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56 서리 계곡 (4)
4절 영창― 광대한 창공을 뒤덮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겁화의 불길을 본 서리용의 판단은 빨랐다. 브레스를 방출하는 걸 보류하고 날개를 펄럭여 피하는 걸 우선시했지만, 늑대의 판단은 그것보다 더 빨랐다.
"―――!"
도망치는 와중에도 프로스트 본은 아지랑이를 보았다. 그것을 간과하지 않고 선회한 건 옳은 판단이었지만, 화마가 프로스트 본을 덮칠 시간을 벌어주었다.
'감이 좋아.'
아까 홍유리를 노렸을 때도 그랬지만 공허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있다. 확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감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마에 휩싸인 프로스트 본은 날개를 펄럭여 탈출하려 했으나,
"놔둘 줄 알고?"
홍유리가 주먹을 쥐자 넓은 범위의 화염이 한데 모여 압축되기 시작했다. 좁혀오는 불길은 마력갑주를 깨트리고 서리용의 백골을 검게 불사를 정도였지만―
'그래도.'
프로스트 본의 턱이 천천히 벌어진 순간, 화염이 푸르게 물들어갔다.
"……!"
홍유리의 마법을 집어삼켜가는 브레스는 처음에 비해 기세는 줄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이었다. 겁화에 의해 수증기가 되었던 눈보라는 딱딱한 우박이 되어 흘러내렸다. 브레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촉수로 홍유리를 들어 올린 채 발판을 밟으며 뛰어올라 피했고, 브레스가 멎었을 때는 설원과 서리 계곡은 꽁꽁 얼어붙어 극빙의 대지로 변해 있었다.
'……데미지는 있어.'
검게 불살라진 뼈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지금이라면 조금 충격을 주는 것만으로도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슬쩍 홍유리를 돌아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고민하는 것보다 다음 마법을 영창하는 것이 천성이 마법사다. 또 페리까지 있으니 만약의 경우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발판을 만들어 밟고 뛰어오르며 귀화를 일으켰고 얼어붙은 대지는 천천히 녹아갔다.
'…도망친다고?'
프로스트 본은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건지 나와 싸우려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완전히 도망치지는 않고 거리를 두고 호시탐탐 홍유리를 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모양. 아까 마법 때문인지 잔뜩 열받은 듯 보인다. 동선을 읽고 가시를 쏘아냈지만 놈은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역시 거리를 더 좁혀야 해.'
발판을 만들어 촉수로 붙잡고 자신을 던졌다. 탄력과 함께 수십 미터를 날았을 때, 놈의 눈이 부릅떠지며 서서히 멀어져 갔다. 도망치는 용을 향해 늑대는 이를 드러냈고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수십수백의 가시가 프로스트 본의 움직임을 막았지만 놈은 그냥 지나쳤다. 피했다는 게 아니라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나갔다는 뜻이다. 마치 내가 접근하는 게 더 위협적이라는 듯 경계하고 있다. 아직 마력 갑주를 다시 두르지 못한 프로스트 본의 몸 곳곳에 가시가 틀어박혔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
마음먹고 도망치는 프로스트 본을 잡기란 요원하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Multiplexare cu lanț de flacără!"
―홍유리의 마법, 셀 수 없는 진홍의 사슬. 창공을 수놓은 수십수백의 붉은 선은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이며 프로스트 본을 쫓았다. 분명 사슬보다 서리 용이 훨씬 빨랐지만, 놈이 도망칠 방향은 아까와 같이 공허가 틀어막고 있다.
'됐어.'
이걸로 벗어날 방법은 없으리라― 결국 붉은 사슬은 포위망을 좁혀 프로스트 본을 뒤덮었고 순간, 놈의 안와에 타오르는 불꽃이 푸르게 반짝였다.
―빙결의 마안. 시전자와 눈이 마주친 대상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저주 받은 눈.
늑대가 가진 완화에 반감되고, 검은 불꽃은 마안의 힘 따위는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아까와 같은 결과가 되풀이될 뿐 '늑대에겐' 전혀 소용없었다.
"……!"
사슬에 구속당한 프로스트 본이 움직이려 했으나, 붙잡혀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무수한 사슬에 붙잡힌 프로스트 본은 발악하듯 몸을 비틀었고, 그 입에서 또 한 번 브레스― 아니 그렇게 부르기엔 민망한 마력 덩어리를 계속해 내뱉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슬은 기어코 창공에 뜬 프로스트 본을 계곡의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마력을 끌어올려 폭풍을 일으킨다면 물론 벗어날 수 있겠지만, 검게 물든 뼈― 지금의 놈에게 그 충돌의 여파를 견뎌낼 체력은 남아있지 않다. 그랬다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리라.
늑대는 추락한 용을 향해 계곡 아래로 몸을 날렸다.
***
"떨어졌어요…"
창공을 활보하던 던전의 보스가 무수히 많은 사슬에 억눌러져 기어코 대지에 추락했음을 보았다. ―의심할 여지 없는 승리임에도 백록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인다.
"……위험하군."
뜬금없는 말에 백소율은 시선을 돌렸고, 백록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너지고 있네."
―검은 불꽃과 불의 마법. 여태 사용했던 그 힘들이 얼어붙은 눈과 대지를 녹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슬에 붙잡힌 프로스트 본이 쏘아낸 마력 덩어리가 부딪친 충격으로 설원에 눈사태가 일어나 계곡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계곡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위험을 미리 감지한 몬스터들이 계곡 위 설원을 향해 절벽을 기어올랐으나 되려 휩쓸려 깔려버리고 만다. 그 천재지변 속에서 늑대와 마법사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일단 빠져나가야겠군."
눈사태가 더 크게 일어나면 여기도 안전하지 않으니까.
"설마 이대로 두고 나가시려는 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에도 백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옳은 판단이네."
발밑이 무너져가는 충격 속에 백록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경계를 향해 몸을 던졌고 볼살을 깨문 백소율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셀 수도 없는 양의 눈이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
진홍의 사슬에 의해 대지로 끌어내려진 프로스트 본은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펼치려 했으나 날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허를 두른 영량은 프로스트 본의 전신을 잠식하고 집어삼키고 있었다. ―늑대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프로스트 본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
―그렇다면 적어도. 프로스트 본은 충격을 견디지 못할 거라 여겨 사용하지 않았던, 남은 마력을 망설임 없이 끌어올렸다. 기이한 검은 안개가 마력을 억눌렀다. 하지만 안개가 덮이지 않은, 프로스트 본과 맞닿아있는 바닥만큼은 어쩔 수 없다. 폭풍은 큰 충격을 일으키더니 바닥을 깨뜨려갔다. 눈이 쌓인 바닥에 큰 충격이 일었고 홍유리가 서 있는 바닥이 무너져내렸고― 늑대는 황급히 촉수를 뻗어 끌어당겼다가 싸늘한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망할…'
"―――!"
그것을 마지막 발악으로 다소 허무하게 프로스트 본은 그림자 속에 완전히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프로스트 본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17 → Lv.19]
충분한 경험치를 획득했음에도 늑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뀨우우웃!"
페리가 울자 늑대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사슬에 둘러싸이기 직전, 프로스트 본은 마안을 사용했었고 늑대에겐 통하지 않았다. ―늑대에게는 말이다. 마안은 뛰어났고 서리용의 마력은 대단했지만, 사실 홍유리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사슬을 포기하고 마력을 일으켜 저항했으면 됐을 텐데 홍유리는 기어코 프로스트 본을 구속하는 걸 선택한 것이다.
'고집? 그게 아니면…'
이를 악문 늑대는 얼어붙은 홍유리를 데리고 뛰어오르려다가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무수한 눈덩이. 거대한 눈사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점멸을 사용한다면…'
C등급으로 상승했다지만 점멸의 거리는 길지 않다. 늑대는 페리와 시선을 마주했고, 서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점멸을 사용했다.
―프로스트 본이 잠들어있던 동굴 안으로.
***
쿠구구구―!
눈사태는 기어코 계곡을 뒤덮었다. 프로스트 본이 보금자리로 삼았던 동굴. 통로가 바닥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경사가 있어 눈사태 속에서도 눈이 침범하지는 못했지만, 입구가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건 상관없어.'
점멸로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지만, 귀화가 있는 이상 시간을 들인다면 결국 탈출할 수 있으니까.
"뀨우우."
문제는 얼어붙은 홍유리― 흑무를 일으켜 진작에 뒤덮은 얼음은 없앴지만, 사라진 체온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홍유리만이 아니라 눈보라를 맞고 있던 페리 또한 추위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에 귀화를 일으킨 늑대는 동굴 안이 뜨거워지는 걸 기다렸고, 페리는 모닥불처럼 귀화를 쬐며 숨을 돌렸고 동굴 안은 금세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
또 기절―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진다.
"……?"
그러다가 어쩐지 포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자신이 무언가에 안겨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익숙한 검은 털― 멍하니 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거친 감촉을 느끼고 있던 홍유리는 갑자기 고개를 들이민 페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뀨우우~!"
무언가를 알리는 듯한 울음소리― 그제야 홍유리는 마지막에 자신이 서리용을 추락시켰음을 떠올렸다. 한기가 침투하는 중에도 놈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던전에 오고 느꼈던 자괴감에 더 이상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쓰러뜨렸나?'
그러니까 살아있겠지.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못 잡으면 그게 등신이지. 아마 뒷일은 알파가 알아서 했을 테고……?
'……?'
그러다가 문득, 홍유리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검은 털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니까, 제법 길고 거친 털. 마치 커다란 늑대가 가지고 있을 법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낮은 목소리가 홍유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일어났나."
―그동안 들었던 목소리보다 한층 더 낮은 저음이 동굴 안을 울렸다. 홍유리는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이 털이 누구 것인지 그리고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닫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직 움직이지 마라. 몸이 다 녹지 않았으니까."
프로스트 본은 쓰러뜨렸지만 눈사태가 일어나 동굴로 숨어들었고 빙결의 마안에 당해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품고 있었고 밖은 눈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그런 늑대의 설명 따위는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 혼란 속에서 홍유리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