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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29화 (129/407)

〈 129화 〉 #56 서리 계곡

"……!"

요정용과 함께 이동한 곳은 놀라울 정도로 짙은 마력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지만 마력이 짙다는 건 마법사에게 있어 최적의 환경. 금세 적응한 홍유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여기는."

아니, 여기가 바로 환계이리라. 짙은 마력을 음미하던 홍유리는 자신을 당기는 손길에 슬쩍 눈을 떴다.

"뭐…"

이끄는 대로 시선을 향하자 선홍색 눈동자에 비친 것은 평생이 지나더라도 잊을 수 없을 풍경이었다.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푸르스름한 마력과 하늘 대신 뜬 에메랄드빛 바다와 그 아래 수놓아진 무수한 환수―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거라 자신하던 홍유리조차 넋을 잃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답죠?"

마치 자랑하듯 백소율이 만면에 미소지었다. 침착한 평소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연령에 어울리게 들뜬 모습에 홍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왜 네가 자랑하는데?"

"그야…"

차마 꿈에서 보았다는 말은 할 수 없어 백소율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환상 같은 세계에 저 멀리서 요정들이 날아오며 재잘거렸다.

"તે એક મોટી પરી છે?"

"ના! આ માનવ છે!"

"વાહ ~! તમે માનવ છો ?!"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묘한 규칙성이 있어 그게 언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날아오는 것들에 홍유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요정용― 평생 가도 보기 힘들다는 요정용이 수십 수백이나 무리 짓고 있다. 순식간에 용과 요정에 둘러싸여 당황하던 둘은 페리가 날아오르자 그 뒤를 따라 용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여기가 환계다."

확인시켜주는 듯한 늑대의 말에 홍유리는 침을 삼켰다. 도시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모습에 알파가 말했던 거울 같은 세계라는 말 뜻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던전이 있다고? 정말 이런 곳에?"

"그래. 그래서 백소율이 필요했다."

"……제가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 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했다시피 던전 내부의 마력은 환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짙다. 우선 환계의 마력에 적응해라. 나머진 걸으면서 알려주겠다."

"여기보다 더?"

믿기 힘들다는 반응에 늑대는 처음 환계의 던전에 들어갔을 때가 떠올라 쓰게 웃었다. 그 땐 아예 짓눌려서 으스러질 뻔했는데… 물론 홍유리와 백소율이 그럴 거로 생각하긴 힘들지만.

"그래. 훨씬 더."

어느새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페리가 정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존재를 느꼈는지 멀리서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놀랄 건 끝났다고 생각했던 둘은 다가오는 커다란 흰 사슴― 그 아름다운 외견에 홍유리와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다가온 흰 사슴은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શું તમે જે લાવ્યા છે તે છે?"

"બરાબર."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거겠지만, 늑대는 태연하게 사슴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저건."

"몰라. 말이 통하는 것 같기는 한데."

검은 늑대와 흰 사슴이 대화하는 진귀한 광경. 곧 흰 사슴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훑어보는 시선― 흰 사슴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가 싶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વિઝાર્ડ… મને લાગે છે કે તે તેના કરતા વધુ પ્રાણી જેવું છે."

분명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일 터. 홍유리는 가능한 한 늑대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알아듣게 좀 말하지? 그보다 대체 그 말은 뭐야?"

"…요정어. 너희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저희를요?"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흰 사슴에 대해 설명했다. 환계에 살아가는 이들을 영물 혹은 환수라 부르는데 백록이라고 하는 이 흰사슴은 그중에서도 영특하고 뛰어난 존재라는 것. 그에 홍유리는 머리를 주억였다. 말을 한다는 건 그만한 지성이 있다는 거니까. 게다가 느껴지는 마력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몬스터는 넘보지 못할 정도다. 어쩌면 A클래스에 턱걸이로 닿을지도 모를 만큼이나.

"그러니까, 이성이 있다는 거야? 너처럼?"

"나보다 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말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백록이라는 환수에게 뛰어난 지성이 있는 건 분명 사실이라. 가능하면 말이라도 한번 나눠보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물론 알파를 통해 말을 전해달라고 하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선생님… 괜찮으세요?"

의문과는 별개로 몸 상태는 최고였다. 환계라는 곳은 농도 짙은 마력으로 가득했고 마법사에게 있어 그건 마약과도 같다. 약간의 황홀감마저 느낀 홍유리는 주먹을 쥐었다.

"나쁘지 않네. 넌?"

당장 마력을 사용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고 있다. 홍유리가 되묻자 백소율은 미소지었다.

"저도 좋아요."

마력만이 아니라 그녀에게 유독 호기심을 보이는 용과 요정들.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린 백소율이 종종걸음으로 늑대를 따라잡으려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홍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돌아갈 방법을 모르는 이상, 어차피 알파와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다. ―클랜장님이 말했던 것처럼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언제까지 쫄고 있을 생각이야?'

이를 악문 홍유리는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이 환계에서 공포증을 극복하고 말겠다고 결심하면서.

***

'묘하다고…?'

백소율을 본 백록의 감상이었다. 마력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환수에 가깝다는 말. ―던전으로 향하는 도중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나저나 자네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군."

"……."

"후후. 새끼인 모습도 괜찮지 않나."

백록의 앞에서 강아지인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좋든 싫든 간에 홍유리가 있으니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니까. 화산각룡과 싸울 때는 어쩔 수 없을 테니 그전까지 홍유리의 공포증도 최대한 빨리 고칠 필요가 있고.

"지금 저 분이 웃은 건가요?"

저 분― 그 칭호에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록과 나누는 말은 어디까지나 요정어였으니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중간에서 통역하듯 알려주는 게 조금 고역이었다.

'차라리 여왕에게 데려가는 건…'

말 같지도 않은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요정어를 가르치는 건 불가능한가?'

나도 배운 게 아니라 스킬로 획득해 알고 있을 뿐이니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이윽고 던전의 앞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봤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용과 요정용들이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백소율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다. 설마하니 던전 안까지 따라오진 않겠지만 어쩌면 페리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유독 아쉬워했던 것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일단 다시 말하겠다. 던전 안의 마력은 생각보다 훨씬 짙을 테니 주의가 필요하다. 만약 무리라고 생각되면 곧바로 물러나겠다."

언짢아 보이는 홍유리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백록이 가장 먼저 던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이어 경계를 넘자 풍경이 변했다.

삭막한 도시가 사라지고 나타난 건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눈 내리는 설원이었다. 탐지를 펼쳐 살펴보니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던전은 아니다. 용의 황무지와 엇비슷하거나 그보다 살짝 덜한 수준. 던전의 경계로부터 조심스레 발이 보이는가 싶더니 백소율이 나타났다.

"……!"

나도 춥다고 느껴지는데 그녀에겐 오죽할까. 달달 떨리는 턱. 현계도 겨울이라 두꺼운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턱도 없는 추위였다. 귀화를 일으켜주었더니 백소율이 난로라도 쬐는 것처럼 손을 뻗더니 새하얀 입김을 흘렸다.

"추, 춥네요."

"마력은 견딜 만하나?"

"네… 그건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마력을 흡수하는 모습에 아까 백록이 말했던 백소율이 환수에 가깝다는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다 성큼 집어넣은 발― 던전 안으로 홍유리가 들어오더니 표정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씨발…?"

뜬금없는 욕설이 오히려 그녀답다. 마력의 농도 때문인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르르 몸을 떨자 확인차 물었다.

"너는 괜찮나?"

"――신경 꺼."

한참 뒤에 나온 말. 부르르 떨리는 몸은 힘겨워서일까 아니면 추워서일까? 잠깐 기다리니 서서히 마력을 받아들여 흘리기 시작하는 모습에 감탄을 흘렸다. 아마 후자였던 모양.

"근데 여긴…"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 추위에 놀란 페리는 본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나 대신 백록에게 목도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뀨우우~"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둘의 모습에 슬슬 출발하려다 그 잠깐 사이에 백소율의 마력이 늘었음을 느끼고 혀를 내둘렀다.

'역시…'

백소율을 환계에 데려온 건 옳은 선택이었다. 기왕 이렇게 될 거라면 이은하도 데려오는 게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도 재능은 있으니 마력을 흡수하는 데도 도움이 됐을 텐데…

시린 손을 비비던 백소율이 다가와 양팔 벌려 나를 안았다.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새삼 안기는 데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게슴츠레 뜬 백록의 눈이 어쩐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 아주 잘 노는 짓이다."

눈꼴시다는 듯 코웃음 친 홍유리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화산각룡인지 뭔지만 처리하면 된다는 거잖아?"

당당하고 힘찬 걸음으로―

"그럼 이깟 던전은…!"

―깊은 눈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무너지듯 흘러내려 머잖아 눈사태가 일어나더니 곧 커다란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리 계곡이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그동안 눈이 쌓였나보군."

"…제발 그런 건 좀 빨리 말하라고."

"미안하군. 잊고 있었다네."

떨어지던 홍유리를 촉수로 낚아채 당겼을 땐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역시 접촉은 아직 무리였던 모양. 한숨을 쉬며 클리어해야 할 던전― 깊디 깊은 서리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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