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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56화 (156/407)

〈 156화 〉 #63 굴레 (2)

자색 도시의 풍경이 돌아왔을 때, 환영의 나비는 주저앉아 있었다.

천형처럼 속박하는 굴레. 평생 자신을 짓누르던 만상의 주인이 사라지자 환영의 나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건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그래. 결국 자신 따위는 그녀에게 있어 그 정도일 뿐. 쓸 곳이 있는 도구… 고작 그 이유였다.

나는, 우리는 고작 그런 이유로…

환영의 나비는, 아멜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마구 긁고 헤집었다. 손톱자국이 남고 피가 흘렀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또, 설령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리 같잖은 이유라도 그녀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오히려 그 이유를 알게 되자 스러질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울고 웃었다. 하염없이 울었으며 미친 듯이 광소했다.

누가 보게 되면 손가락질할 테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냥, 전부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드러낸 힘의 편린은 예상을 넘어 있었고, 자신을 원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단순한 도구. 어쩌면 굴복시키지 못한 게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그럴 수 있을 테니까.

아직 쓸모있는 도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씌워진 굴레는 절대 벗을 수 없다.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사실에 아멜리아는 절망하고 말았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하고.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에드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다. 아가일을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그가 탕아들에 손을 뻗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이렇게 어긋나고 일그러질 이유도 없었을 거다.

평생을 견디고 버텼지만, 사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닌 이유여서.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원망스러워졌다.

산발이 되고 엉망이 된 얼굴로 아멜리아는 그동안 쌓아왔던 눈물을 전부 쏟아내듯 비탄하고, 통곡했다.

원망은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만상의 주인은커녕 마랑에게조차 닿지 못했으니까.

원망을 집어삼킨 무력감은 기어코 아멜리아를 좌절시켰고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깊디깊은 늪에서 아멜리아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이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건 죽음이었다. 오로지 죽음만이 나에게 안식을 안겨다줄 수 있으리라. 이젠, 편해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망가진 아멜리아는 아들을 죽인 늑대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죽여다오."

우느라 쉬어버린 목소리. 그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사무쳐있었다.

그것은 증오와 원망을 담은 일그러진 소원.

어쩌면, 아가일을 죽인 늑대에게 죽는다면 다시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간직한 채로.

"……."

늑대는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어, 그녀의 앞에서 안개를 불러일으키자 망가진 아멜리아는 환희했다.

아른거리는 얼굴… 아들과 남편이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은 환각, 망상.

설령 망상이라도, 꿈이라도 좋다.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어차피, 이제는 끝일 테니까.

조용히 눈을 감은 아멜리아는 안개가 자신을 스치는 것에 다가올 끝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죽음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다는 예상은 또 빗나가고 말았다. 검은 안개는 자신이 아니라 아넬라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그에 놀라 부릅뜬 눈으로 마법을 발하려던 아멜리아는 그 안개가 자색 사슬만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손을 멈춰야만 했다.

…어느새 아넬라는 다시 쓰러져있었다. 분명 만상의 주인의 마력을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다행한 점은 그저 쓰러졌을 뿐이라는 거였지만.

아멜리아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더 깊게 빠져들어야만 했다.

이번에 그녀를 당긴 것은 자괴감. 그것이 아멜리아를 붙잡아 바닥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아넬라를 챙기는 건 자신이 해야 했을 일이다.

하지만 딸이 쓰러졌다는 사실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망가진 정신 속, 가족의 부름은 비난으로 바뀌어있었다.

누구 하나 그녀를 탓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멜리아는 탄식했다. 설령 아넬라가 쓰러진 걸 알아차렸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제 와 새삼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죽지 못한다면 나는 아멜리아가 아니라 환영의 나비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이미 일그러진 관계다. 이럴 수밖에 없다.

어차피 소중했던 것들은 진작 잃어버렸고 이젠 그 감정조차 남지 않았을 텐데…

아멜리아는 문득,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랑의 안개가 아넬라에게 향했을 때.

잃어버리고 죽였다고 생각한 감정은 깊은 곳에 숨어 있었을 뿐이지 죽지 않았다. 그 위기에 다시 찾아오고야 말았다.

사라져. 사라져. 사라져…!

차오르는 감정 속에서 아멜리아는 자신을,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환영의 나비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아넬라에게 손을 뻗었다간 그녀도 마찬가지로 나와 아가일처럼 지독한 굴레에 빠지고 말 테니까.

만상의 주인. 그녀는 언제라도 내 소중한 것을 쥐고 흔들 테니까… 그러니, 내게 소중한 것 따위가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아멜리아는 아넬라를 부정할 수 없었다. 소중한 것… 검은 안개가 아넬라에게 향했을 때, 그렇게 느끼고 말았으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더라도 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결국 감정을 죽인다는 게, 가족을 멀리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서였으니까.

"나는…"

결국, 이 굴레에선 벗어날 방법 따윈 없는 걸까? 그녀의 손아귀에선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아멜리아는 처연하게 울고 웃었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죽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서.

***

환영의 나비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늑대 또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넌 잃어버린 자들의 희망이니까.'

그 말이 뇌리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 맴돌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시스템은 물론이거니와 멸망과 종말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거니까.

……어떻게?

여왕이 알고 있던 것처럼 그녀 또한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런 것과는 다르다. 분명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른 공허함은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잃어버린 자들의 희망. 그게 나를 반기는 이유인 거라면 멸망을 막는 게, 질병과 역병을 막는 게 옳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질병과 역병을 막기는커녕 이단의 탕아들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변절자들의 집단. 엘릭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온갖 재앙을 일으켜 인류를 학살하는 쓰레기들.

탕아들을 세운 목적은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만들 수 없는 엘릭서를 만들어서까지 깨우려는 그 존재는 대체 무엇이며, 왜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걸까?

아니, 애초에 엘릭서를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하수도와 마녀의 재앙 같은 학살극을 벌일 필요가 있나? 사람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조용히 납치할 수 있을 텐데.

…모르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 생각하더라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죽여다오."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늑대는 감았던 눈을 떴다.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 모레스트. 쳐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을 때, 간절한 눈으로 바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환영의 나비에 대한 것도 의문이었다.

배신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정말 그렇다면 환영의 나비는 끝까지 저항했을 테니까. 만상의 주인을 보고 절망할 리 없을 테니까.

한숨 쉰 늑대는 그녀를 지나쳐 쓰러진 아넬라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환영의 나비에게 전의는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대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의 전말을 알아야만 한다.

***

퍼플 스퀘어의 마법사들이 뛰쳐나왔을 때, 홍유리는 있는 힘껏 달렸다. 기어이 퍼플 스퀘어로 입성했을 때, 도시 한켠이 무너져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참상에 겁먹어 문을 잠그고 떨고 있을 뿐.

일은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역병에게 그러했듯이.

"이 등신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겁쟁이 같은 행동 덕분에 움직이기는 편했다. 추적의 마안으로 발자취를 좇은 홍유리는 곧 외로운 고성까지 올 수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지만, 여기가 환영의 나비의 성이리라.

잠겨있지 않은 문- 닫혀있긴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허술한 성. 그건 마치 누군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를?

문 앞에서 홍유리는 고민해야 했다. 나비의 성에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가하고.

이 앞에선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알파가 말했던 대로 환영의 나비는 배신자였을 확률이 높다. 싸움이 일어날 만한 이유는 달리 생각나지 않으니까. 역시 알파가 당한 거라면…

일단 여기서 물러나 좀 더 사태를 파악하는 게 옳다. 여기서 멋대로 들어갔다간 자신만이 아니라 그 여파는 여명에까지 미치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물러나자고 생각했지만 타이밍 좋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너, 왜 멋대로 여기까지 오고…!"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

처음으로 도로시가 쓸모 있게 보였다. 스퀘어 소속이 아닌 자신이 아니라 스퀘어의 후계자인 그녀라면 설령 환영의 나비가 배신자일지라도 도로시를 죽이진 못할 테니까.

게다가 레드 스퀘어에서 퍼플 스퀘어의 이변을 알아차리고 왔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명분까지도 충족시킬 수 있다.

"야. 고맙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홍유리를 보며 도로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고맙다고."

갑작스레 등을 떠미는 손길. 화들짝 놀란 도로시가 저항했으나 마력이라면 모를까, 신체 능력이라면 헌터로서 구른 짬이 있는 홍유리가 좀 더 위였다.

나비의 성으로 밀어진 도로시는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자신을 민 홍유리를 향해 소리쳤다.

"이게― 홍유리! 너 정말 미쳤어?!"

태연하게 걸어들어온 홍유리를 보고 도로시는 마력을 끌어올리려다 참아야만 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여기는 스퀘어 마스터의 본거지.

환영의 나비께서 거주하는 곳에서 함부로 마력을 드러낼 순 없는 법이었으니까.

아무리 왈가닥이라지만, 나비의 성으로 자신을 밀 생각을 한다고?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저 천둥벌거숭이에게 생각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한다. 성에서 나가기만 하면 이번에야말로 예의라는 걸, 개념이란 걸 알려주고 말겠다― 금발 소녀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홍유리는 자기 발로 태연스레 나비의 성안으로 들어왔고 복도를 걷기 시작하자 도로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어이마저 사라지는 황당함을 느꼈다.

"너, 너 지금 진짜 막 나가자는 거야?!"

소리 지르는 자신에게 뻔뻔하게도 홍유리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에 말문이 막힌 도로시는 손으로 자신을 부채질하다 홍유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나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 알았으니까 쫌 기다리라고."

귀찮다는 듯 손을 떨쳐낸 홍유리는 위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뭔가에 홀리기라도 했나? 미치지 않으면 할 리 없는 행동을 하는 모습에 도로시는 코웃음 쳤다.

그래. 갈 테면 어디 가 보라지. 곧 환영의 나비께서 직접 나와 그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실 테니까.

그러던 도로시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어쩐지 문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서.

…왜? 곧 그녀는 자신이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홍유리가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있었으니까.

"이, 이게! 이거 안 놔?!"

짖을 거면 짖으라는 듯 홍유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하나둘 오르는 계단. 도로시는 물론 저항했지만, 나비의 성에서 마력을 끌어올릴 수 없는 이상 신체 능력만으론 헌터 짬밥을 먹은 홍유리에게 벗어나기란 요원했다.

되려 꿀밤과 딱밤을 얻어맞고 울상이 된 도로시는 결국 3층을 넘게 올라왔을 때,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환영의 나비께서 모르실 리 없다고. 차라리 그럴 거라면 제 발로 걸어가는 게 낫다고.

"…놔. 놓으라고!"

앙칼진 고양이처럼 소리친 도로시를 본 홍유리는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여기까지는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최상층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너, 나간 뒤에 두고 봐!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아 그러시던가."

코웃음 친 홍유리는 계속해 층을 올랐고 최상층의 계단을 오르기 직전, 열린 문을 발견했다.

아넬라 모레스트. 아가일 모레스트.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 모레스트가 낳은 두 사람의 방. 비록 문은 굳게 닫혀있지만… 홍유리의 추적의 마안은 그 방에 이어진 수많은 한 사람의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방과는 달리 그 앞에만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으니까.

마치 성에 사는 누군가가 계속해 들른 것처럼…

"……."

별안간 홍유리가 문 앞까지 다가갔고 도로시는 그 행동에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기어이 방 안으로 들어간 홍유리는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잠자는 누군가를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넬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쓰러진 아넬라가 침대에 드러누워 있단 사실에 홍유리는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살폈으나,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도 없고 그냥 지쳐 쓰러졌을 뿐이다.

하지만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걸까? 그리고 알파는 대체 어디에?

그 답을 알려주듯, 바깥에서 들려온 비명에 홍유리는 황급히 방을 나섰다.

―무엇을 보았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도로시. 주저앉은 소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검은 늑대가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생각했던 것처럼 참사가 벌어진 건 아닌 모양. 버젓이 걸어오는 알파의 붉은 눈을 보자 여태 쌓인 걱정이 한 순간에 달아나 홍유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무사한 모양. 그거면 된 거였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까.

"괜찮았어?"

그 물음에 늑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홍유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파가 쉽게 당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둘과는 반대로 금발 소녀는 고개를 꺾은 채 그 자리에서 혼절해 있었고 그 모습을 본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

홍유리가 방 안으로 기어이 들어가자 도로시는 지금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다. 몰래 나비의 성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고… 희희낙락 계단으로 몸을 돌린 도로시는… 그러지 못했다.

어두운 복도 저편, 마법사인 도로시의 눈에는 똑똑히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본 순간, 도로시는 목울대를 넘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도로시는 진심으로 바랐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환각이기를. 다가오고 있는 괴물이 환영이기를.

전신을 휩싸는 불길함…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괴물의 붉은 눈이 자신을 향했을 때, 도로시는 자신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력을 끌어올리기는커녕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턱턱 막혀오는 목을 부여잡고 심호흡하려 했지만… 어떻게? 숨은 어떻게 쉬는 거였지? 새하얘진 머리가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왜, 왜?

몬스터를 죽여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질병과 역병에도 맞선 적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왜, 왜 저 괴물과는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 걸까?

저것이 더한 괴물이기 때문에?

아니, 그럴 리 없다… 없을 텐데… 도로시는 차마 그것을 확신하지 못했다.

의심은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어갔다.

이제는 떨지도 못한 채, 새하얗게 얼어붙은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다가온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도로시는 정신 고갈을 겪는 것처럼 무언가가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붉은 눈을 지닌 검은 마랑― 전신에 둘린 알 수 없는 문양은 도로시를 불길함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고 은은하게 빛나며 그것을 감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흉성은 차마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랑의 거대한 턱이 단번에 자신을 씹어 삼키는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쿵쿵거리며 불규칙하게 박동했다. 호흡하는 것조차 잊어 창백해진 얼굴로 도로시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비명을 질렀다.

"―――!"

나비의 성을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 들키지 않았으면 싶었지만, 지금만큼은 환영의 나비께서 와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도로시는 괴물이 자신의 앞까지 다가왔을 때,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정리하듯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제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질병과 역병. 지상 아래서 날뛰는 괴물들에겐 일방적으로 마법을 퍼부었을 뿐. 진짜로 맞선 적은 없다고.

하지만 눈앞의 괴물은 지금 당장,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마법사인 도로시에게 있어 미지의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아 갔다…….

검은 마랑의 눈을 마주하며, 더 견딜 수 없었던 도로시의 의식이 서서히 침잠되어 마침내 가라앉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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