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63 굴레 (3)
기절한 도로시를 그녀의 집 안에 던져놓고 홍유리의 저택으로 돌아오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괜찮으셨어요?"
"뀨~?!"
마력을 감지한 건지 불안해하던 백소율이 별일 없었느냐 물어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백소율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릴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시무룩하게 방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미안했지만… 생각할 게 너무 많다.
과연 그녀를 스퀘어에 두어도 되는지에 대해서도.
특히, 환영의 나비와 대화한 뒤에는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종일 생각하느라 시간은 흘러 밤이 되었지만, 아직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오지 않는 답을 궁리하며 풀리지 않는 의문을 억지로나마 하나 둘 풀어가는 중,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야."
노크도 없이 문을 연 홍유리가 그 틈새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비의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 돌아왔을 때, 나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정작 나조차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으니까.
아넬라를 나비의 성에 두고 왔을 때부터 계속 묻고 싶었으리라.
그러지 않았던 건 나에 대한 신뢰. 그동안 회복된 관계는 그녀에게 인내를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던 모양. 가능하면 좀 더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뒤죽박죽이라도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상 그러자니 또 지끈거린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과연 그녀는 어디까지 나를 믿어줄 수 있을까?
어쩌면 다시 관계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역시 갑갑해지고 만다.
스퀘어 출신의 마법사에게 사실은 그 꼭대기, 인류의 정점에 있는 마법의 시조가 사실은 변절자들의 수장이라고 그리 말할 수 있을까.
마법사인 그녀에게 마법의 시조를 부정한다는 건 어쩌면 그녀가 걸어온 길을 모독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각색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좀 더 쉬어야 함에도 나를 기다리느라 아직 잠들지 않은 홍유리를 보곤 결심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자고.
어차피 여기까지 와버렸으니까. 백소율을 스퀘어에 두어도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건 내가 아니라 그녀의 스승인 홍유리에게 있어 더 중요한 일일 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내 말을 믿지 못하더라도…
그리하여, 늑대는 찬찬히 이야기를 시작해갔다.
***
아넬라를 눕혀 놓은 늑대와 아멜리아는 나비의 성,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대화를 시작했다.
들어야 할 게 너무나 많았으니까.
지친 목소리로 죽음을 바라는 아멜리아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마랑에게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거다.
원작 시점에서 영입된 게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만상의 주인에게 이단의 탕아들에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있었던 것.
스퀘어의 마스터로서 그럴 수 없었던 그녀는 그 때문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마땅한 반항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마법의 시조에겐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남은 자식들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환영의 나비가 되고 만 아멜리아 모레스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식에게 멀어지고, 아가일 모레스트를 몰아붙인 끝에 오히려 탕아들에 협력하게 된, 끝내 죽음을 맞은 아들의 모습에 무엇을 느꼈을까.
어쩌면 원작에서 그녀가 탕아들에 영입되었던 이유는 아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근거는 없지만, 십중팔구 그럴 거라 느껴졌다.
그런데도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아가일 모레스트를 죽인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내 위로는 비수가 될 테니까. 또 사과할 수도 없다. 어떤 이유가 있었더라도 아가일이 한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랬다간 사각지대에서 이유 없이 죽어간 이들을 모독하는 꼴이 되리라.
자식 잃은 어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죽여다오."
공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죽여달라고.
그래야만 아넬라만이라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만상의 주인이 나를 원하는 한, 아넬라는 언제라도 노려질 수 있다고.
살아서는 안 되고, 그럴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자신의 딸만이라도 굴레를 벗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가족. 어미로서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죽음뿐이라고. 이게 가장 올바른 결말이라고.
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짊어져야 했던 무게는 감히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일 테니까. 수십 년간 버티고 버텨 지쳐버린 그녀에게 그래도 살아가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으니까.
어떤 각오로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알게 된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나는 한숨 쉬고 말았다.
사실, 이 회색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쭉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잠기지 않았던 고성의 문과 언제든 돌아오길 바라며 정리해두었던 자식들의 방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이제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과 돌아오지 않는 딸. 쓸쓸한 고성에서 나비는 자신의 죽음을 바랐다.
간절한 목소리에 등을 돌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장 죽지는 않았으리라.
이 나비의 성에 쓰러진 아넬라를 돌볼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녀의 선택을 바꿀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희미하고 미약한 희망을 안겨다 주는 것.
늑대는 그 순간 어떠한 각오를 가슴에 새겼다.
***
"……무슨."
일의 전말을 들은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반응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다음 말에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귀가 쫑긋거렸다.
"좆같이도 돌아가네. 진짜."
짜증은 내고 있지만, 그 말에 의심은 없다. 시원할 정도로 깔끔하게 믿어버리는 것에 오히려 의아해졌다. 설마하니 아무리 꼬이더라도 그녀의 마법이 자신에게 향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홍색 눈동자엔 의심 따위는 담겨있지 않다. 덕분에 머릿속에 낀 안개가 걷히는 것만 같다. 물론 잃어버린 자들― 시스템과 종말에 관해서는 얘기할 수 없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대해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편해졌다.
옆에서 함께 생각하는 붉은 머리 소녀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래서 어쩌려고? 그분, 아니 그 사람이 그랬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을 텐데?"
…문제는 그거였다. 마법의 시조가 배신자라고 해봤자 그걸 누가 믿겠냐는 것. 이야기에 설득력이 너무나 없다. 여명의 몇몇은 믿어줄지도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미쳤냐고 했으면 했지 믿을 리 없다.
왜냐하면, 칠영웅 이상으로 인류에 기여한 게 그녀였으니까.
유럽이 멸망하긴 했으나 질병과 역병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스퀘어를 띄워 올렸기 때문이며 마법을 퍼뜨렸기에 갑작스레 변한 세상에 여태껏 저항할 수 있었던 거다.
다시 말해 만상의 주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했거나 그와 다름없는 상태가 됐을 거라는 뜻.
물론 그녀가 원한다면 그런 위협쯤이야 얼마든지 걷어낼 수 있을 테지만. 질병과 역병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모순. 멸망을 막는 토대가 된 마법의 시조가 인류를 좀먹는 변절자라는 것이 말이다.
정작 그녀의 존재 자체를 아는 이들도 많지 않다. 의뭉스러운 불가해. 그만한 일을 했으면서도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드러내지 않으니까. 아이러니한 건 그런 태도가 반대로 그녀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지지를 이끌었다는 걸까.
조금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결국,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만상의 주인을 쓰러뜨릴 방법은 없다는 거다.
"……."
그건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그 말을 호소하기 위해선 그만한 일을 이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당장 홍유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당장 그녀를 쓰러뜨릴 방법이 아니라 만상의 주인이 있는 이 스퀘어에 과연 백소율을 놔둬도 되는가에 대한 것.
물론, 만상의 주인은 내게 알 수 없는 호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변덕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호의를 믿을 수는 없는 법. 애당초 원작에서 백소율을 마녀로 만들었던 건 그녀가 만든 조직인 이단의 탕아들이었으니까.
백소율의 각오, 결의를 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녀의 자비라는 걸 생각하면 허탈함마저 느껴진다.
만상의 주인이 지금이라도 그럴 생각만 있다면 날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멀다. 벽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높았던 거다… 아직 훨씬 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럼 어쩌려고?"
"적어도 대비할 방법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테니까."
"대비할 방법?"
그런 게 있긴 하냐는 듯한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래. 어쩌면."
***
어째서 내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까?
약해서, 부족해서, 어려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고. 짐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함께할 수 없다고.
그것 때문에 이곳 스퀘어로 오기로 했다.
어쩌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짐이 된 채로 그의 옆에 남아 있는 것보단 잠깐 떨어지더라도 당당히 옆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의 옆에 있는 건 누구도 아닌 나였으면 한다.
내게 선생님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그와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내게 은하 언니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텐데…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뭉게뭉게 혼란스럽다.
내가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선생님이 듣는다는 게.
내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말한다는 게.
그게… 정말 싫다.
그리고 그것보단 더 싫은 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때, 함께 있을 수 없었다는 것.
그에 백소율은 조용히 다짐했다.
강해지겠다고. 그래서 당당히 옆에 설 수 있게 되겠다고.
―고민하던 그녀가 자신이 향할 스퀘어를 결정한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