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61 나비의 성 (2)
'나비의 성…'
공허한,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자색의 고성이나 안은 그렇지 않을 거다.
환영의 계파는 아멜리아 모레스트로부터 시작됐다. 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 이상가는 자색 마법사는 나타난 적 없고 그녀 이상 가는 자색 재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환영과 환상의 주인. 감히 그녀를 최강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누구도 그녀와 싸우려 들진 않는다.
왜냐하면, 까다롭기 때문에.
그녀 이상으로 환상과 환영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어느 순간부터 거짓으로 바뀔지 모르니까.
그리고 여기는 바로 그 나비의 성. 환영의 계파의 정점에 위치한 마법사의 본거지. 이 성의 내부가 어떻게 되어있을진 아무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한들 들어가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은 잠겨있지 않았으니까. 마치 해볼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것처럼. 그렇게 입성한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시야가 흩어지듯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말이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곧바로 탐지를 펼쳤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하지만 탐지와는 달리 예민한 청각은 불쾌한 소음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십 또는 수백이. 정신을 건드려 닳게 만드는 듯한 마모감… 새삼 페리를 데려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나긴 복도는 겉에서 보았던 커다란 성보다 길고 또 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계단이 보이지 않아 방문을 열었을 때 눈에 보인 건 또 다른 복도였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복도가 이어져있다.
복도의 복도의 복도의 복도의…
끝없이 이어진 복도에서 늑대로부터 서서히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일그러지고 갉아 먹혀가는 마력― 흑무는 어렵지 않게 환상을 몰아냈다.
눈을 가리는 환각이 사라졌을 때, 입성하고 처음으로 밟았던 땅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 사실은 여태 한 걸음도 걷지 않았던 거다.
그에 늑대는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흑무를 두른 늑대는 걷고 또 걸었고 마침내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평범하지 않다. 일그러지고 비틀리며 사라졌다가 안개처럼 흩어지는 계단…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귀찮다.
그러나 검은 안개가 있는 이상, 그 어떤 환상조차 닿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늑대는 자신을 현혹하는 환상 너머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걷고 또 걸은 늑대는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물론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가일 모레스트.'
방문에 적힌 팻말은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건지 먼지가 가득하다.
투시로 방 너머를 꿰뚫어 본 늑대의 눈에 보인 것은 박제된 앵무새와 단출한, 아니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방이었다. 이런 방에 무언가가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은 계단은 하나뿐. 즉, 거기가 최상층이라는 뜻이다.
환영을 갉아먹으며 계단을 올랐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좁은 방이었다.
[Amellia Molest]
필기체로 적힌 이름. 분명 여기가 나비의 방이리라.
투시로 방안을 살피려던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환영의 나비의 방이기 때문일까? 이 방만큼은 도저히 꿰뚫어 볼 수 없다. 그건 탐지로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흑무를 드리우려던 늑대는 잠깐 고민해야만 했다. 아무리 은신 중이라도 마법 그 자체를 먹어 치우면 들킬 수밖에 없다.
십중팔구 환영의 나비는 성의 바깥에 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진작 눈치채고 모습을 드러냈을 테니까.
하지만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발길을 막아 세우고 있다. 그래. 십중팔구. 열에 하나는, 혹은 백에 하나라도 환영의 나비가 있을 확률은 배제할 수 없다.
선택은 두 가지. 열고 들어가거나 아니면 여기서 물러나거나.
그에 고개를 흔들었다. 물러날 거라면 처음부터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나비의 성. 그 최상층이라면 분명 무언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아넬라조차 이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어느 층 이후부터 그녀의 냄새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으니까.
분명 그녀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걸린 방 또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이미 오래전부터 고성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환영의 나비, 오직 한 명만을 제외하곤.
늑대는 쓸쓸한 나비의 방을 기어코 열어젖혔다.
***
"후퇴! 후퇴!"
밀려드는 무리에 더는 막을 방법이 없다 여긴 건지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그 순간, 병사는 저 하늘 높이 뜬 부유섬을 올려다봤다. 비록 헌터는 아니지만, 이젠 전장에서 제법 뼈가 굵어 마법사들이 준비하고 있단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 써버린 탄창을 갈아 끼우고 조준도 하지 않고 대충 난사했다. 왜냐하면 아무 데나 쏘더라도 맞기 때문에. 어차피 놈들에겐 급소도 없다. 개개의 차이가 심하지만 질긴 놈은 몇십 조각으로 잘게 썰려도 죽지 않는다.
탄피가 튀고 달구어진 총열이 겨울의 추위를 몰아낼 만큼 뜨겁다. 다시 탄창을 교환하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그의 방탄모를 강하게 때렸다.
"뭐 해? 이 등신아. 쏘지 말고 뛰어!"
고참의 말에 병사는 끄덕였다. 이미 뒷열의 병사들은 저 멀리까지 후퇴해 있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일사불란함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소양. 그렇지 못한 이들은 진작에 죽었다.
"어디까지 간답니까?"
"테헤란도 버린다. 일단 바라민까지."
"시발… 진짜 끝도 없이 밀리네."
"어차피 쥐새끼도 떴다."
테헤란에서 바라민까지라면 거의 30km는 떨어진 거리였다. 하지만 저것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과 마법사들의 폭격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히 두어야 할 거리다.
"차는 어딨답니까!"
"있겠지! 뒤지기 싫음 닥치고 뛰어!"
달리면서 거리가 멀어지자 병사는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달리는 만큼 무리 또한 쫓아온다. 그나마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놈들이 밟은 땅은 병들고 만다.
발아래 풀이 썩어들자 병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땀이 가득 차 김이 서려 시야가 흐리다. 그래도 병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경계선을 넘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배후에서 크레모아가 터졌고 파편은 무리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아무리 오염됐다고 해도 다리가 없고 팔이 잘려나갔다면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놈들은 재생하는 게 아니라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뿐이니까.
하지만 서로 엉켜서 시간이 지체된다.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시동이 걸린 차의 적재함에 올라타자 곧바로 출발한다.
오염이 뒤덮어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공중에서 폭격이 가해지나 그걸로도 막기 어려운 듯 보인다. 멍하니 보고 있던 병사는 갑작스레 전투기가 흔들리는 모습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고도가 낮아지더니 기어코 추락하고 만다. 전투기에 싣고 있던 폭탄이 한 번에 폭발해 커다란 폭음을 만들었다.
"쯧."
고참이 혀를 찼고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오염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기계에도 스며들어 녹슬어버린다. 차라리 총기라면 그냥 불발 정도로 끝났겠지만…
"진짜 뜨긴 뜬 모양이다."
고작 여파만으로 수십 수백 미터 상공의 전투기가 추락할 리 없다. 역병. 놈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게 명확해지자 고참은 운전석을 향해 마구 두드렸다.
"속도 올…!"
올리라 말하려던 그는 급회전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먼저 일어난 병사가 손을 뻗어 고참을 일으키려 했으나 기절해있단 사실을 깨닫고 그를 질질 끌어 전복된 트럭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왔다. …그리고 빠져나온 병사는 실소했다.
급회전 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들 앞으로 오염된 무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그들과 같은 군복을 입은 채로.
…전선은 이미 진작에 뚫려있었다. 역병이 나타난 이상,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화약과 연기로 하늘은 회색으로 물들어있다. 차가 전복될 때,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숨 쉬는 게 갑갑하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봤으나, 부유섬은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 병사는 허탈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알고 있다. 시간 벌이에 불과하다는 것쯤이야.
방아쇠를 당겨도 격발되지 않는다. 탄창을 갈아 끼우려던 병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은 총알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고작 이걸로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리라.
그래. 덕분에 더 제대로 된 사용법이 떠올랐다.
쓰러진 고참을 쏘고, 총구를 턱 아래에 바짝 붙여 가져다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리는 가까워져 온다. 방아쇠에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올린 그는 강하게 탄식했다.
시발, 왜 이렇게 된 걸까.
실수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저 멀리서 커다란 무언가의 기다란 꼬리를 본 병사는 생을 포기했다.
다가오는 무리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징그러운 것들은 무엇이며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공기 중에 가득한 악취가 방독면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아주 오래 전, 원래는 저런 것들이 없었다고 한다. 아니, 실제로 자신 또한 여기에 와서 직접 보기 전까진 저런 게 실존한다고 믿기 어려웠다.
…불합리하다. 이런 것들은 대체 왜 나타난 걸까? 아니, 질병과 역병을 비롯해 던전과 몬스터 전부가 그렇다. 놈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깊어졌고 병사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거다.
그리고 수십 년간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다. 인류는 그저 불합리하게 내몰리고 만 것이다.
차라리 이게 전부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세상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저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가 기어이 그를 붙잡고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시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그는 손가락을 당기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조차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병사의 시체조차 일어나고 말았으니까. 그래. 자살과 죽음조차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만족했으리라.
적어도 영원한 꿈속 저편에서만큼은 바라던 대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역병의 무리는 테헤란을 향해 멈추지 않고 걸었다. 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이들, 미끼마저 게걸스레 집어삼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