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57 화산각룡 (2)
늑대는 탐지를 사용해 바닥 아래를 훑었고 감지되는 기척이 생각 외로 적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적었나?'
확실히 그 때, 제법 처리하기도 했고 화산각룡에게 도망쳤을 때 놈들이 휘말리기도 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정도는 아니다.
'나쁜 건 아니야.'
어차피 19레벨의 한계치까지 남은 경험치는 얼마 되지 않으니까. 일단 놈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그림자와 돌풍 그리고 흑무조차 용암에 침투할 수는 없다. 같은 이유로 탈식으로도 용암을 먹어 치울 수는 없다. 그 전에 용암에 당하고 말 테니까. 하지만 공허라면 용암조차 집어 삼킬 수 있으리라.
아지랑이는 바닥을 뚫고 용암을 게걸스레 먹어 치웠고 지하 아래의 괴물들까지 포식하기 시작했다.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그렇게 서너 마리를 먹어 치웠을 때, 과연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은지 무언가에 습격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모양인지 몸부림치며 달려든 용암 상어는 그대로 아지랑이에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
"―――!"
놀란 몬스터들이 몸부림치는 기척을 느끼며 늑대는 다음을 준비했다. 순간, 바닥을 부수고 솟구친 용암의 괴물들은 남김없이 그림자에 꿰뚫리고 바람을 두른 검은 안개 갉아 먹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소음에 화산각룡의 거체가 꿈틀거렸다. 산이 일어나는 듯한 광경― 조금의 움직임만으로 지형이 변했지만, 늑대의 은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보이는 거라곤 용암이 솟구치는 모습뿐. 화산각룡은 다시 눈을 감았다.
'혹시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뛰어난 은신(C)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뛰어난 은신(C) Lv.9 → 뛰어난 은신(C) Lv.10]
[뛰어난 은신(C)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뛰어난 은신(C) Lv.10 → 비가시화(B)]
숨죽이고 물러났던 늑대는 오래간 유용하게 사용했던 은신이 마침내 최대 레벨에 도달했음에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비가시화― 여태까지의 은신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모습을 감출 수 있게 됐다. 원한다면 CCTV에도 보이지 않겠지만.
'인제 와서…?'
그게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써먹을 곳은 넘쳐나겠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화산각룡과 용암이 모두 잠잠해지자 늑대는 다시 공허를 일으켰다.
***
"……!"
화산각룡이 눈을 뜬 것에 침을 삼켰다. 집중이 끊어질 수밖에 없는. 저 먼 곳에서 움직였음에도 그 진동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생물의 영역은 한참 넘었고 몬스터라 해도 이해되지 않는 거대함. 아마 바다의 재앙을 제외하면 최대 크기의 몬스터이리라.
'…저런 걸 어떻게.'
물론 방법은 들었다. 공격은 어떻게든 피할 테니 대마법을 준비하라고 했던가. 하지만 설령 대마법이 적중한다 하더라도 저것을 죽일 자신은 없다. 그런 괴물― 그건 알파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싸우겠다고 한다… 어째서?
'……끝을 막겠다고 했었지?'
확실히 인류는 멸망의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그게 환계의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모르겠다. 여전히 알파에게는 아직 숨겨진 비밀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
그래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
"선생님?"
조금 멍해 보이는 표정에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이 모여들자 홍유리는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심쩍은 시선이 향하자 눈가가 경련했다. 한마디 하려는 순간, 화산각룡이 다시 움직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가리고 숨을 멈췄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언가가 은폐막을 뚫고 들어오자 홍유리는 눈을 치떴다.
"나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있다. 막이 없었다면 모르되 뚫고 들어온 걸 착각할 리 없으니까. 손을 들어 겨누는 순간,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파?"
커다란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젠 눈앞에서도 몰라볼 뻔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가 가지고 있던 은신이 새로운 경지에 달한 모양… 홍유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용암 속 몬스터는 대부분 처리했다."
아직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이 향하자 늑대는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화산각룡과 싸우기 전에 탈식과 만복을 유지하기 위해 남겨두기는 했지만, 남은 건 백록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일 터. 정말 만약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문제는 없을 거다.
"…이제 마력을 흡수하기만 하면."
화산각룡과 싸울 준비가 끝난다.
***
달인 물과 남은 인삼 뿌리를 질겅거리는 홍유리의 모습은 마치 소주와 오징어 다리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이네요."
백소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용암 속 몬스터들을 정리한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서리 계곡에서는 이틀이 걸렸지만, 화산 지대는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었는지 시간이 더 오래 걸려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당장 던전이 붕괴해도 문제없을 만큼 마력을 흡수한 뒤였으니까.
'생각보다 더한데.'
얼마 전에 300 남짓했던 백소율의 마력은 400을 향해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달려가고 있다. 그 정신 나간 성장세에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한계는 있는지 점차 느려지고 있다. 환계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듯하다.
'백록이 굳이 마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아직은 괜찮지만, 백소율의 마력을 늘리기 위해선 결국 새로운 동력원이 필요할 거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인삼을 먹고 있는 백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되레 고개를 갸웃거린다. 백록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처음 보아 그러는 거였지만. 그와 동시에 통찰을 사용하자 마찬가지로 마력이 상승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고개를 저었다. 화산각룡과 싸우기 전, 마지막 휴식을 하고 있었다. 환계의 마력을 갈무리할 시간이기도 했다.
머잖아 눈을 감고 집중하는 그들을 보며 늑대는 다가올 때를 기다렸다.
***
"오, 돌아왔냐?"
"예. 간만입니다."
늙은 헌터가 격하게 반기는 모습에 우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한 재생을 얻은 이후에는 상처가 낫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잠깐 둘러보던 우택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어 물었다.
"부팀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글쎄다. 외근이라고 언뜻 듣기는 했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네. 없으면 좋지 뭘 그러냐."
틀린 말은 아닌지라 우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한쪽 구석에 있는 이은하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모로 꺾었다.
"…마력이 늘었네?"
그 의문에 늙은 헌터는 귓밥을 후 불며 답했다.
"영약 먹었단다."
"…영약이요? 무슨 뜬금없이."
영약이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아무리 여명이라도 일개 클랜원에게까지 영약을 공급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사 먹었다는 건 더 말이 안 되는데…?
"너 인마, 아무것도 못 들었냐?"
"예? 뭘 말입니까?"
우택이 의문을 가지자 늙은 헌터는 쯧쯧 혀를 찼다.
"얼마 전에 난리였다. 알파 그놈이 클랜에서 버젓이 지내고 있었다 이 말이다."
"설마 제가 아는 그 알파 말입니까?"
늙은 헌터는 그렇다고 답했지만 우택은 실없는 농담이라 여기고 픽 웃었다. 마랑이라 불리는 알파가 여명에 지냈다고?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허. 농담 아닌데, 자식아. 이것 좀 봐라."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늙은 헌터는 사진첩을 열어 사진을 보여줬지만, 거기엔 귀엽게 생긴 검은 강아지가 찍혀있을 뿐이다. 대체 이게 뭐냐는 듯한 우택의 표정에 늙은 헌터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게 알파다."
"……죄송하지만 치매십니까?"
여전히 진지한 표정― 옆에 있는 헌터에게 묻자 그 또한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작당한 게 아니라면 이게 진짜라는 말인데… 우택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럼 알파가 와서 은하한테 영약을 줬다는 겁니까? 진심으로요?"
"그렇다더라. 거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는데…"
순간, 문이 열리고 거한이 들어와 우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2, 2팀장님?"
팀장과 부팀장이 전부 부재중인데 왜 3팀에…? 의문이 담긴 시선에 강태호는 양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치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알파 그놈이 왜 왔었는지 알려주랴?"
여명의 2인자인 그라면 분명 알고 있을 터― 우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태호는 반드시 너네 팀장에게도 일러주라고 당부했다. 물론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드리지 않을 리 없다. 우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강태호는 속 시원하다는 듯 낄낄거리고 있었고 우택의 표정은 떨떠름하게 변했다. 또한, 셋 아니 넷만 알고 있던 이야기를 한 명이 더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
"아 씨, 귀 간지럽네… Ascunde."
다시 은폐막을 펼친 홍유리가 이마를 찌푸렸다.
"역시 그 전 던전이 훨씬 나았어."
서리 계곡에서 불평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딴소리였다. 던전에 들어온 건 나와 홍유리 그리고 페리까지 셋. 이미 마력을 흡수한 이상, 백소율이 들어올 필요는 없으니까. 남겨 둔 용암 몬스터를 공허로 먹어치워 탈식과 만복의 효과를 받았다.
'이제…'
남은 건 화산각룡. 지난 나흘간, 홍유리는 내게 올라타는 걸 연습하고 있었다. 사실 그게 가장 문제였지만 자존심과 고집은 그녀를 이끄는 동력원이 되어 기어코 성공시키고야 말았다. 환계에서 지낸 요 일주일간 공포증은 거의 극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
그래도 말이나 행동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홍유리치고는.
"아무튼, 대마법부터 쏘고 시작하라는 거지?"
"그래."
"시발… 무슨 저딴 거랑 싸워야 돼? 영약 값 존나 비싸게도 치르네."
투덜거리면서도 영창을 시작하는 홍유리. 애초에 밝히는 걸 꺼려하고 있던 환계에 데려온 거니까 가능한 굴릴 생각이었다.
'화산각룡이면 인삼정도야…'
어차피 환계의 일은 생각이 있다면 크게 퍼뜨리지도 않을 테니까. 저 멀리 바위산처럼 보이는 화산각룡을 보며 새삼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봐도 화려한 스테이터스와 거대한 덩치.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스킬들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는 모든 피해 감소와 약한 재생까지 있었으니 확실한 데미지를 입히고 시작해야 한다. …가능하면 이걸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걸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리라.
"―Acoperit în foc negru."
4절. 그렇게 마법이 구현되어 상공에 거대한 육망성이 드리웠을 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는지 화산각룡은 몸을 일으켰다. 그 육중한 덩치가 일어나는 것만으로 땅이 울렸지만, 이미 발판을 밟고 높이 떠오른 상태. 홍유리는 진홍으로 물든 눈을 빛냈다.
"Arzând în abis și transformându-se în cenușă―!"
마지막 영창에 따라 태양의 흑점을 연상케 하는 검은 불꽃이 일어났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심연 속에서 타오르는 불― 여명 제일의 마법사가 영창한 대마법을 본 화산각룡은 한껏 입을 벌려 소리쳤다. 그 포효만으로 늑대가 휘청거렸고 밟고 있던 발판이 깨져나갔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대마법을 흩을 수 있을 리 없다. 늑대는 홍유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끔 그녀의 허리를 촉수로 강하게 붙잡았고, 추락한 흑점은 그렇게 폭발했다.
"――――――!"
소리를 지르는 화산각룡. 그것이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한 번으로는 무리였나?'
능히 섬 하나를 불태울 수 있는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화산각룡은 견뎌내고 말았다. 용암을 두르고도 아무렇지 않은 몸은 불에 대한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을 터― 그건 놈이 가진 A등급 스킬 화신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용혈과 용린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용종이라는 뜻. 당연히 그 생명력은 여타의 몬스터들과는 격을 달리할 테니 그럴 거라 예상은 했다.
"뭐, 존나 커서 맞추기는 쉽네."
곧 숨을 가다듬은 홍유리는 또 한 번 영창을 읊었다.
"Arzând în abis și transformându-se în cenușă―!"
미리 보류해두었던 대마법. 다시 떠오른 육망성을 보고 화산각룡은 한껏 입을 벌렸고 그 속에서부터 마력이 끓어오르더니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종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을 브레스. ―그리고 그것보다 빠르게 또 한번 흑점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