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56 서리 계곡 (5)
빙글빙글 눈이 돌아가고 있지만, 홍유리는 어찌어찌 정신을 붙잡고 있다. 본신을 드러내긴 했으나 안겨있는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검은 털뿐이니까. 지금 그녀는 늑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힘들 만큼 놀라고 있었다.
"…히끅!"
딸꾹질이 나왔지만 입을 가릴 수가 없다. 마치 곰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알파에게 안겨서…
'왜, 왜 이렇게 됐지?'
늑대는 분명 설명했지만, 백지가 된 그녀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괜히 움직였다가 혹시라도 불쾌해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안겨 있는 건 이상하지 않나…?
그녀답지 않은 고민이 머릿속을 마구 헝클었다. 옅어지기는 했어도 아직 남은 두려움이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가빠진 숨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익숙해지자 그다음으로 떠오른 건 의외로…
'……따뜻해?'
저도 모르게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꽁꽁 얼어붙은 몸을 안아주는 체온에 기대며 불안 속에서 되레 안심하고 말았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은 아직 무서워하고 있음을 알려주지만, 그게 불쾌하게 느껴지기는커녕 편안하게 느껴진다.
'……왜?'
……녹아내리는 몸. 조그마한 두근거림.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뒤늦게 피로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훈훈하고 따스한 공기 속에서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홍유리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의외로 포근하고 따스하다는 거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말하려다 고른 숨소리를 듣고 말을 잊었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평소의 독기와 불같은 성격이 빠진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만 있었다.
"뀨우."
"그래. 가만히 자고 있으면…"
참 귀여운데… 나도 모르게 볼을 찔렀다. 찐빵처럼 말랑한 감촉. 그러다가 문득, 홍유리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중이 없었으니…'
왜 헌터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런 표독스러운 성격이 된 건지… 아니, 그래도 그때 이후로는 많이 온순해진 것 같기는 하다. 자꾸 기절하는 게 안쓰럽기도 해서 내가 먹고 말았던 손목을 잠깐 바라보았다.
'아직도 회복이 안 됐나?'
손바닥의 반쯤이 생기기는 했지만 온전한 손의 모습은 아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필요도 없는 회복 스킬을 획득할 수는 없으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 홍유리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정상으로 돌아온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이 된 것 같으니까. 잠든 홍유리를 변형한 털 속에 감싸 안고 발판을 만들어 천장에 가까워졌을 때, 늑대는 공허를 불러일으켰다. 굳이 눈으로 가득한 입구를 뚫고 갈 필요 없이 동굴 천장을 먹어 치우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백소율을 보며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절벽이 높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위험은 없었다.
"서리 계곡의 주인은 쓰러뜨렸는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프로스트 본을 쓰러뜨린 이상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으니까. 불안한 듯 보이는 백소율의 표정을 보고 감싸고 있던 변형을 풀어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선생님…"
놀라 다가간 백소율은 세상모르고 곤히 잠든 얼굴을 보곤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다친 것 같지는 않으니까. 흰 사슴의 말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거다…….
"두 분 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그래. 마력만 흡수하면 끝이다."
그러면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다. 그다음엔 화산각룡과 싸울 준비만 하면 될 뿐. 기절하지 않았던 거로 보아 이젠 공포증도 제법 나은 모양이고…
"홍유리가 깨어나면 다시 들어가겠다."
배낭을 연 백소율은 돗자리를 꺼내 홍유리를 눕혔다. 어차피 이틀가량은 마력을 흡수해야 할 거라 했던가. 그럼 던전의 경계에서 멀어질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던전으로 진입하고 싶지만, 아직 춥다는 듯 떨고 있는 페리와 비록 내색은 하지 않지만 피곤해보이는 백소율…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화르륵.
모닥불 대신 피어오른 검은 불 앞에 둘러앉아 홍유리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뀨~!"
그게 그리도 맛있을까? 살덩이를 먹는 페리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물들어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익혀서 주면 좀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쩐지 미묘한 표정이었다.
"……뀨우우."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취향이 아니란 걸까? 고개를 저은 페리에게 다른 고기를 주려던 순간, 백소율이 움찔거렸다.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더니 금세 일어나고 만다.
"더 자도 된다."
홍유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니까. 그 말에 백소율은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오지 않아요"
환계라서 그런 걸까? 잠에 못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숙면을 취한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그녀의 체질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백록의 말이 맞았네요."
대답하는 대신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었거든요… 정말이었어요."
돗자리에 앉은 채로 상반신을 기대어온다. 나를 베개 삼아 누운 백소율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 대신 바다가, 별 대신 환수가 수놓아진 광경을 보며 그녀는 홀린 듯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서."
꿈에도 그리던 장소. 아까, 잠깐 눈을 붙였던 백소율은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가 환계라서? 아니, 그건 아마도…
"…여기 일이 끝나면 또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 환영의 나비가 영입되는 것을 막고 탕아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네버랜드도 아직 클리어한 게 아니고 거기다 자색의 흑호도 남아 있다. 바다의 재앙도 역병과 질병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결국엔 종말도 막아야 할 테니까― 떠넘겨진 일이지만, 하지 않을 순 없다. 그랬다간 환계도, 페리도 인류도 전부 죽고 말 테니까. 곤히 잠든 페리의 머리를 괜히 쓰다듬었다.
"…부럽네요."
작게 들린 말에 시선을 돌렸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 저었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자니, 백소율은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떠날 거라면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처음 만났을 때도 들었던 말.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백소율에게 영약을 주고 환계로 데려온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도움받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겠죠……?"
시무룩히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의 정수리를 톡톡 건드렸다. 얌전히 포기한 모양― 등을 기대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는 늑대로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백소율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자네들은 잠도 없는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돌렸고 거기엔 백록이 게슴츠레 좁힌 눈으로 보고 있었다.
"깨셨어요? 죄송해요."
"…어차피 굳이 수면이 필요한 몸은 아니라네."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태연하게 대화하는 둘― 백록은 요정어가 아닌 사람의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하고 있었으니까.
"백록…"
"그러고 보니 자네 앞에서 인간의 말을 한 건 처음인 것 같군. 제법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니까."
"오랫동안?"
"글쎄… 얼추 수백 년은 된 것 같은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하는 그 말에 아연했다. 말이 좋아 수백 년이지 그 시간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하물며 그 세월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태도… 새삼 백록이 환수임을 실감했다.
"그건… 이상하지 않나요?"
백소율이 의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마력이나 몬스터 같은 게 나타난 건 거의 50년 전이라고 배웠어요. 물론 백록이 몬스터라는 뜻은 아니에요.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말대로라면 이상하지 않으냐고 백소율이 흐린 말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물음에 백록은 태연하게 답했다.
"환계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니까."
"오래전이요?"
환계는 거울과도 같은 세계. 현계가 끝을 맞이했다면 환계 또한 마찬가지. 무수한 평행 세계의 환계가 마찬가지로 사라졌을 터… 그러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백록이 종말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거라면 역시…'
"그렇다네. 내려져 오는 전설 같은 건 종종 있지 않던가?"
"설마 그게…"
"아주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면. 자네들이 보지 못하고 믿지 못했을 뿐 우린 언제나 있었네."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홍유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하품하며 입을 두드리며 기지개를 켜던 그녀는 이내 우뚝 굳어버렸다. 팔을 들어 올린 채 어버버 거리던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
생각해보니 지금은 본신이었던가. 동굴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제 접촉하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한 모양이지만 역시 본신을 드러낸 건 힘든 모양이다. 다시 몸을 줄이려 했을 때, 홍유리는 심호흡과 함께 숨을 가라앉혔다.
'의외로 괜찮나?'
그때 당시에는 음영랑이었으니 외형이 조금 변한 게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침을 삼킨 홍유리는 결국 고개를 돌렸으나 쓰러지진 않았고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네.'
"그럼 슬슬 출발하지."
***
다시 던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눈 속에 깊게 파묻힌 몬스터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마리 남진 않았고 녀석들마저 없어지면 던전이 붕괴하리라. 조금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갔다 오겠다."
쳐다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뛰어오른 늑대는 탐지를 펼쳐 주변을 살폈다. 가장 가까이서 느껴지는 기척에 촉수를 깊게 뻗어 내린 늑대는 몬스터를 잡고 눈 밖으로 끄집어냈다.
"……."
얼마 남지 않은 몬스터는 숨을 몰아쉬는 듯하더니 이내 늑대에게 달려들었고 다리의 힘줄이 끊어져 쓰러졌다.
'살려둬야 해.'
대부분은 눈사태에 휩쓸려 죽었지만, 목숨줄이 질긴 몇몇은 버젓이 살아남았다. 마력을 흡수할 때까진 살려둘 필요가 있다. 늑대는 눈 속에 파묻힌 몬스터를 구한 다음 힘줄을 잘라두는 작업을 반복해갔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틀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