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30화 (130/407)

〈 130화 〉 #56 서리 계곡 (2)

"……?"

싸늘한 추위에 정신을 차린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왜 기절해 있었는가―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자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깊은 눈 속에 빠졌을 때, 마력을 일으키려 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 않았다. 마력은 마법사의 원천과도 같은 것. 짙은 농도의 마력은 마법사에게 있어 영약 그 자체와 같았지만, 문제는 그게 너무 과했던 거다. 외부로 마력을 발출하는 게 힘들었을 만큼. 덕분에 반응이 늦고 눈사태에 휩쓸릴 뻔했고 떨어지려던 자신을 돕기 위해 알파가 촉수를 뻗었다― 도움의 손길에 쓰러졌다는 사실에 정말 극복할 수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자괴감과 비참함이 느껴졌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이 감도는 부위가 있어 우울함이 차올라 그냥 다 때려치우고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아래에서 백소율에게 흡수되는 마력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필요했던 건 내가 아니라…'

백소율이었지 않나… 내가 여기 따라 온 의미가 있을까 싶었을 때, 고개를 돌린 흰 사슴의 우묵한 눈과 마주치자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백소율이 왜 아래서 보이는 거지…? 홍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백록의 등에 누워 있었음을 깨달았다.

"깨어났군. 그나저나 이 마법사는 유독 자네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흠…"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 홍유리는 백록의 몸을 짚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순간, 별안간 알파가 촉수를 뻗자 움찔했지만 그게 자신에게 향하는 게 아님을 알고 안심했다. 바닥을 찌른 촉수로부터 붉은 피가 하얀 설원에 피어올랐다.

"……?"

마력 감지를 사용했을 때, 주변에 느껴지는 많은 기척. 그러나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눈 아래 수많은 괴상한 것들이 숨어 있다― 알파가 찌른 촉수가 시발점이 되었는지 그것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네처럼 수많은 다리를 가진 대벌레와 닮은 커다란 몬스터― 홍유리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였다. 느껴지는 마력은 대단한 것 없지만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형상이었다.

늑대는 촉수와 그림자로 지네들을 처치해가기 시작했다. 지네도 그리 약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늑대에게는 닿기는커녕 다가갈 수조차 없다. 완전한 유린― 일전 자신과 싸웠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져 있다는 사실에 홍유리는 입술을 씹었다. 몇 번이나 느꼈지만, 저 성장세는 이상하다.

"선생님!"

백소율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홍유리는 자신의 등 뒤까지 바짝 따라온 몬스터를 보고 마력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잘 일어나지 않았지만, 끌어낸 마력이 던전의 농도 짙은 마력을 억지로 뚫어냈다. 손가락을 튕긴 순간― 불타는 사슬이 뻗어 나와 지네의 움직임을 강제한다. 옴짝달싹 못하는 지네를 보며 주먹을 쥐자 사슬이 파고들어 지네를 불태우고 조여들었다.

"대단한 마법사로군… 하지만 마력은 밀어내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네."

알 수 없는 말이지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저은 흰 사슴의 전신에서 마력이 일어났다. 대단한 마력은 아니지만, 농도 짙은 마력과 어우러지며 한데 모여들고 있었다.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어떻게?'

보고도 모르겠다. 너무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홍유리는 잘 알고 있다. 순간,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얼음송곳이 지네를 꿰뚫자 손을 뻗고 있는 백소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고개를 주억이는 흰 사슴과는 반대로 홍유리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커다랗다고는 해도 얼음 송곳에 지네가 죽을 리는 없겠지만, 아직 학생에 불과한, 여태까지의 백소율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무언가가 변했다― 자기도 놀란 모양인지 눈을 크게 뜬 백소율이 다시 마법을 영창 하자 아까의 고민은 머리 한구석으로 치워둔 홍유리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녀는 천성이 마법사였다.

***

'…다 된 것 같은데.'

덮쳐오는 지네들은 대부분 처리했고 뒤를 돌아보니 홍유리와 백소율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굳이 손을 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백록이 마력탄을 쏘아내자 지네 하나가 꿰뚫려 쓰러진다. 투시를 사용해 확인해보니 급소 곳곳이 관통당했는데 안목 스킬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뒤따라 백소율이 영창하고 홍유리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남은 지네들을 쓰러뜨리는 건 금방이었다. 붉은 마력에 놀란 지네들이 물러서기 전,

"Glonț de flacără."

―붉은 탄환에 꿰뚫려 모두 쓰러졌다. 붉게 물든 눈밭에 떠오른 지네들의 사체.

[탐욕 지네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그것들을 먹어 치우자 18레벨이 머지않게 됐다.

'설원 위는 정리한 것 같은데.'

―이제 남은 건 계곡 아래. 하지만 서리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진짜는 저 아래 있다. 눈사태로 계곡을 덮은 눈이 쓸려나가자 그 아래 동면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나?"

홍유리가 고작 저런 것들에 다칠 거라 생각하긴 힘들지만 백소율이라면 모르니까. 시선이 향하자 조금 멍해 있던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네. 조금 신기하네요. 얼떨떨해요."

자신이 쓴 마법이 아닌 것 같다며 백소율이 자신에게 놀라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보는 기준에서 약한 거였지 탐욕 지네는 오크나 외눈박이보다 강한 몬스터였으니까.

'마녀.'

그 말이 괜히 나왔던 게 아니다. 뛰어난 마법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진장한 마력을 휘두르는 게 백소율이었으니까.

"그래서 데려와 주신 거죠?"

"……?"

"제가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게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고 백소율은 마력을 흡수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니까. 끌어안는 손에 힘이 강해져 조금 답답해졌다.

"뀨우우~!"

백록의 목에 휘감겨있던 페리가 날아와 놓으라는 듯 백소율을 밀어내 풀려난 사이, 백록이 말을 걸어왔다.

"내려갈 텐가?"

"그래야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틀… 어쩌면 더 짧을 수도 있겠군."

이틀… 경계 앞을 돌아본 나는 잠깐 고민했다. 클리어해도 될 만큼 마력을 흡수한 다음 몬스터를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몬스터를 조금 남겨두고 마력을 흡수할 것인가… 순간, 무언가가 닿는 감촉에 고개를 돌렸고 거기엔 홍유리의 손이 닿아 있었다.

"……?"

***

할 수 있다. 백록과 백소율이 그랬던 것처럼 외부의 마력을 다루는 법을 더듬더듬 훑었다. 본능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모방하며 홍유리는 던전의 마력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력을 사용하는 게 편해지자 지네들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지네들을 모두 처리하고 심홍색으로 물든 눈동자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전투가 끝나자 잠깐 미뤄두었던 고민이 다시 찾아온 것.

'내가 아니라서…'

알파가 필요에 의해 데려온 건 백소율이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발목이라도 잡겠다고?'

또 기절할 텐가? 그럴 때마다 떨다가 자괴하면서? 열심히 한다거나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꼴사납게 발목이나 붙잡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알파는 분명 두렵지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그건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 이를 악문 홍유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필요 없다. 필요한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으니까.

"……!"

홍유리는 성큼성큼 눈밭을 걸었다. 푹푹 눈 속에 빠지는, 덜덜 떨리는 발이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 같다.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지금이라면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랄.'

고작 이딴 걸로…! 알파의 앞에서 홍유리는 생각하는 대신 손을 뻗었다. 망설임 같은 게 생기기도 전에 거친 털에 손이 닿았고 등줄기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이를 꽉 문 홍유리는 마력까지 일으켜 견뎌냈다. 돌아본 붉은 안광이 자신을 향하자 홍유리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단 사실에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무너져 쓰러지려는 홍유리를 보던 늑대가 촉수를 뻗기 전에 백소율이 홍유리를 받았다.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

기절할 거로 생각했는데 창백한 안색이나마 견뎌내고 있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증을 극복하는 게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시 은자림만큼은 되어야 해.'

화산각룡과 싸우기 위해선 저거노트와 싸웠을 때처럼 등에 탈 정도는 되어야 한다. 마력을 흡수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가파른 경사. 백록의 등 위에 백소율과 홍유리가 올라탔고 우리는 절벽을 성큼성큼 내려가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선생님이 아직…"

"시끄러."

걱정하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린 홍유리가 숨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할 거면 빨리하고 치우는 게 더 나아."

"……."

그렇게 바닥― 물이 흐르지 않는 서리 계곡에 내려섰을 땐 수많은 기척이 우릴 주시하고 있었다.

"존나 많네… 할 짓도 없나?"

홍유리의 신랄한 말에 픽 웃었다. 따지고 보면 동면하고 있던 몬스터를 눈사태로 인해 깨웠으니 눈총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 대부분이 절벽 위 설원의 탐욕 지네보다 강하다. B클래스엔 턱걸이로 올라설 법한 몬스터들. 덩치 큰 설인과 바닥 아래를 헤엄치는 고래 그 외에도 온갖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마력을 펼쳐 뒤늦게 감지한 백소율이 걱정스레 말하자 홍유리는 코웃음 쳤다. 영창할 시간만 있다면 격 높은 마법사에게 있어 숫자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문제는…'

백소율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진짜 문제는 이 던전의 보스― 눈 속이 아니라 절벽 깊은 곳에 느껴지는 거대한 무언가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진작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던 늑대의 눈에는 그것의 정체가 똑똑히 보였다.

[서리 군주(프로스트 본)]

[신장 21.96m] [체고 5.23m] [체중 17.2t]

[힘 475] [민첩 504] [체력 478] [마력 631]

[보유 스킬]

[대마력(B)] [마력 집중(C)] [완화(C)] [빙결의 마안(C)] [마력 갑주(C)] [고속 비행(D)]

―뼈만 남은 커다란 용이 절벽 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모습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