕을 보자마자 통찰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나마 쓰러지진 않았다는 게 그동안의 성장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직도 닿지 않는다. 아니, 격이 다르다. 칠영웅이나 스퀘어 마스터 혹은 네버랜드의 구획 보스 정도가 아니면 적이 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여왕에게만큼은 조금의 승산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흑린.'
고작 편린을 빌려왔을 뿐임에도 검은 장미와 강욕조차 우습게 불태웠던 검은 도깨비불. 이 세계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미지가 버젓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선 언급조차 된 적 없는 상식의 범주 밖에 있는 초월자들이.
"그러니 알려주십시오. 당신들에 대해서."
더는 누구에게도 휘둘리기 싫다. 그러기 위해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있을 수는 없다.
【……후후】
잠깐 놀라는가 싶던 여왕은 이내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고…
***
이후, 몇 가지 더 확인을 받고 다시 돌아온 환계에선 백록과 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늑대야~!"
그리고 요정, 세 번째 겨울의 아이까지 있었다. 제법 오랜만인 것 같아 반가움이 들기는 했다.
"늑대도 진짜~ 많이 커졌어!"
페리의 머리 위에 올라타 다가온 녀석이 두 팔을 뻗었지만, 내 코를 감싸 안는 게 고작이었다. 이대로 날숨을 뱉기만 해도 데구루루 떨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자 백록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말 안 해도 알겠네."
***
커다란 미궁으로 된 던전 안에서 늑대는 평온히 걸었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그림자가 한없이 퍼져 나와 일대를 뒤덮었고 휩쓸린 몬스터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갔다. 그나마 B클래스 정도 되는 몬스터라면 잠깐은 버텼지만, 그 시간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
타우루스를 비롯한 몬스터들이 영량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와아~!"
그 모습에 요정은 마냥 좋아했지만, 백록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늑대만큼 강한 존재가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화산각룡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걸린 시간. 자신보다도 약했던 늑대는 반년도 걸리지 않아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 됐다. 하나둘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그럴 리 없건만 혹시라도 그림자가 자신에게 뻗치면 어쩌나 하는 상상을 하고 만다. ―머잖아 도착한 던전의 끝에선 몬스터들이 한데 모여 괴성을 지르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망쳤던 몬스터들이 오갈 곳 없이 모인 모습을 보고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탐지를 사용해도 더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그림자를 펼치자 자포자기한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지만, 파도치는 영량이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그림자를 피한 놈들은 늑대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림자를 피했다고 끝은 아니다. 바람을 두른 안개는 무리를 갉아먹었고 늑대로부터 쏘아진 셀 수 없는 촉수는 무리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었다.
[라이쿠스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타우루스부터 거대한 코뿔소인 라이쿠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우자 곧 장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에 무언가를 확신한 것처럼 늑대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엔 입을 가린 요정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한 마리뿐.
다시 고개를 돌린 늑대의 눈에는 무리가 긁고 두드리던 미궁의 문 너머가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드레이크…'
[드레이크]
[신장 12.71m] [체고 4.84m] [체중 14.1t]
[힘 519] [민첩 503] [체력 567] [마력 461]
[보유 스킬]
[용혈(B)] [용린(C)] [질긴 피부(E)] [탐식(E)]
미궁의 보스. 비록 날개는 없지만, 용에 가장 가깝다 알려진 몬스터. 드레이크라면 화산지대에서 본 적 있지만, 그건 열등종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드레이크는 용혈과 용린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
놈도 낌새를 눈치챈 모양인지 용종의 오만함을 그대로 가지고 몸을 일으켰다. 머지않아 놈이 문을 열고 나오리라. 다시 돌아보자 백록은 이미 요정과 페리를 데리고 물러나 있었다. 곧 뒷발로 무게를 지탱한 드레이크가 문을 밀더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
거대한 아룡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놈이 거세게 콧김을 뿜어내자 불이 새어 나왔다. 더 볼것도 없다는 듯 나를 짓밟으려 앞발을 들어 올렸고 놈을 피해 뛰어올라 목덜미를 물어뜯었지만, 역시 단단해서 뚫리지 않는다. ―스테이터스만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탈식이 작용하자 용의 비늘이 사라졌고 불타올랐다. 이미 영량이 공허를 둘러 드레이크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고통에 날뛰는 드레이크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림자가 흩어졌다.
"―――!"
하지만 이미 드레이크의 머리를 감싼 용린은 뜯겨나갔고 두 눈은 사라져있었다. 그나마 놈 또한 탐식을 가지고 있어 견딜 수 있었으리라. 앞을 볼 수 없는 괴물이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한껏 입을 벌린 드레이크의 목구멍 너머로 시뻘건 불길이 일렁였고, 놈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 부풀어오른 횡경막. 호흡을 들이키고 마력이 응축된다. 숨결을 내뱉기만 하면― 그렇게 생각했지만, 브레스가 뿜어지는 일은 없었다. 들숨에 들이킨 건 대기만이 아니라 검은 안개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마력과 함께 응축되어가는 용의 숨결조차 흑무는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아룡은 헛구역질하며 안개를 뱉어내려했으나 바람을 두른 안개는 쉽사리 떨쳐낼 수 없다.
―순간, 늑대의 시선을 느낀 아룡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샌가 아지랑이에 뒤덮였음을 깨달은 아룡이 발악했으나.
[드레이크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공허에서 벗어나기란 무리였다. 그렇게 쓰러진 드레이크를 집어삼키자 페리를 탄 요정이 다가왔고.
[탈식(C)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탈식(C) Lv.7 → 탈식(C) Lv.8]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6 → Lv.17]
던전이 붕괴되어 원래 모습을 되찾아가는 걸 보며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경험치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던전이 필요하다. 환계의 던전. 그 농도 짙은 마력 때문에 던전을 클리어할 수 없다면 그걸 해결하면 된다. 그를 위해 여왕에게 확인도 받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