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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28화 (128/407)

〈 128화 〉 #55 환계 동행

"한 마디 정도는 하고 가도 될 텐데…"

간다고 말은 들었지만, 그게 작별일 줄 몰랐다. 알파가 계속 있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갈 줄은 몰랐다.

"땅 꺼지겠네. 갔음 된 거지 왜 징징거려?"

어김없이 딱밤이 날아오자 이은하는 기겁해 피했지만, 그에 홍유리의 눈꼬리가 살짝 경련했다.

"어쭈. 지금 피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기겁하는 이은하가 일어나려 하자 홍유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세 손가락이 펴진 상태로.

"셋."

"……!"

"둘."

손가락이 하나씩 접어지자 이은하는 입술을 앙다물며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개겨봤자 더 맞을 게 뻔했으니까. 쪼개지는 듯한 아픔이 찾아올 거로 생각한 이은하는 찔끔하며 몸을 움츠렸으나 어째선지 아프지 않다…? 슬쩍 눈을 뜬 순간, 찾아온 아픔에 이마를 감쌌다.

"쫄지 마. 키 안 커."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주전자를 들고 오는 백소율을 보고 애써 참아냈다. 곧 둘러앉은 셋은 각자의 주전자와 컵 앞에 앉았다.

"소율아. 넌 아무렇지도 않아?"

"네?"

의아하다는 듯 자신을 보자 이은하는 눈살을 좁혔다. 알파가 떠난 지도 벌써 이틀.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지만, 그 다음엔 말도 없이 떠난 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작별 한 마디 정도는 해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설마 던전 앞에서 했던 그 말이 작별인사였던 걸까? 자신만 해도 이러한데 아무 말도 못 들었던 백소율은 어떨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 사실에 의문이 든 백소율은 스스로 묻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떠난 것 같지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일까? 달인 물을 쪼르르 따른 이은하는 푹 한숨을 쉬었다. 괜히 별것도 아닌 일에 나 혼자 궁상떨고 있는 걸까? 클랜 안에서도 강아지가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아~ 쓰다."

"등신. 아주 열녀 나셨네. 왜 그냥 신파극이라도 한 편 찍지?"

그 신랄한 말에 이은하는 입술을 삐죽였고, 가리기 위해 컵을 들었다. 그렇게 주전자를 반쯤 비웠을 때, 전화를 받은 홍유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 네. 알겠습니다."

어쩐지 언짢아 보이는… 아니 그것보다는 껄끄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강하다. 이은하와 백소율이 서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통화를 종료한 홍유리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은하를 째려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이은하는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 건가 싶어 데굴데굴 눈을 굴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호출.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내꺼 다시 덥혀 놔."

"아, 넵."

홍유리가 밖으로 나가자 이은하는 주전자를 들어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

"너무 빨리 돌아온 거 아닌가?"

강태준이 실소하자 늑대는 기다란 촉수를 뽑아 귀 뒤를 긁었다. 원래 금방 돌아올 생각이기는 했지만, 시스템을 만나는 게 혹시 오래 걸리진 않을까 생각해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비록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기는 했어도 그렇게까지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거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이틀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마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돌아온 이유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어서."

"…사람?"

의아해하며 되묻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율을 데려가고 싶은데."

"…백소율?"

잠깐 눈살을 찌푸리던 강태준은 이내 떠올랐다는 듯.

"그래. 맡고 있던 아카데미 학생이었나."

아카데미는 아직 재건축하고 있지만, 어차피 2월에 졸업하게 될 백소율에겐 상관없는 이야기. 당연히 일정에는 문제없겠지만…

"그녀는 헌터가 아니다. 알고는 있는 건가?"

아직 헌터도, 심지어 여명 소속도 아닌, 하물며 보호관찰 중인 학생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말. 그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런데도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곧 강태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머잖아 하연이 그 누군가가 왔음을 알렸다.

"부르셔서 왔…"

방으로 들어온 누군가― 홍유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늑대는 태연하게 촉수를 휘저어 인사했지만, 홍유리는 애써 외면하며 목울대를 넘겼다. 그나마 강태준의 앞이라 가까스로 참아낸 것이리라.

"홍유리. 백소율은 지금 네가 데리고 있는 거로 아는데."

"네. 맞아요."

"필요하다는군."

"가능은 하지만…"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임에도 홍유리는 금세 이해했다. 떠났다는 알파가 여기 있는 이유와 굳이 강태준이 자신을 부른 이유… 백소율의 부재를 들키지 않게끔 하라는 것일 터. 그에 홍유리가 물었다.

"소율이가 필요한 곳은요?"

강태준이 턱짓하자 홍유리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심호흡과 함께 내게로 몸을 돌렸고 선홍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해가 되진 않을 거다."

환계의 존재를 섣불리 알려도 될지에 대해선 아직 망설임이 남아 있다. 여왕에게 상관없다고 말은 들었지만, 그로 인해서 무언가 변할지도 모르니까. 아는 사람은 가능한 한 적게 남기고 싶다.

"하, 지금 그딴 걸 말이라고."

내게서 묘하게 비껴간 시선으로 홍유리는 코웃음 쳤다.

"너 같으면 좋다고 보내겠…?!"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홍유리가 보는 시야각으로 들어가니 부르르 몸을 떤다. 그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던 홍유리는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

화를 내려는지 붉어졌던 그 얼굴은 금세 새하얗게 질렸고 그에 강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멀었군."

홍유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강태준이 말을 이었다.

"알파.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네가 하려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허튼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하지만 그녀는 여명의 일원이 아니지. 신변을 맡고는 있지만, 우리가 멋대로 강요할 순 없다는 거다."

잠자코 듣는 내게 강태준이 끄덕였다.

"물론 백소율은 네게 빚이 있으니 들어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우리 처지가 난처해진다. 보호하고 있는 대상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른단 건 웃음거리도 안 되는 일이지."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홍유리를 데려가라."

"클랜장님?!"

놀라는 홍유리에게 강태준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아니,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공포증… 대체 언제까지 시달릴 셈이지? 마침 백소율을 맡은 건 너다. 함께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두려움도 사그라들겠지."

"클랜장님! 저는…!"

"홍유리. 네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네버랜드에 참여하지 못했단 사실은 벌써 잊었나?"

홍유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건 배려였을 뿐이다."

홍유리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분명 강태준은 일전에 회의실에서 가능한 한 빨리 극복하라고 했었고 정 힘들다면 휴가를 주겠다고까지 했었다. 그걸 사양했던 건 자신이었으니 불만을 가질 여지조차 없다. 물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걸 변명으로 삼을 수도 없다…….

"알, 겠습니다."

"…들었겠지? 백소율을 데려갈 거라면 홍유리도 함께 데려 가 줘야겠다. 괜찮겠나?"

늑대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좋아.'

백소율은 체질 때문에 데려가는 것이지만, 홍유리가 있다고 나쁠 건 없으리라. 되려 뛰어난 마법사인 홍유리라면 환계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만 아니라 던전에서도 활약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전에 강태준의 말처럼 공포증은 고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스퀘어에 갈 때를 대비하더라도.

'그리고…'

홍유리와 함께라면 화산각룡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환계에 대해 알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면 그게 아쉽지 않을 만큼 굴리면 되니까… 늑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던 홍유리는 어쩐지 뚫어지라 느껴지는 시선에 침을 삼켰다.

***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다."

홍유리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백소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일전에 페리가 잠깐 백소율을 데려갔던 세계는 환계라는 것. 짙은 환계의 마력. 그중에서도 더한 던전의 마력을 흡수시킬 거라는 것을. 어쩌면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백소율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도 가고 싶었으니까요."

얼마 전, 클랜 옥상에서 백소율과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환계의 꿈을 꾼다고 했던가. 오히려 백소율이야말로 환계로 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언제 출발할 건가요?"

"당장이라도 상관없다."

"…기다려. 준비해야 하니까."

체념한 듯 한숨 쉰 홍유리가 말하자 백소율은 미안한 감정을 느낀 모양인지 두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그래도 저는…"

"알고 있어."

"…감사합니다."

***

"……저, 정말?"

휘둥그레 뜬 눈으로 이은하가 되묻자 백소율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비밀이에요."

알겠다며 이은하가 허겁지겁 올라가다 계단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백소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저 얼빠진 년. 언제 사람 만드나 몰라."

"선생님…"

"뭐. 틀린 말도 아닌데. 더 필요한 건?"

"괜찮아요. 이 정도면."

홍유리는 고개를 주억였다. 준비는 철저하다. 언뜻 설명 들었던 거울과도 같은 세계… 하필이면 알파와 함께라는 게 꺼려졌을 뿐이지 환계라는 곳 자체에는 그녀 또한 흥미가 있었으니까. 홍유리는 자신의 배낭을 들어올렸다.

***

우당탕.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 곧 이은하가 황급히 문을 열자 화들짝 놀란 페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 미안."

"뀨우우~!"

"미안… 진짜 돌아왔네?"

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페리에게 구박받던 그녀는 슬쩍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갈 때는 간다고 한 마디 정도 해도 괜찮을 텐데…"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빤히 쳐다보니 이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영약 두고 간다는 게 무슨… 그래도 금방 오기는 왔네?"

"볼일이라도 있나?"

"그건 아닌데…"

어쩐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간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게 서운했던 걸까?

"곧 다시 간다. 할 말이 있으면…"

"……어디로?"

"던전."

짤막하게 대답했더니 이은하는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돌아올 거지?"

"아마도."

그렇게 이은하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를 마친 둘이 방으로 돌아오자, 함께 환계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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