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43화 (143/407)

〈 143화 〉 #58 정리 (5)

밤이 되었을 때, 기다리는 것처럼 문밖에서 서성이는 기척에 눈을 떴다. 늑대가 일어나자 옆에서 자고 있던 페리가 깼지만, 아직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가볍게 쓰다듬어주자 다시 눈을 감고 색색 잠자리에 들었다.

'…….'

그렇게 문밖으로 나섰을 땐, 백소율이 조금 놀란 얼굴이 되더니 이내 사과해왔다.

"……죄송해요. 깨워버렸나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수면 같은 건 필요 없는 몸인 게 사실이었으니까. 굳이 이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옥상으로 올라왔을 땐, 늦겨울의 추위가 우릴 반겼다. 나도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는 데 그녀에겐 오죽할까 싶었다.

"……."

강태준에게 받았던 남은 돈으로 코코아를 뽑았다. 졸졸 컵에 따라지는 소리가 나고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벤치에 앉았고 나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마치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던 중, 갑작스레 내밀어진 컵. 당연하다는 듯 코코아를 내밀고 있는 모습에 픽 웃어버렸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입가를 매만졌다. 손은 곧 내려가 품속으로 들어가,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부터 쭉 지니고 있던 그의 털에 닿았다.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네 재앙은 끝났다.'

……그래. 그래서였다.

사실, 그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더 없는 구원이었다.

이유 없이 구원 받고, 오직 그만이 나를 믿어 주었다.

그날의 기억은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하리라.

컵을 받아들고 손에 닿는 따뜻함을 음미했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배려일 뿐인데… 그에게 받는 배려만큼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왜일까?'

조심스레 코코아를 들이켰다.

그 맛은 마셔본 적 없는 음료를 마시는 것 같아서…… 정말, 무척이나 달게 느껴졌다.

"……."

조용히 숨을 골랐다.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리고 있던 손가락을 멈췄다.

바라보는, 조용히 기다리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

조금, 종이컵이 구겨졌다.

나는 구함 받았지만, 그는 어땠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오직 혼자서.

어렴풋하게 들었던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나 씁쓸했다.

분명 쉽지 않았을 거다.

가끔은 포기하고 싶었으리라. 차라리 좌절해 쓰러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홀로 걷는 길. 그 고독은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올바르고 올곧게 나아갔을 뿐.

그래. 그래도 그는 나아갔던 거다.

그러면, 그렇다면 나도…

"저…"

나는 용기를 쥐어 짜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말. 그냥, 쭉 함께 있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떼쓰고 매달리고 싶다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걸 억지로 떼어내고 나는 결론부터 말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망칠 것 같아서.

"……스퀘어로 가게 되었어요."

그는 아무 말 않고 잠자코 들어주었다. 차분한 그 시선이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이 있고 싶어요. 함께 하고 싶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떼쓰고 말았으니까.

결론부터 말한 건 정답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걸림돌이 되기는 싫어요."

깊은 새벽. 어두컴컴한 밤중에 내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옥상을 물들여갔다.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그러면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붉게 빛나는 눈… 그런데도 단 한 번도 두렵다 느낀 적 없다.

오히려, 계속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그가 보는 곳에 항상 내가 있고, 내가 보는 곳에 늘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자리고, 내가 있는 옆에 그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기다려 줄 수 있나요?"

단지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인데 추위가 사라지고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마저 기분 좋은 떨림으로 느껴져 그제야 나는 알고 말았다.

"아."

나는 정말로 그를 좋아하고 있구나.

콩닥콩닥 뛰던 심장이 어느새 세차게 방망이질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감정만큼은 착각이 아니라고. 이성과 감성이 서로 같은 답을 내리고 있었다.

정말,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봄바람이 불어왔다.

쌀쌀한 바람이, 어두컴컴한 밤이 물러가고 햇살이 비춰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만 같다. 떠듬떠듬, 붙었던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좋아해요.

끝도 없이 빨라지는 고동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말을 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었다.

전했을까? 아니면 전하지 못했을까?

말하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상반된 감정이 서로 실랑이했다.

잔잔한 옥상에서 나 혼자 떠들썩한 것만 같다.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져 들리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순간처럼 혹은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

두근두근― 그 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이 솟구치고 부풀어 올라서 요동치고 있었다.

끌어안아 좋아한다고 소리치고 싶다. 이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영혼 깊숙이 아로새겨졌다.

그런 아련한 열망을 토해내듯 힘차게 뻗은 손은.

"얘기는 들었다. 나도 스퀘어로 가게 되었으니까."

"내일부터 잘 부탁하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거두어졌다.

멀뚱멀뚱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모습에 할 말을 잊어버린 나는.

"……네?"

멍하니 되묻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

고장 난 기계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되묻던 백소율이 방으로 돌아가자 늑대는 벤치에 앉아 길게 하품했다. 그렇게 시간을 축내며 기다렸다. 당장 스퀘어로 출발하게 될 날… 이제 막 해가 밝아온 이른 아침에 이은하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휴…"

마찬가지로 출근하기에도 한참이나 이른 시간이었지만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왔군."

"응. 그런데…"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늑대는 곧 발판 위에 아직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요정용을 데리고 왔다. 막상 다가오니 망설여지는 걸까?

"저, 그…"

늑대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홍유리와 검성에겐 미리 알려 두었으니. 그리고…"

마지막 말은 삼켰다. 여기 있어봤자 성장은 더딜 것이라는 점. 던전에 동행했을 때와 더불어 어제 일로 확신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수련 같은 게 아니라고.

그저 실전. 마법사가 아니기에 가르치고 있는 홍유리 또한 그녀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아는 게 아니다.

이은하의 방식은 굳이 따지자면 환수가 마력을 다루는 것과 흡사하니까. 십중팔구 영창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거다. 단지 이미지를 구체화하기 위함일 뿐일 터. 그녀의 길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녀 스스로 개척해야 할 길일 뿐.

"……."

그런 만큼 백록과 함께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터. 내게 있어선 의미 없는 수준 낮은 던전이라도 이은하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을 실전이 될 테니까.

다만 그걸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은 남아 있지만…

"뀨~."

다소 힘없는 울음과 함께 우린 다음 순간 환계에 있었다.

늑대는 촉수로 이은하의 허리를 당겼다.

"어? 어?"

어버버 거리는 이은하는 자신이 무언가의 등 위에, 정확히는 본신을 드러낸 늑대의 위에 올라탔음을 깨달았다. 거칠고 검은 털을 꽉 쥐었을 때, 페리 또한 길게 늘어뜨린 꼬리로 늑대의 목을 빙 둘렀다.

"꽉 쥐고 있어라."

"…응!"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애초에 촉수에 단단히 묶여 손을 놓아도 떨어지지 않겠지만…

그렇게 늑대가 달리기 시작하자 이은하는 불어올 바람에 질끈 눈을 감았지만, 어쩐지 평안하다. 무시무시한 강풍이 불어올 거라 여겼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둘. 늑대의 돌풍이 맞바람을 불러일으켜 상쇄시키고 있었으니까.

"와…"

고개 든 이은하는 그제야 환계의 풍경을 보곤 놀라 했다. 정말 다른 세계라는 게 있기는 있구나 싶어서. 요정용들과는 반대로 달리는 늑대… 이은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뀨~?"

고향을 자랑하듯 어떠냐는 물음에 이은하는 멍하니 고개를 주억였다.

누군들 넋이 나가지 않을까? 몽환 속을 거니는 듯한 이 세계를 보면…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늑대가 멈춰 섰고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놀라고 말았다.

"대, 대전?"

분명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대구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크게 눈을 뜬 이은하가 놀라 했지만, 아직 놀람은 끝이 아니었다.

"……?"

고요함을 깨뜨리는 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가오는 환수― 백록을 본 이은하는 입을 가렸다. 일견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하얗디 하얀 흰 사슴이 다가와서.

"늑대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활기찬 듯한 목소리― 설마하니 흰 사슴이 말한 걸까 싶었지만, 그 옆에서 날개 달린 조그마한 무언가가 재빨리 날아와 자신을 지나쳤다.

"요, 요정?"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단숨에 알파에게 달려들어 뺨을 비빈다. 그 모습이 되게 자연스러워 보여 잠깐 부럽다고 생각한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이, 흰 사슴이 다가와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낀 이은하는 침을 삼켰다. …동물이 아름답다고 느껴진 건 처음이어서. 잠깐 시선이 향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참 자주 데려오는군."

고요한 목소리… 그건 분명 언어였다. 늑대에게 환계에 대해 들었던 이은하는 그가 백록이라 불리는 사슴임을 깨달았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니라네. 다만… 아닐세. 자네가 그런 걸 모를 리 없으니."

환계는 어디까지나 환수들의 세계. 허락은 받았다지만 마냥 달갑지는 않은 걸까? 늑대 또한 무분별하게 사람을 들일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가 될 사람은 아니니까 부탁하지."

"자네는 바로 떠날 셈인가?"

그 물음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계로 돌아올 수는 있겠지만, 스퀘어에 체류하는 동안 여기까지 올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알겠네.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돌려보내도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새삼 폐를 끼칠 거로 생각지는 않는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충분한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게 세 번째 겨울의 아이를 달래고 떼어놓자 이제야 좀 잠이 깬 모양인지 녀석이 날갯짓했다.

요정과 페리를 올려다보던 이은하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물어왔다.

"이제 가는 거야?"

요정어로 했던 말이었으니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그녀가 묻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이 끝나면 돌아오겠다. 하지만 정 힘들다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준비해두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면 현계로 돌아갈 터. 하지만 되도록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일이 끝날 때 쯤이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더 있을 시간이 없다 여긴 늑대는 페리를 부르고 곧바로 몸을 돌렸지만, 이은하의 목소리에 잠깐 멈춰 섰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고개를 돌리니, 이은하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곧 멋쩍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 올 때는…"

흐려진 말꼬리. 그래도 늑대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뒷모습― 이은하는 늑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