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61 나비의 성 (3)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대로 환영의 나비는 자리를 비웠다는 뜻. 혜견과 탐지까지 펼친 늑대는 방 안으로 걸었다.
하지만 별다를 건 없다. 삭막한 가구들만이 놓여있을 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그 때문에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되려 갑갑하게 느껴진다.
분명 환영의 나비가 쓰는 방임에는 틀림없다. 후각이 그리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긴 그녀 개인의 방일 뿐이지 마법사의 공방은 아니었다.
잠시 둘러본 늑대는 이곳저곳을 투시했으나, 탕아들과 관련 있어 보이는 물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물건은 보이지 않았지만… 숨겨진 방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만큼은 들키지 않겠다는 건지 잘도 숨겨놓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진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결국, 환영의 나비 또한 침입을 눈치챌 터. 여기서 물러나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은 있어도 통로는 보이지 않는다. 환영의 나비는 대체 어떻게 방 안으로 들어갔을까. 거기에 대한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방 서랍에 있는 단거리 이동 주문서. 늑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주문서를 찢었다.
머잖아 빛무리가 그를 둘러싸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늑대는 다른 공간에 있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 가득한 피 냄새…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수도 없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로 새겨진 마법진.
늑대에게는 그 마법진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은 없다. 하지만 지식 대신 스킬이 있다.
허나, 그럼에도 쉽지 않다. 이 마법진은 도무지 읽을 수 없을 만큼 고차원적이고 복잡했으니까.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소환진이라는 것뿐. 한참이나 소환진을 살피던 늑대는 이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체는 소리.
스킬로 가진 청각의 보정이 아니었다면 절대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했지만 알게 된 이상, 숨소리의 주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공허를 일으킨 늑대는 벽을 몇 차례나 뚫었고 마침내 보인 누군가의 모습에 늑대의 눈이 부릅떠졌다.
***
광장을 빠져나오자 붉게 물들었던 도시가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무채색의 도시… 겹쳐진 공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도시에 불과한 부유섬.
붉은 마법사들이 도착했을 땐, 푸른 마법사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영창을 준비하는 그들의 입술이 쉴 새 없이 달싹이고 있다. 언뜻 내려다본 지상에 오염된 무리가 진격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미 테헤란의 지척. 가장 먼저 도착한 인디고의 마법사들이 먼저 마법을 사용하고 있던 것.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다… 애초에 역병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움직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곧 홍유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의 말소리였다.
담담하고 빠르게 이어지는 말소리. 그녀가 손을 들었을 때, 상공에 빙산이 만들어졌다. 끝이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빙산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지면으로 떨어졌다.
인디고 스퀘어의 마스터, 겨울의 주인의 마법은 분명 대단했다.
지독한 한기는 무리를 순식간에 얼려 진격을 멈춰 세웠다. 빙산이 추락하자 그 충격에 도시의 건물은 무너지고 그 잔해는 무리의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고.
짓눌린 무리 또한 한 줌 핏물이 되었을 테고 그러지 않더라도 얼음 파편은 무리를 꿰뚫고 찢어발긴 날붙이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뿐이다. 역병의 군세는 죽이고 죽여도 잘 죽지 않는다. 얼어붙지 않은 무리는 얼어붙은 무리를 물어뜯고 밀쳐내며 진격한다. 멈추지 않는 군세는 빙산 정도로는 도저히 멈춰 세울 수 없다.
고작 그 정도였다면 이 길고 긴 싸움은 진작 끝났으리라.
게다가, 놈들은 고작 무리. 여파에 불과하다.
눈동자를 굴려 저 아래서 그것의 모습을 찾았을 때, 홍유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질병은 어떻게 됐소?"
아스터의 물음에 인디고 스퀘어의 마스터, 겨울의 주인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답했다.
"아직 보이지 않네요."
"나타난 게 역병뿐이라 그나마 다행이구려. 마저 하시겠소?"
마법을 퍼붓는 건 같지만, 레드 스퀘어와 인디고 스퀘어의 상성은 좋지 않다. 함께 마법을 사용했다간 불이 꺼지고 얼음은 녹고 물은 증발하리라. 순서를 묻는 말에 겨울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식어가는 공기가 차가워진다. 수인을 맺고 영창을 읊으며 인디고의 마법이 완성되어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마법은 완성되었고 테헤란을 향해 물과 얼음을 다루는 인디고 스퀘어의 폭격이 이어졌다.
홍수, 해일, 붕괴… 뛰어난 마법사들의 합작은 능히 자연재해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인디고의 어느 마법사는 쾌재를 질렀다.
…본 적 없는 얼굴. 분명 햇병아리이리라. 그 모습에 홍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으음…"
아스터와 겨울의 주인이 동시에 침음했다.
마침내 역병이 전선에 서고 말았기 때문에. 홍수와 해일이 파도치며 모든 것을 쓸어갔지만, 쥐를 수천 배 부풀린 듯한 거대한 괴물… 놈의 주변만은 침범하지 못했다.
마력이, 마법조차 부패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예외가 아니다. 속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형상이 있건 없건 간에 모조리 썩어 문드러져 간다. 홍수를 이룬 마력은 사라지고 죽음이 내린 땅은 가뭄보다 심각하게 메마르고 말았다.
순간, 놈의 등에서 고름이 터져 흘러내렸다. 짙은 녹색 연기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그것이 퍼져나가 찢기고 짓눌려 엉망이 된 무리를 억지로 이어붙여 새롭게 만들었다.
엉망진창… 아까 쾌재를 지른 마법사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몬스터와 인간과 동물을 막론하고 억지로 뭉쳐진 형상이 바닥을 기고 때때로 굴렀다.
"이제 시작이구려."
아스터의 말에 겨울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등. 마치 고름과 같은 수십 수백의 머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인디고의 차례가 끝나고 레드 스퀘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차례가 돌아와 앞으로 나서는 도중, 저 멀리서 자색 로브의 마법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녀가 아는 자색 마법사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넬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홍유리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다. 마른 침을 삼킨 홍유리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마법을 영창해야 할 때. 무어라 지껄이는 도로시를 무시하고 홍유리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최선은 그것뿐이었으니까.
***
"네가 대체 왜 여기에…"
꽁꽁 묶인 사람의 형상.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건 분명 아넬라였다. 외상은 없지만, 호흡 곤란에 빠져 있다. 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만큼 호흡하면 호흡할수록 그녀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으리라. 공허가 먹어 치운 벽 너머에서부터 산소가 흘러들어오자 의식이 혼미한 와중에도 살기 위해 숨을 몰아쉰다.
눈물이 맺히고 한껏 숨을 들이켜더니, 사레가 들린 듯 컥컥거렸다.
놀라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등을 두드리자 가빠진 호흡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간다. 갑작스러운 호흡과 산소가 들어오자 놀랐을 뿐. 그런 그녀를 보며 늑대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최상층으로 올라오며 누구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조차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층에서 스크롤을 써 옮긴 거라면 냄새가 끊기는 게 당연할 테니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분명 죽고 말았으리라.
누가 그랬을지는 명백하다. 애초에, 나비의 성에 거주하는 건 환영의 나비 하나뿐이었으니까.
십중팔구 그녀에게 들키고 만 것이리라. 괜한 부탁을 했는가에 대한 생각에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풀리긴커녕 되레 부풀어간다.
"누, 누구…?"
혼미한 의식으로 앞을 본 아넬라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그마한 검은 강아지. 알파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 그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잠깐 안심할 수 있었다.
"아넬라 모레스트. 네가 왜…"
낮은 목소리에 아넬라는 침을 삼키려 했지만 삼킬 침이 남아있지 않다. 늑대를 붙잡은 그녀는 메마른 목으로나마 힘겹게 쉰 목소리를 뱉었다.
"…니께서, 오실… 도, 망!"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어머니이리라. 설마 환영의 나비가 아직 저택에 남아있었던 건가?
생각은 나중에… 일단 그녀를 구하는 게 먼저다. 자신의 부탁으로 죽을 뻔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넬라를 들어 올린 늑대는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에 조용히 숨죽였다.
―고성의 주인. 비록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지만, 그런 벽 따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 은신은 유지되고 있으니만큼 침입은 눈치챘더라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모를 터.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다. 지금, 지금이라면 환영의 나비를 쓰러뜨릴 수 있다. 역병이 나타난 지금, 환영의 나비는 혼자일 테니까.
…아넬라를 살릴지 아니면 아멜리아를 죽일지.
선택은 두 가지였으나, 늑대는 결국 몸을 돌렸다.
공허가 일어나 기어코 벽을 먹어 치우고야 말았다.
고성의 바깥과 이어질 때까지. 그때가 되었을 땐 환영의 나비도 눈치챘는지 발소리가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검은 안개를 불러일으켜 영문 모를 소환진을 지웠다.
정체는 모른다. 하지만 흑무라면 얼마든지 먹어 치울 수 있다. 피로 된 불길한 소환진같은 걸 그대로 둘 필요는 없으니까.
불안 요소를 제거한 늑대는 바깥으로 이어진 통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
"아넬라."
환영의 나비는 딸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할 사람은 없다. 이미 방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먹어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잔해조차 없이 사라진 벽. 무언가가 아넬라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환영의 나비는 손을 휘저었고 그 손에 자색 마력이 휘감기는가 싶더니 이내 고성의 벽을 덮어버렸다.
고작 그것뿐이지만, 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한없이 현실에 가깝다.
하지만… 부서진 벽은 하나가 아니었다. 또 다른 숨겨진 방에 이어져 있단 사실에 환영의 나비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가 생겼다.
그리고 사라진 마법진을 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온기는 남아 있다. 그렇다면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으리라…
자색 마력이 퍼져나감과 함께 환영의 나비는 꿈결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