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62 환영의 나비 (2)
"……."
도움이 되지 않아서, 혹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갖가지 핑계와 변명으로 남아 있던 퍼플 스퀘어의 마법사들은 굳게 문을 걸어잠궜다.
집. 하지만 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런 나뭇조각이나 돌조각따위는 저들에게 있어 종잇장과 다름없을 테니.
셀 수 없는 나비와 검은 마랑이 싸우는 모습에 그저 아연해지고 말았을 뿐.
지위가 높거나 소식에 밝은 이들은 머나먼 한국 땅에서 들었던 소문을 얼추나마 알고 있었다. 추방당한 후계자인 아가일 모레스트를 죽인 마랑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던 소문에는 스컬 울프라 했었지만 터무니없다. 스퀘어 사상 역대 최고의 후계자였던 그가 고작 스컬 울프따위에게 죽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저 마랑이라면 어떨까. 마랑이 아가일을 죽였고 그래서 환영의 나비께서 마랑과 싸우고 있는 거라면 납득이 가지 않을까.
아니, 그런 건 의미 없다. 정말 중요한 건 마법사들의 성역. 인류 최후의 보루인 스퀘어에 몬스터가 침입했다는 사실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그래. 문을 걸어잠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
서로를 살핀 늑대와 나비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탐색전이 끝났을 때, 먼저 움직인 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늑대였다. 탄력을 받은 가시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나비를 휩쓸었다.
그 사이, 환영의 나비의 의지에 따라 나비들은 그 자리에서 갖가지 환상을 일으켰다.
폭발하고, 사라지고, 눈앞을 흐리게 하는 등,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환영을 보여주고 때때로는 늑대조차 본 적 없는 괴물이 되어 혼동시키기도 했다.
그 끝없는 환영속에서 늑대는 그저 달릴 뿐. 그에 환영의 나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말을 걸어 왔었다. 그건 지성이 있다는 뜻. 본능으로 살아가는 짐승조차 미지를 두려워한다. 하물며 지성이 있다면 더할 터. 마랑에게도 예외는 아닐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두려움이 없는 걸까 아니면 억누르고 달리는 걸까. 환영의 나비는 팔을 휘저었고 유려한 손길에 자색 파도가 출렁이며 따랐다. 애초에 이 도시를 물들이고 있는 자색 마력 전체가 그녀의 것이나 마찬가지. 퍼플 스퀘어에서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다.
이번에야말로 환영을 피할 순 없으리라. 파도는 마랑을 덮칠 테고, 그렇게 되면 늑대를 죽이는 건 손쉽다.
머잖아 자색 파도가 휩쓸었고 환영의 나비는 거짓 속에 허우적거리는 늑대의 모습을 보려 했으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늑대는 달리고 있었다.
"……?!"
혹시 지금 환영을 보고 있는 건가? 아니, 아니다. 붉은 눈에 맺힌 상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늑대의 눈이 보고 있는 건 환상따위가 아닌 현실이다…!
***
역시나.
확신은 현실이 되어 그 결과를 드러냈다.
'환상은 나약한 자들이 보는 허상에 불과하다.'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이 내면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잃어버린 자들. 멸망한 세계의 사념. 업을 두르고 스스로를 극복한 늑대에게 거짓 따위가 닿을 리 없다.
자색 도시를 달리며 검은 안개를 뿜어내 자신을 감싼다. 불길한 안개에 둘러싸인 이상, 환영이 아니라 그 어떤 마법조차 늑대의 눈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리라.
환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늑대는 그리 믿었다. 하지만 고작 믿음만으로 환영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단순히 마음가짐으로 될 문제였다면 그녀가 스퀘어 마스터의 자리에 오를 일은 없었으리라.
그래. 수도 없이 자신을 극복한 늑대를 제외하고는.
이건 그가 걸어온 길을 증명하는 것.
환영의 주인에게 부족함은 없지만, 늑대와의 상성은 너무나 극악했다.
애초에 계파의 주인과 그 후계자라는 차이는 있더라도 늑대는 거짓된 세계라는 환영을 경험한 바 있다.
아가일의 대마법에서도 벗어난 늑대에게 새삼스레 환영이 먹힐 리 없다. 그녀 또한 대마법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확신을 가지고 늑대는 나비를 향해 그림자를 뻗었다. 공허 그 자체는 사용할 수 없더라도 공허의 또 다른 효과인 비실체의 힘에 탈식을 적용하는 건 가능하다.
그렇다면 공허가 없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실존하지 않는 허상은 그림자에 찢어발겨지고 집어 삼켜질뿐.
순식간에 나비의 지척까지 도달한 늑대는 부릅 뜬 나비의 눈을 보곤 곧바로 몸을 돌렸다.
―직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초감각.
지금, 늑대는 선명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 본래 '늑대가 예상한' 미래밖에 보여주지 못했던 직감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상하지 못한' 미래조차 속삭이고 있다.
늑대의 감은 그가 수련으로 얻은 예측과 함께 미래를 예지하는 것에 가까워졌다. 거기에 혜견. 늑대가 스킬은 그 예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어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으로선 충분하다.
그러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알 게 됐다.
직감과 간파만이 아니라 관찰로 시작해 혜견이 된 이 힘조차 본래는 하나였노라고.
간파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초감각과 혜견과 동등한 격을 가지게 된다면 분명…
몸을 돌린 늑대의 앞에 나타난 환영의 나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서로간의 거리가 없다면 마법사의 저항이 통할 리 없다.
팔을 물어뜯기고 그림자는 심장과 폐를 꿰뚫었다. 수없는 자색 나비가 늑대를 뒤쫓았지만, 검은 안개속에 길 잃어 두번 다시 나타나지 못하게 됐다.
경화한 촉수는 아멜리아의 양 허리를 꿰뚫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 했다. 아멜리아는 늑대의 촉수를 붙잡고 버텼으나 칼처럼 변형된 촉수에 두 손이 베이고 말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변절자, 탕아들과 손 잡은 이에겐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은 환영의 나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하늘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 사는 마법사. 비록 지금은 무리일지라도 언젠가 늑대는 그녀에게도 송곳니를 드러내리라.
그렇게, 촉수는 기어코 환영의 나비의 허리를 절단해 상반신과 하반신을 나눴다.
"―――!?"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환영의 나비는 이제 더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됐다. 당연하게도 영창은 끊어졌고 그녀는 곧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멜리아 모레스트를 바라보는 늑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 이 감각은 환상같은 게 아니다. 애초에 극기를 가진 늑대에게 환영은 침범할 수 없다. 따라서 이건 두말할 것 없는 현실.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 모레스트는 분명 죽은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창하는 말소리가 들려옴에 따라 늑대는 죽어버린 환영의 나비를 자비 없이 짓이겼다.
여전히 감각은 틀리지 않다고 말한다. 오감을 속인 게 아니다.
늑대는 혼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현실로 구현화한 환상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 모레스트가 가진 스킬. 늑대의 공허와 화산각룡이 가졌던 화신과 동등한 격을 지닌, 거짓된 상을 현실에 투영하는 힘. 그게 바로 구현화였다.
즉, 그녀의 환영은 허상인 채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환영은 얼마든지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
환영 그 자체는 통하지 않더라도 구현한 것은 진짜. 극기가 있더라도 그걸 구분할 순 없다.
지금 죽어버린 환영의 나비도 분명한 진짜였으니까.
탐지를 펼친 늑대는 이미 수많은 환영의 나비가 주문을 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구현한 환영이 진짜라면 구현체의 마법 또한 진짜가 된다. 이제 스퀘어 마스터의 수도 없는 마법이 단숨에 늑대를 덮치리라.
그 속에서 늑대는 마력의 근원을 읽었다. 아무리 구현했다지만 그것들이 마력을 가질 리는 없으니까.
그랬다면 이전, 평행 세계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거다. 무한히 존재하는 스퀘어 마스터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따라서, 구현체들에 마력을 보내고 있는 근원이야말로 진짜 환영의 나비라는 거다.
도시 전체에 만연한 자색 마력이 늑대를 교란시켰으나 진짜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늑대는 지면을 박차곤 뻗은 촉수로 자신을 당겄다. 거기에 탄력까지 더해 새총처럼 쏘아진 순간, 늑대의 속도는 음속 너머에 있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과 충격파- 환영의 나비는 공간을 넘자마자 자색 마력 그 자체를 구현화해 거대한 벽을 만들었고 늑대는 알고 있었다는 듯 옆으로 돌았다.
환영의 나비가 옆으로 손을 젓자 벽이 따라와 길을 가로막았으나 늑대는 굴하지 않았다.
굴하기는커녕 한껏 입을 벌려 마력의 벽을 먹어 치우고야 말았다. 수많은 환영이 직접 몸을 던졌다. 구현체가 그랬던 것처럼 무수한 칼날과 몬스터가 구현되었으나 그런 것들로 늑대를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
완성된 마법조차 돌풍을 두른 흑무에 집어삼켜지고 만다.
홍유리와의 악연을 시작으로 아가일, 침묵하는 입과 싸워온 때까지. 늑대는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환영의 나비는 일그러진 얼굴로 바닥을 향해 두 손을 내리쳤고 작은 부유섬이 되어 순식간에 그녀를 띄워올렸다.
지상에서 싸우는 게 불리하다면 공중에서 거리를 둘 뿐이다. 허나 그것이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마법사의 당연한 상식. 그 어떤 헌터나 몬스터도 창공에서 싸우는 적을 꺼려한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마랑에게 있어 공중전은 더 없이 익숙한 것.
용이 되지 못한 뒤집힌 마천루의 이무기조차 마랑의 상대가 되지 못했음에야 한낱 나비 따위가 마랑에게 벗어날 순 없다.
"……?!"
환영의 나비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늑대의 움직임이 되려 활기를 띄고 있었으니까. 그건 이제 기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영역에 있었다.
발판을 밟고 구현체가 발한 사슬을 피하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몸을 거꾸로 뒤집고 발판을 만들어 뛰어내린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환영의 나비의 마법. 허나 그것이 적중할 일은 없다.
뻗은 촉수로 발판을 당기고 탄력을 발해 피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촉수와 그림자는 쉴새없이 나비와 구현체들을 찢어발겼다.
놀라운 것은 그러는 와중에도 급소만을 노리고 있다는 점.
지혜의 샘, 마법사의 극의에 있는 환영의 나비에게도 늑대는 불가해한 존재였다.
이래서는, 이럴 수는 없다.
무엇 때문에 여태껏 발버둥쳐왔는데…!
수십 년간이나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 왔는데…!
이제 겨우 그녀를 억제할 방법이 생겼다. 그건 환영의 나비에게 있어서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스퀘어를 가라앉히기 위해 역병을 부르는 소환진.
그녀의 희망인 이 부유섬을 가라앉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녀의 손이 드리워질 일은 없을 테니까.
미친 발상이었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방법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래. 그건 기나긴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인고해야만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남편이었던 에드가 죽었을 때조차.
그 시간속에서 아멜리아 모레스트라는 인간은 닳고 마모되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정말 지키고 싶었던 걸 위해 견뎌내야만 했다. 감정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게 생긴다면 그녀는 그것조차 손아귀에 쥐고 자신을 충동질할 테니까.
따라서, 아멜리아는 철저히 환영의 나비가 되어야만 했다.
사람이 아닌 마법사로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깎이고 지쳐갔다.
우습게도 마법사로서 갈고닦아지는 동안 사람으로선 닳을대로 닳아버리고 말았다는 거다.
이젠 그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그래도 상관없다. 마모된 환영의 나비는 마모되지 않았던 아멜리아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따를 뿐.
자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녀에게 벗어날 수 있도록, 아가일을 몰아붙였었다.
아가일이라면 언젠가 그녀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빠져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환영의 나비에게 남은 건 고작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전부 망쳐버렸다.
눈앞의 늑대가 제멋대로 헤집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 허탈함은 달궈질대로 달아올라 울분으로 치솟았고 증오로 승화했다.
우습게도 오래 전에 마모된, 잃어버린 감정이 이제서 찾아와 뒤늦게 그녀를 휘감았다.
감정을 담아 아멜리아는 주문의 말을 씹어뱉었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던 5절 영창의 대마법. 환영의 극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