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57 화산각룡 (5)
알파가 각룡의 몸 밖으로 나와 물러난 순간 홍유리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알파가 죽고 말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었을 뿐.
'노리고 있었어…?'
사람이 아닌 마랑이기에, 분명 무수한 사선을 넘어왔기에 가능한 발상. 생각의 뿌리 그 근본부터가 사람과는 다르다.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실행에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그 누가 각룡에게 삼켜지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런 건 클랜장님이라도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덕분에 더없는 기회를 잡았다. 마지막까지 알파는 화산각룡의 눈을 찢어발기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홍유리의 눈이 진홍의 빛을 흩뿌렸고 그에 따라 창공의 마법진에 그려진 육망성이 빛나기 시작했다. 룬어와 고어가 섞인 문자열이 회전하며 돌아가기 시작할 때, 홍유리는 팔을 들어 올리며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Arzând în abis și transformându-se în cenușă―!"
세 번째 대마법. 다시 폭발한 대마법은 앞선 두 번과는 다른 위력을 가지고 있다. 진홍의 마력을 있는 대로 쥐어 짜냈으니까. 다음을 준비하지 않은 일격. 이걸로 쓰러뜨리고 말겠다고 그리 결심한 혼신의 마법―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가 거기에 담겨 있었다.
가지고 있는 마력 재생 스킬이 아니었다면 진작 정신 고갈에 쓰러졌을 만큼. 진작 부러진 늑골이 폐를 쿡쿡 찔러댔다. 안 그래도 뜨거운 열기와 연기에 숨을 쉬기 어려운데 각룡의 일으킨 불이 대기를 태워 산소가 부족하다… 머리가 멍해지는 중에도 홍유리는 눈을 감기는커녕 오히려 부릅뜨며 지켜봤다.
'쓰러질 거야.'
무조건. 반드시. 흐려진 시야, 눈에 연기가 섞여 들어오더라도 홍유리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렇게 마침내 작렬한 마법― 한계 이상으로 압축된 마력은 흑점이 되었고 팽창해 터져나갔다.
빗나가지 않았다. 확실하게 적중했다.
―쓰러지지 않을 리 없다. 화산 그 자체를 두른 듯, 용암과 불꽃이 이글거리는 각룡의 전신에 둘린 모든 것이 순식간에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용린과 살점이 뜯겨나가고 허연 뼈가 드러났다. 급한 대로 그나마 남아있는 마력으로 급속 회복을 사용하지만 그 커다란 덩치가 다 커버될 리 없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에 알파가 내부에서 날뛰었던 데미지가 남아있을 터. 진홍의 눈동자로 기울어져 가는 각룡을 확인한 순간, 홍유리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환호했다. 드디어 쓰러뜨렸다고…!
바닥에 잔뜩 깔린 용암에 쓰러진 거신이 반쯤 덮이고 용암은 각룡의 드러난 살과 피 속으로 스며들었다.
"―――!"
괴로움에 몸부림칠수록 그나마 있던 바닥조차 부서 가며 각룡은 더욱더 깊은 곳으로 빠져갈 뿐. 흐릿하게 미소 지은 홍유리는, 다음 순간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용암 폭풍은 아직 흩어지지 않고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급히 수인을 맺던 홍유리는 정신이 어긋나는 듯한 무언가를 느꼈다. 과도한 마력의 사용. 이미 바닥을 드러낸 마력을 억지로 퍼내기 위해 바닥을, 정신 밑바닥을 긁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도 모여든 건 극히 미약한 양일뿐. 도저히 용암 폭풍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이대로 떨어져 녹아버리거나 혹은 폭풍에 휘말려 죽거나. 선택은 두 개뿐이다. ―홍유리에게는 그랬다는 뜻이다.
"…늦,잖아."
촉수가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기는 감각. 아슬아슬하게 폭풍의 권역에서 벗어난 홍유리가 실소했다.
"……그래. 조금 늦었다."
네가 당겨서 옆구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려던 홍유리는 꾹 입을 다물었다. 엉망이 된 알파의 모습― 검고 거친 털은 그을려서 제멋대로 뻗어 있었고 군데군데 상처가 드러나 있다.
때문에, 서리 계곡에서 느꼈던 그 따뜻한 포옹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무언가가 징징 울렸다. …왜? 뭐 때문에? 조심스레 자신을 들어올린 알파는 자신의 등 위에 나를 살포시 눕혔다.
'상처가…'
홍유리는 저도 모르게 알파의 털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심한 상처. 허옇게 드러난 뼈는 한눈에 보아도 어긋나고 부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인제 보니 입가에 피도… 화산각룡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괴물과 맞섰기 때문일까? 아니면 흑점 폭발에서, 대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기 때문일까? 그러면 조금… 미안한데…
"――――――!"
땅을 울리는 굉음. 천지를 떨치는 포효. 기세는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몰아치는 폭풍― 힘겹게나마 몸을 일으켜 아직 포기하지 않은 굳건한 화산의 의지를 본 홍유리의 눈꺼풀이 엷게 떨렸다.
'쓰러지지 않았어…?'
믿을 수 없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확실하게 적중했다. 용의 비늘조차 부서져 떨어져 나갔는데…!
당혹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이 밀려왔다. 그나마 여태 지탱하고 있던 에고가 약해지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끊어질 것처럼 희미해져가는 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자고 있어라."
귓가를 파고드는 늑대의 말. 고작 그뿐인데 술렁이던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개소리 말라고 쏘아붙여 줬을 텐데… 어째서? 붙이려면 이유는 얼마든지 붙일 수 있겠지만 전부 틀린 것 같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홍유리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면 전부 끝나있을 테니."
―이상하게 스며드는 듯한, 그런 말을 들으면서.
***
가장 높은 곳에 발판을 만든 늑대는 쓰러진 홍유리를 올려놓고 다가오는 폭풍을 공허로 하여금 먹어치웠다. 스테이터스의 한계. 본래 늑대가 가진 낮은 체력으로는 재생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없지만, 늑대의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시켰다. 탈식― 빼앗은 것은 무쌍의 힘을 자랑하는 화산각룡의 체력이었으니까.
새롭게 탈바꿈한 듯 변한 늑대의 털이 새롭게 자라고 부러진 뼈가 맞춰졌다. 흐르는 용암 속에서 기어코 몸을 일으킨 화산각룡― 놈의 상처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체력뿐 아니라 마력 또한 마찬가지로 공허가 게걸스레 먹어 치웠으니까.
넝마가 된 각룡이 입을 벌렸을 때, 늑대는 공중을 달렸다.
'끝낸다.'
흑점은 기어이 화신을 몰아냈다. 불을 다룰 수 없게 되고 양 눈을 잃어버린 빈사상태. 거기에 마력조차 남지 않은 각룡은 일개 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순간, 각룡은 최후의 힘을 쥐어짜내듯 발악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파괴적인 돌진이었으나 고작 그런 게 늑대에게 닿을 리 없다. 오히려 좁혀진 거리에 망설이지 않고 몸 위로 뛰어올라 착지한 늑대로부터 그림자가 일어나 각룡의 드러난 상처를 헤집었다. 공허를 두른 그림자는 그 두꺼운 뼈조차 잘라내고 먹어치울 힘이 있다.
한계까지 뽑아낸 셀 수 없는 촉수가 그 살점을 찢어발기고 또 뜯어발겼다. 각룡이 괴롭다는 듯 몸을 비틀고 흔들었지만, 고작 그런 걸로 떨쳐낼 수 있을 리 없다. 되려 이빨과 발톱을 적극 활용해 물어뜯고 집어삼켰다. 그 순간만큼은 늑대 또한 짐승의 본능을 한껏 드러냈다.
깊게, 더 깊게. 한 점의 살점도 남기지 않고―! 그 뜻이 커져가자 늑대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공허의 아지랑이 또한 부풀어갔다. 공허란 먹어 치우겠다는 의지에 따라 끝없이 커지는 힘. 늑대는 그 편린을 이제야 이해했을 뿐. 온전한 사용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때, 각룡의 거체가 무너지듯 기울어졌다. 마침내 각룡이 쓰러지자 사라진 바닥 대신 용암과 열기가 충격에 반동하듯 피어올랐다. 물어뜯긴 상처 속으로 용암이 스며드는 가운데, 늑대는 공허를 불러일으켜 밀려드는 용암을 막아냈다. 다음을 준비했지만 더 이상 화산각룡이 움직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죽었나?'
아니, 아니다. 아직 숨은 쉬고 있다. 그에 늑대는 허탈히 웃었다. 그래. 아직 죽지는 않았다… 대신 정신을 잃었을 뿐.
'…….'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승리… 흑무가 갉아먹고 탈식으로 빼앗은 마력 탓에 홍유리가 쓰러진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 고갈이 찾아온 것이다.
여태까지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탈식을 얻은 이후, 늑대와 싸웠던 누구라도 마력이 고갈되기 전에 죽어버렸으니까. 공허와 흑무에 당하면서 그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는 구획 보스인 바포메트조차.
"……."
쓰러진 화산각룡―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다.
***
초조한 듯, 백소율은 부적처럼 늘 들고 다니던 늑대의 털을 강하게 쥐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페리가 백소율의 꽉 쥔 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뀨…"
그래도 맘 놓고 다가오지는 않는다. 어쩐지 알파를 끌어안았던 때 이후로 경계하는 듯한… 강아지가 주인에게 느끼는 그런 질투일까? 그 행동이 새삼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혹시라도 바람에 흩날릴까 조심스레 손을 펼친 백소율이 요정용에게 손짓했다.
잠깐 망설이는 듯하던 페리는 이내 다가와 호기심을 보였고 그에 백록이 내려다보았다.
"…늑대의 털인가?"
"아, 네… 맞아요."
검은 털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정확히는 두 종류의 털이 섞여있었다. 백록이 가진 스킬― 안목은 그게 늑대가 진화하기 전, 음영랑이던 시절의 것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부적이라…'
환수인 백록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왜 그런 걸 가지고 있는지는 알 것 같다. 오히려 늑대의 털이라면 조금 탐이 나기도 한다.
안 그래도 많은 환수들이 늑대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판국. 다만 늑대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뿐. 어쩌면 이게 다른 환수들과 거리를 좁힐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던 백록과 백소율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께 한숨을 쉬었다. 정작 늑대는 안에서 싸우고 있을 텐데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역시 말려야 했던 게 아닌가… 서로가 나름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 앞에서 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뀨~?"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냐는 듯이. 그 순간, 다소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그것은 화산의 의지 그 자체. 마치 산을 보는 듯한 위압감―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 올리고서야 볼 수 있는 각룡의 덩치.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글거리는 열기를 간직한 채로 환계의 대지― 남산을 불태웠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각룡의 모습에 당황한 영물과 환수들이 깜짝 놀라 멀어져 갔다.
"설마…"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백소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던전이 붕괴하는 조건은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일 터… 그렇다면 화산각룡은 죽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러면 알파는 어디에…? 또 선생님은? 불안한 듯 백소율이 둘러보자 백록이 말했다.
"저 위에 있다네."
그 시선은 한참이나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 위에 발판을 밟고 오롯이 내려다보는 검은 마랑의 모습― 또한 언뜻 보이는 붉은 머리칼에 백소율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요…"
안심한 둘과는 달리 페리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마랑은 기어이 각룡을 쓰러뜨렸고 마침내 화산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