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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41화 (141/407)

〈 141화 〉 #58 정리 (3)

여명의 옥상. 쓴맛을 참지 못한 페리가 커피를 퉤퉤 뱉자 늑대는 웃으며 입가를 닦아주었다.

"뀨우!"

이 맛없는 걸 도대체 왜 마시냐는 듯한 눈초리로 노려본다. 하기야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달라고 한 건 어디까지나 페리였다. 내가 계속 마시는 걸 보고 호기심이 동한 모양인데… 눈물이 맺힌 녀석에게 코코아를 뽑아주었더니 킁킁 냄새를 맡고는 미심쩍은 눈이 되었다.

"마셔 봐."

그래도 달콤한 냄새를 맡기는 한 모양인지 혀를 가져다 댄 페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뀨~! 뀨! 뀨뀨!"

커피 맛은 벌써 잊었다는 듯 달달한 맛에 행복해하는 페리. 잠깐 줘도 되는가 싶기는 했지만, 녀석이 평소에 먹는 걸 떠올려보면 새 발의 피였다.

"맛있어?"

대답은 없지만 종이컵에 머리를 파묻은 녀석의 날개가 파닥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금세 컵을 비우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미리 뽑아 두었던 코코아를 다시 주었더니 퉤퉤 뱉는다.

"아직 뜨거워."

조심하라고 알려주자 페리는 마치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마시기 시작했다.

"뀨~!"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녀석이 없는 나날을 더는 상상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었을 때.

[멸망 확률 84.15% → 84.13%]

[0.02%만큼의 업을 획득했습니다]

갑자기 줄어든 멸망 확률에 잠깐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알아챘다. 백록에게 맡긴 화산각룡의 고기. 용벌레들이 우화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었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요정용들이 부정한 것을 먹는다면…'

분명 때가 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풋."

별안간 상념을 깨는 웃음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리니 거기엔 이은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래."

거의 열흘 만이었으니까.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나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잠깐 쓰다듬던 이은하는 쌓여있는 종이컵을 보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커피가 좋은 거야?"

끄덕이려다 고개를 저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리 맛있지는 않다. 싼 맛에 많이 마시는… 아니, 어차피 내 돈도 아니라서 상관없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입이 심심해서가 아닐까?

"가끔은 카페에서… 아."

뭔가 말하려던 이은하는 입을 가렸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몸이거니와 갔다고 해도 강아지가 주문하거나 먹을 수는 없으니까.

변화까지 사용하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일도 아니고.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자 반대로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사다 줄까? 어떤 거 좋아해?"

먹어봤을 리가 없지 않나…? 말실수를 깨닫고 어버버 거리는 그녀. 원래 이렇게 얼빠졌던가? 아니, 그랬던 것 같다. 대충 아무거나 사달라고 하니 금세 화색을 띤다.

"응!"

강아지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분명 나인데… 아무튼 뜻밖의 커피 셔틀을 구했다. 그 사이에 코코아 컵에 머리를 묻고 있던 페리가 이은하를 보고 그녀의 목에 꼬리를 둘렀다. 마치 불량배 같은…

"어?"

경고하는 것처럼 낮게 운 페리가 아직 남은 코코아를 완전히 비웠다. 잘들 노는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전에 환계에서 떠올린 생각을 다시 했다.

"…묻지 않나? 어딜 갔다 온 건지."

"응?"

"환계라는 곳이다. 페리와 같은 요정용과 다른 환수들이 즐비한 곳이지."

"요정용…"

멍하니 페리와 눈을 마주친 그녀의 시선에 호기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마력 농도가 높아서 도움이 될 거다."

물론 예외 중의 예외인 백소율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은하 정도면 꽤나 괜찮을 것 같다. 재능 있는 헌터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바랄 게 없다.

더 정확히는 한 가지 실험을 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내가 아니면 던전은 아무리 클리어해봤자 멸망 확률은 떨어지지 않아.'

그 이유는 주인공이었던 단세혁이 없는 세계에서 그가 했던 만큼 기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한없이 흡사한 평행 세계에서 다른 인물들이 활약하는 건 가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은하와 백소율이라면 어떨까?'

평행 세계에서는 아마 죽었을 거라 생각되는 이은하와 마녀가 되었을 운명의 백소율이라면?

둘을 구한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어쩌면 두 사람만큼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가 조금은 있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번의 던전은 개입이 심했으니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은하를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환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홍유리가 한숨을 쉴 때, 기다렸다는 듯 백소율이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

"저… 마법을 더 배우고 싶어요."

"가르쳐주고 있잖아."

"정말로요."

진지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오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뭘 바라는 거야?"

"……스퀘어로 가고 싶어요."

"어차피 넌 졸업하면 갈 수 있잖아?"

아카데미 학생이 스퀘어로 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아니 두각을 보이는 학생이라면 대부분은 스퀘어로 향한다. 지금의 백소율이라면 오히려 스퀘어에서 초청할지도 모른다.

2월이 되면 졸업할 테니 결국엔 시간문제.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 문제였다. 백소율은 고개를 저었다.

"한시라도 더 빨리요."

어쩐지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그 말에 홍유리는 이마를 찌푸렸다.

"왜?"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다. 열심히 하기는 했어도 그녀에겐 결여돼 있는 게 있었다. 당시 이은하는 착각으로 비롯된 오해, 알파에 대한 증오로 자신을 갈고닦았지만, 백소율에겐 그게 없었다.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목표 의식이 없었으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두 눈에 들어찬 것은 분명한 열망이었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르다.

없었던 게 생겨난 게 아니라 잃었던 걸 되찾았을 뿐.

꿈에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발버둥 치던 양치기 소녀는 늑대에게 멋대로 구함 받았다.

'마녀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몇 번이고 막을 테니까.'

예상치 못한 구원― 물론 기쁜 일이었다. 평생을 짓누르던 짐이 사라졌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있어 열망을 앗아간 이유이기도 했다.

구원받은 덕에 발버둥 칠 필요가 사라졌으니까. 따라서 성장은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것만큼은 누군가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늑대에 의해 한 번 사라지고 말았던 열망은.

"부탁드려요."

마찬가지로 늑대에 의해 생겨나 불씨가 붙기 시작했다.

"……."

깊숙이 고개 숙이는 모습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환계에 다녀오고 나서 이러는 이유가 뭐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알파 때문이리라.

조금, 머리가 복잡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반대로 묻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랬다간 괜히 뭔가가 바뀔 것 같아서…

"……알았어."

화색을 띤 백소율의 표정. 고개를 든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눈에 들어찬 것은 여전한 열망이었다.

"어차피 알고 있잖아? 3절은 못 배우는 거라고."

스퀘어 소속이 아닌 이들에게 허락된 건 2절까지. 그나마 스퀘어 소속이 아니더라도 스퀘어가 인정한 몇몇만 3절까지는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백소율은 그런 인정 따위는 받은 적 없다. 어디까지나 미리 가르쳐놓고 나중에 알릴 생각이었지.

"그러니까 어차피 가야 하기는 한데…"

그 말을 한 홍유리는 묘한 눈초리로 백소율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출발은 이틀 뒤. 필요한 거 있으면 준비… 아니 말해놓고."

"……! 네!"

묘한 우연이었다. 알 리가 없을 텐데… 우연의 일치인지 알파 또한 스퀘어로 향하게 됐다는 사실을. 홍유리 자신조차 이제야 전화로 알았을 뿐이니까.

그렇게 홍유리는 멀어져가는 백소율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고 서 있었다.

***

환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이은하는 고개를 주억였다.

"응. 그런데…"

단풍색 눈동자에 노을이 비쳐 반사되었다. 기대하는 듯한, 또는 그렇지 않은 듯한 눈. 그 망막에 비치는 내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걸 말해주는 이유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계에 가볼 생각은 있나?"

"……."

깍지 낀 손가락이 고민하는 것처럼 꼼지락거린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주억인다.

"가고 싶어. 가보고 싶어. 하지만…"

말꼬리를 흐린 이은하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갈 수 없으니까."

클랜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이은하를 쳐다보던 늑대는 고개를 돌려 페리를 쳐다보았다.

노을 때문에 붉게 빛나는 빛가루가 뿌려진 순간, 늑대는 촉수를 뻗어 그 손을 잡았다.

이어진 순간, 이은하는 주변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게…"

정신 차리고 보니 붉게 빛나는 노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푸르스름한 꿈결 같은 세계― 놀라 숨을 들이켠 이은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대기 중에 널리 퍼진 마력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현계와는 다를 거다."

양도 질도 차원이 다르다. 알파가 말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은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멍한, 어안이 벙벙한 듯 얼굴로 볼을 꼬집는 이은하를 본 늑대가 옅게 웃었다.

'하여간에.'

얼빠진 건 낫질 않는구나 싶어서.

"뀨~!"

어떠냐고 묻는 듯한 요정용의 울음에 이은하는 꼴깍 침을 삼켰다.

"이게…"

이게, 환계구나… 꿈인지 아니면 헛것이라도 본 건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그럴 리 없다. 눈앞에 알파는 여전히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으니까. 커피를 홀짝이는 늑대의 눈은 올곧았다.

다른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이.

다시, 마른 침을 삼킨 이은하의 입술을 비집고 말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럼… 부탁해도 될까?"

노을 아래서, 늑대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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