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56 서리 계곡 (3)
발밑이 흔들리자 늑대와 백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올라 발판 위로 올라섰다.
"――!"
한 박자 늦게 눈밭 아래를 헤엄치던 고래가 뛰쳐나와 커다란 입을 한껏 벌렸지만 이미 뛰어오른 늑대와 백록을 집어삼키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눈 속으로 숨어드는 고래의 모습에 깜짝 놀란 백소율이 입을 가린 순간, 이번에는 절벽을 타고 설인과 흡사한 사스콰치가 뛰어오르자 늑대는 촉수를 뻗어 놈을 휘감았다. 족히 1t은 나갈 것 같은 덩치였지만, 여태 상승한 힘과 촉수엔 그걸 지탱할 만한 힘이 있었다.
붙잡은 사스콰치가 몸부림치며 촉수를 뜯으려 했지만 경화된 촉수를 뜯어내기란 불가능하다. 마력을 발해 사스콰치를 높게 들어 올린 늑대는 바닥을 향해 던졌고 아까 입을 벌렸던 고래와 강하게 부딪혀 눈밭은 폭발이라도 난 것처럼 터져나갔다.
"아."
놀란 와중에도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백소율이 영창을 멈췄다.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늑대의 눈에 비치는 건 용의 골격― 절벽 안을 투시해 프로스트 본이 움직이는 걸 주시하고 있었다. 머잖아 놈이 나오기 전까지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으리라…
"―――!"
성대 없을 용의 포효가 서리 계곡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몬스터들이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동면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던 몬스터들조차 군주의 호령에 눈을 떴다. 그 소리에 백소율은 몸을 떨었고 백록은 눈을 좁혔다.
"뀨우우?"
용의 소리에 호기심을 보이는 페리와 달리 늑대는 혼비백산 도망치는 몬스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스트 본이 나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터―
"백록."
"알겠네."
홍유리는 모르겠지만 백소율은 피신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의 그녀가 아무리 애써봤자 프로스트 본에겐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홍유리는 다르다. 늑대는 백록의 등에 앉은 붉은 머리 소녀에게 말했다.
"싸울 건가?"
―서로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쳤고 흔들리는 자신과는 달리 알파는 어떠한 두려움도 공포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직시하고 물어오고 있었다. 느껴지는 마력은 끔찍하리만치 거대하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승산은 낮으리라. 하지만 알파가 정말 들은 대로 구획보스급의 괴물이라면 프로스트 본을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런 알파가 싸울 거냐고 묻고 있다. 즉, 싸우지 않을 거라면 얌전히 빠져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뜻. 홍유리에게 있어 그건 더 없는 모욕이었고― 선홍색 눈동자가 짙게 물들기 시작하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홍유리라면 그럴 거라 예상했으니까. 도발은 제대로 통한 모양. 싸울 준비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지금 본신을 드러낸 건 아니었으니까.
"…조심하세요."
쿠르릉- 절벽 안으로 이어진 동굴로부터 프로스트 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백록은 백소율을 데리고 멀어져갔다.
"뀨우우."
"홍유리를 도와줘."
작게 말하자 페리가 날아가 홍유리의 목에 자신의 몸을 길게 둘렀다. 마치 목도리처럼 둘러진 페리의 모습에 당황하긴 했어도 의외로 반발하진 않는다. 안 그래도 열 받은 상태라 자존심에 이를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직 페리에게 미안함이 남아서가 아닐까. 아니면 역시 그렇게 멍청하진 않거나.
도망치던 몬스터를 집어삼키고 만복을 유지한 채로 잠깐 기다린 사이, 프로스트 본이 마침내 절벽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홍유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대마법은…"
"알고 있거든?"
대마법을 사용했다가 남은 몬스터까지 전멸하면 던전이 붕괴하고 말 테니까. 붉게 타오르는 사슬이 날아들자 프로스트 본은 날개를 펄럭였다. 그 바람에 쌓인 눈이 몰아쳐 사슬을 방해했고 늑대는 가시를 발출했다.
"―――!"
눈은 사슬까지는 막았지만, 가시를 막진 못했다. 하지만 마력을 담은 가시 또한 프로스트 본이 두르고 있는 마력의 갑주를 뚫지 못하고 떨어졌다. 지형이 좋지 않다. 그림자를 드리워 프로스트 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결국 지형이 망가지면 그림자는 흩어지는 법. 눈이 쌓인 바닥은 그런 의미에서 최악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데.'
홍유리가 두 번째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할 때, 서리용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고 기후는 점차 악화되어 갔다. 싸라기눈은 어느새 눈보라가 되어 몰아쳤고 홍유리는 그 와중에도 정확한 발음으로 영창하고 있다.
늑대는 프로스트 본을 뒤쫓아 절벽을 뛰어올랐다. 발판을 밟고 놈에게 접근해야 하지만 눈보라가 방해다. 거리를 너무 벌리면 공격할 수 없고 너무 가까우면 위험해진다. 본신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도 필요 없었을 거다.
'지금은 손발을 맞추는 게 우선이니까.'
정 무리라고 생각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늑대는 발판을 타고 뛰어오르며 절벽 아래의 홍유리를 보았다.
***
마법의 영창이 끝났지만 조준하는 게 문제다. 거센 눈보라에 시야가 가려져 있다… 어떻게든 눈을 걷어내야만 한다. 홍유리는 붉은 마력을 일으켜 타고 올랐고 허공에 떠올랐다.
'어디에?'
볼 수 없다면 느껴야 한다. 마력을 퍼뜨린 홍유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앞― 한계까지 턱을 벌린 서리용의 모습에 홍유리는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Alb pur Stelele sunt sa explodeze―!"
알아서 와 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 최후의 영창을 외친 홍유리로부터 마법이 발출됐고 새하얀 빛이 폭사했다. 그 순간, 몰아치던 눈보라조차 모두 녹아내리고 증발해 순식간에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력으로 자신을 밀어낸 홍유리는 빈 눈구멍에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푸른 불꽃을 보고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충격이 없다고?'
―아니다. 마력 갑주가 있었을 뿐. 아까 발한 마법은 갑주와 부딪쳐 소멸했을 뿐이다. 늑대가 확인한 프로스트 본의 마력은 홍유리보다 낮았지만 대마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3절 영창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 실제로 그녀는 프로스트 본의 마력이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씨―"
욕이 이어지기 전에 홍유리는 설원 위에 내려서 있었다. 뒤늦게 페리의 존재를 떠올린 홍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뀨우!"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페리. 반대로 먹이를 놓친 프로스트 본은 창공을 누비며 노기를 드러내듯 울부짖었다.
"―――!"
떠나가라 지른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메아리친 소리에 쿠르릉 눈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홍유리는 마력을 타고 떠올랐다. 진홍의 마력이 이글거리자 서리 용 또한 그 마력을 느끼고 선회했다.
고속 비행하는 프로스트 본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홍유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수인을 맺어 사슬을 뻗어도 전혀 의미가 없다. 믿을 건 점멸뿐이라 여겼을 때,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선회해 멀어져갔다.
'……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어쩐지 눈보라 너머로 아지랑이가 보인 것 같다. 그걸 착각이라 치부한 홍유리는 마법을 준비했다. 3절이 안 된다면 4절… 진홍으로 물든 눈은 마력을 읽어나갔고 그녀가 가진 마력 집중은 영창의 속도를 가속해나갔다.
"Vopsiți totul în roșu."
***
던전의 경계까지 멀어진 백소율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백색 빛이 번쩍였을 때, 백소율은 커다란 용의 골격을 목격했다. 끔찍하게 무시무시한 마력이 용솟음치는 건 지금도 느껴지고 있다. 추위보다 불안에 떨며 입술을 짓씹는 그녀에게 백록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늑대는 자네 생각보다 훨씬 강하니."
"……? 설마?"
"어색함은 없는가? 인간의 언어를 말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라…"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는 분명 아까 알파와 대화하던 백록의 것이었다. 흰 사슴과 눈을 마주친 백소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말… 하실 수 있으셨어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잊고 있었을 뿐이네. 확실히 그동안 달라지기는 했군."
"……."
잊고 있었다는 말― 위화감을 느낀 백소율은 멍하니 백록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저런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물며 서 있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제가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없네.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마력을 흡수하는 것뿐일세."
단호하게 타이른 백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늑대에겐 아직 여유가 있었으니까.
***
'계속 도망치는데…'
쫓으면 쫓을수록 멀어진다. 고속 비행을 사용하고 있는 이상 역시 따라잡는 건 요원하다. ―따라잡을 수 없다면 앞서 나가야 한다. 아마 놈이 노리는 건 십중팔구 홍유리. 반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지만, 역시 빠른 건 놈이었다. 한발 늦게 방향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나를 지나치고 만다. 아까 기회가 있었을 때, 좀 더 확실하게 노렸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Sunt stăpânul flăcării. O lume arzătoare de proeminență."
프로스트 본을 쫓아 돌풍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좁혀진 간격― 그런데도 놈이 더 빠르다. 홍유리는 여전히 영창하고 있었고. 위기의 순간, 페리의 점멸이 기지를 발해 벗어난 순간, 나는 촉수를 뻗어 홍유리를 당겼고 놈의 안와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반짝였다.
'빙결의 마안.'
―쩌적 얼어붙기 시작한 몸은 귀화가 타오르자 한 줌의 수증기로 화했다. 당겨진 홍유리는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고 여전히 영창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감탄했다.
'물에 빠져도 입은 뜨겠구나.'
프로스트 본은 결국 턱을 벌렸고 무시무시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켜는 대신, 눈보라가 마력에 빨려 들어간다. 그걸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무리야.'
공허나 흑무라도 출력에 밀리고 말 거다. 용종의 브레스― 하물며 대마력을 가진 데다가 600이 넘는 마력으로 발출되는 숨결은 결코 얕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것보다 빠르게 홍유리는 마지막 주문을 영창했다.
"Flăcări nesfârșite se vor ridica și o vor acoperi―!"
눈보라 속에서 일어난 겁화가 크게 타올라 프로스트 본을 향해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