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60 Empyrean Square (3)
영감탱이라는 말에 당연히 선생님의 스승인 레드 스퀘어 마스터를 뵐 거로 생각했는데 도착한 곳은 의외로 평범한, 그 신분을 생각하면 허름하게까지 보이는 집이었다.
'…검소하신 분일까?'
"미리 말해두겠는데. 가능하면 말 아껴. 그리고 싸가지는 무시하고."
"아… 네."
노크 같은 것도 없이 선생님이 멋대로 문을 열었을 때, 내가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안은 허름하지도 않았거니와 평범하지도 않다. 오히려 외부에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화려하다.
'어떻게 이런…'
마치 궁전의 홀을 보는 듯하다. 성을 들어온 것처럼 휘황찬란한 장식으로 치장된 대리석 벽과 백금으로 만들어진 듯한 샹들리에가 반짝인다. 그리고 도무지 어디서 들리는 건지 모를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오자 조금 놀라 귀를 만졌다.
"그래. 그 아이더냐?"
똑똑히 들리는데도 소리의 근원지를 찾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걸까?
"뭐 해? 빨리 안 오고?"
"네!"
먼저 앞서간 선생님을 뒤따라 2층으로 오르자 또 한 번 공간이 변했고 드러난 곳은 연구실과 같은 장소였다.
"처음부터 데려오지 그랬느냐? 곱고 참한 아이가 아니더냐."
분명 인자한 할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뿐인데 어쩐지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입이?'
흘러나오는 말과 입의 싱크가 맞지 않다. 영어를 못 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 영어로 말하고 계시는데도 의사소통에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마법도 있는 걸까?
"그래, 이 아이가 그랬을 리는 없을 터인데… 대체 누굴 데려온 게냐?"
"자꾸 데려오긴 누굴 데려와? 노망났어요? 쳐다보길래 열 받아서 그랬다니까."
"……쯔쯔. 그런 걸로 치자꾸나."
그렇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시곤 내게 시선을 향하셨다.
"그래. 이 아이가 네 제자란 말이지?"
"제자는 무슨. 난 그런 거 안 키우거든요? …그냥 좀 가르친 거지."
그러면서도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게 선생님다웠다. 다들 꺼리는 눈치지만, 사실은 되게…
'귀여운 구석도 있으신데.'
건방질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나이을 잊고 동생이라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인석아. 그게 제자다. 아무튼 이 아이 때문에 왔는고?"
살피는 듯한 눈에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친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재목이로고. 감도 좋구나."
"하, 그럼 쭉정이를 기르겠어요?"
그 말은 조금 부끄럽지만, 자부심을 느꼈다. 고개를 주억거린 그분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마법을 배우고 싶으냐?"
그 물음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듯 느껴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있는 건 분명 나였지만 어딘가 다른 것을 꿰뚫어 보는 듯 느껴졌다. 침을 삼키고 대답을 기다렸을 때, 곧 그분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허…… 읽을 수가 없구나."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그분의 표정이 인자하게 변했다.
"그래. 밖에서 잠깐 기다리거라. 어떤 스퀘어에 들어갈지는 다음에 생각해보자꾸나."
"아, 감사합니다…!"
자신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은 그분이 잠깐 나가 있어 보라는 말에 알겠다고 답했을 때, 선생님은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
"……대체 무얼 데려온 거냐."
아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인자함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노인이 아니라 마법사의 눈으로 레드 스퀘어의 마스터, 아스터 아리스타 파블로는 자신의 제자를 추궁했다.
스퀘어 마스터라는 이름답게 누구라도 굳을 수밖에 없는 위압감이었지만, 홍유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뭐가요? 스물도 안 된 애가 마력 좀 많을 뿐인데."
"―저건 그냥 많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지 않느냐."
우스운 일이다. 가장 높은 하늘 광장, 스퀘어는 모든 마법사의 마력을 흡수해 동력으로 삼아 떠 있을 수 있다.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력의 적지 않은 양이 그녀에게 흘러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섬은 가라앉아야 했었다. 연료가 부족한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없듯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보급을 위해 내려앉은 부유섬은 과한 마력에 의해 한 번 크게 떠올랐다. 처음에는 제자인 홍유리가 찾아왔을 때, 그 성질머리를 못 죽였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저 아이도, 너도 아니다. 그리고 방금 확신했다."
아스터의 눈동자 속에 강한 빛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스킬, 상위 감정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던 불길함의 근원. 아까 나간 소녀는 분명 그 잔재를 품고 있었다…….
"유리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그에 홍유리는 짧게 혀를 찼다. 마법사는 어리석지 않고, 스승은 그 정점에 서 있는 이. '다섯 스퀘어'의 정점 중 하나. 부족한 단서로 직관적인 답을 도출해내는 것쯤이야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런데도 역시 알파를 발견하진 못한 모양이지만, 그 낌새는 눈치챈 모양. 시작부터 일이 꼬이고 말았다…….
홍유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질병과 역병을 막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내부의 적만큼은 있어서는 안 된다. 헌터로서 지내는 동안,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만약에 알파가 없었다면 그것들이 버젓이 각 클랜에 침투해 있었을 테고, 네버랜드 공략과 같이 중대한 시기에 내부에서 칼이 겨눠진다면?
서로가 의심으로 물들고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
그랬다간, 끝장이다.
내부의 적이란 게 얼마나 손쉽게 결속을 끊을 수 있는지, 뒤통수를 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물며 그게 스퀘어의 정점에 선 자라면…
"……너는."
아스터의 오목한 눈이 깊은 지혜를 담고 홍유리를 꿰뚫어 보았다.
허나, 그 선홍색 눈동자에 예전과 같은 망설임은 없다.
불안함은 있되, 의심은 없는… 아스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성장했구나. 어쩌면 도로시를 후계자로 삼은 건 섣부른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어."
"하, 그딴 자리 어차피 필요 없거든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해 두마. 하지만…"
아스터의 눈빛이 홍유리의 그것보다 짙은 붉은 빛을 발했다. 그에 홍유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
"너야?"
홀에서 기다리던 백소율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듯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선생님의 외견과 비슷한 연령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소녀가 있었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인종. 그리고 머리색이 금발이라는 점 정도가 아닐까? 턱에 손을 가져다 댄 소녀가 품평하듯 보는 시선이 기분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누구세요?"
그 물음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소녀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자기 할 말을 이었다.
"흐응… 뭐 나쁘진 않네. 아슬아슬하게 합격점?"
"……."
"네가 언제까지 스퀘어에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뭐~ 그동안 잘 해봐. 어쩌면 빌붙어 있을 수 있지는 않겠어?"
백소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로는 '싸가지는 무시하고'라는 말이 떠올라서.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 말을 했던 장본인인 홍유리가 나섰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은 아주 지랄 주접을 떨고 앉았네."
"…너 여전히 입이 천박하네?"
"까는 소리 말고 꺼져. 또 처맞고 싶어?"
"홍유리! 모르고있나 본데 지금 후계자는 나야! 네가 아직도 나랑 같은 후보인 줄 알아?!"
소리친 금발의 소녀로부터 붉은 마력이 퍼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해 백소율은 갑갑함을 털어내고자 목을 매만졌다.
"지랄하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코웃음 친 홍유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력이 흩어졌다.
"……!"
놀란 듯 금발 소녀의 눈이 커졌다. 홍유리는 명백한 조소를 띄고 차갑게 뇌까렸다.
"그 알량한 자리 간수하고 싶으면 당장 꺼져."
"너… 진짜 해보잔 거야?!"
"그건 내 제자를 건드리기 전에 말했어야지."
서로 물러서지 않는다. 붉은 마력이 다시금 일어나기 시작해 맞부딪쳤다. 홀의 벽이 깨져나가고 샹들리에가 출렁이기 시작한다. 등에 벽이 닿았을 때, 백소율은 자신이 뒷걸음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만하거라."
―홀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씻은 듯 마력이 사라졌다. 일그러진 표정의 금발의 소녀와 팔짱 낀 채로 오연하게 턱을 들어 올린 홍유리의 시선이 찌릿 교차했지만 더 이상의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문 도로시가 마지막으로 노려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홍유리는 고개를 까닥였다.
"뭐 해. 안 갈 거야?"
"아, 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백소율을 보곤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왜 들떴어?"
***
"선생님… 아까 그분은?"
"도로시 A… 뭐더라? 까먹었네. 그냥 싸가지."
그년한테는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며 코웃음 치는 홍유리. 그 모습에 백소율은 묘한 감상을 품었다.
"그분…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이신 거죠?"
"그런가보네."
전혀 관심 없다는 투였지만, 백소율만큼은 그 말에 숨길 수 없는 작은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까의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싸웠던… 새삼 눈앞의 소녀가 진홍이라 불리는 여명 제일의 마법사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럼 선생님은 대체 왜?'
밀려서? 아니, 아니었다.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보기에 선생님이 밀린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는 그녀에게 홍유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말해두겠는데 내가 필요 없다고 버린 거거든? 애초에 후계자 중에선 아가일 그 또라이만 빼면…"
"그럼요. 선생님."
"……."
무어라 말하려던 홍유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애써 태연한 척하기는 했지만, 아까 싸움은 살짝 밀렸던 게 사실이니까.
보이지 않게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낸 홍유리는 주먹을 그러모았다.
헌터로서 활동한 지난 몇 년간은 그녀의 성장을 지체시켰다.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일과 업무에 시달리는 동안 마법 외길을 걸은 도로시가 자신보다 앞서나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만― 순순히 그 사실을 납득할 만큼 홍유리의 성격은 좋지 못하다. 하물며 그녀를 지탱하는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생겼음에야.
'좆같네.'
어째서 차이가 났는가―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대마력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서로가 보낸 시간의 질이 다르다. 오래도록 바라왔던 스킬을 도로시는 기어코 손에 넣었고 그것이 둘의 차이를 갈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울분을 억누른 홍유리는 조용히 결심했다.
언제 얻을 수 있을지 모를 대마력을 가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그녀의 강한 프라이드는 뒤처져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지 못했으니까.
여기에 온 목적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저 년만큼은 꼭 눌러놓고 가겠다고 홍유리는 강하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