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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58화 (158/407)

〈 158화 〉 #64 도움

그 길로 곧바로 환계로 가 한참을 달린 늑대는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참이라고 말은 했지만, 홍유리와 백소율을 태우고 있지 않은 만큼 자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실제론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달렸다간 둘은 등 위에서 견디지 못하고 진작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 그렇게 달려 대구까지 온 늑대는 냄새를 쫓아 얼마 지나지 않아 백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급하게 달려온 내 모습이 의아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은하를 맡기고 떠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까.

"할 얘기가 있어. 아니, 도움이 필요해."

"알겠네."

그 당연하다는 대답에 되려 멀뚱멀뚱 눈을 뜨고 말았다. 백록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가 우릴 돕지 않았나? 그럼 우리가 자네를 돕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뀨~!"

그 말이 맞는다는 듯, 페리가 울었고 그 시원시원한 대답에 실소하고 말았다.

"……고마워."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계산 따위 없이 도움받았으니 도와주겠다는 심플한 답. 언제든 부르면 돕겠다는 그 말은 허언도 뭣도 아니었던 거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닫자 남아있던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뒤처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무수히 하늘을 수놓는 페어리 드래곤들을 보고 그 생각은 서서히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침 그렇게 여길 때, 다가오는 발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어?"

이은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가왔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단적으로 말하면 조금 너덜너덜했다. 아니, 막 던전에서 나온 모양이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현계로 돌아간 적 없는 모양.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고작 며칠 사이에 수준이 높아져 있어 그 사실이 기꺼웠다. 물론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머잖아 어엿한 헌터로 자리 잡을 수 있을 터.

어쩌면 다음 네버랜드 공략에선 나름 활약할지도 모르겠다. 이르면 내년 말에 열릴 테고. 이은하가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당분간, 이 성장세는 꺾이지 않는 게 아닐까.

"무슨 일이…"

"늑대야~! 페리~!"

오랜만에 보는 게 마냥 좋은지 뛰어오던 이은하보다 먼저 그 어깨에 앉아 있던 요정이 날아왔다. 언제나 활기찬 그 모습에 요정들은 정말 걱정 없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러웠다.

순서를 뺏겨서인지 시무룩한 모습으로 이은하가 뒤늦게 다가왔고 어쩐지 그녀의 뒤에 꼬리가 자라나 있는 착각이 들었다. 갯과는 나일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렇게 재회를 만끽하고 있을 때,

"던전은 잘 끝내고 왔는가?"

"어, 응. 그다지 없는. 어려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백록이 말한 건 요정어였는데 이은하도 마찬가지로 요정어로 태연히 대답했으니까. 어색하기는 했지만 뜻을 알아듣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놀라는 내 반응을 즐기듯 이은하는 자랑하는 것처럼 씩 웃어 보였다.

"내가 가르쳐줬네. 그래도 습득이 참 빠르군. 벌써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해졌으니."

생각해보면 백록은 인간의 말도 할 수 있었으니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백록의 말마따나 굉장한 속도였다.

"……."

여왕의 도움으로 스킬로 획득한 나와는 달리 직접 배웠다는 말. 그렇게 잠깐의 재회를 나누고 나는 백록에게 다시 본론을 꺼냈다.

도와주겠다는 말에 흔쾌히 끄덕여주었지만, 어떤 도움인지조차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까. 내 말을 들은 백록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깐 따라와 주겠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금방일 거로 생각했지만 제법 걸어야 했다. 새삼 그 정도 거리가 힘든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백록을 따라 제법 걸어 늑대는 어느 연못에 도착했다.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지만, 여기가 수원화성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용연이라네. 바로 이곳에 요정용들의 어미 되는 오래된 용이 있다네."

늑대는 잠깐 감탄했다. 아마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백록조차 오래된이라는 말을 붙이는 걸 보면 대체 얼마나 오래 살아온 용이라는 걸까? 여기가 용의 연못이란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아래 잠들어있는 존재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존재, 오래된 용 또한 늑대의 존재를 느끼고 깊은 연못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낸 오래된 용 보고 페리는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존재는 페리와 같은 페어리 드래곤. 요정용들의 어미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거다.

용연에는 분명 아직 태어나지 못한 용벌레들의 알이 잔뜩 있었으니까.

"뀨~ 뀨우우우!"

놀랍다는 듯 페리는 감탄했다. 연못의 물을 완전히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용. 특별할 건 없다. 단지 커다랗고 커다란 페어리 드래곤이었을 뿐. 능히 수십 미터에 이를 듯한 길이는 어스 서펜트까지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동물의 사이즈는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늑대는 나중엔 페리도 저렇게까지 성장하는 걸까 생각했다.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깊은 잠에 들었던 오래된 용이 마침내 두 눈을 떴다.

"그대가 그 마랑인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마랑이라는 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돌아본 늑대는 백록이 자네 털을 받아갔지 않은가하는 답이 돌아오자 조금 황당해했다. 설마 그런 용도로 사용할 줄은 몰랐으니까.

용연에 잠들어있던 오래된 용의 깊은 눈이 늑대를 향했고 늑대는 이 용이 자신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혜견― 분명 이 용 또한 그 스킬을 가지고 있다.

허나, 같은 눈이었음에도 결과는 달랐다.

늑대는 능히 용을 꿰뚫어 보았지만, 용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늑대의 전신에 둘린 알 수 없는 문양이 감히 자신이 엿보는 걸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볼 수도 없겠지만 억지로 보려 해봤자 좋은 결과가 되진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저것에는 그런 미지가 담겨 있었으니까.

오래된 용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지를 가진 불길한 마랑. 실제로 보니 터럭에서 느낀 불길함은 마랑의 존재를 제대로 담지 못했다. 오래된 용에게 보이는 마랑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물.

어째서 이런 존재가 환계를 도운 건지 믿기는 어려웠지만, 자신과 같은 혜견을 지닌 마랑의 지성을 새삼스레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흰 사슴이 한 말이었으니 선악을 가릴 필요도 없으리라.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오래된 용의 목소리가 용연 주변을 울리자 늑대는 본론을 꺼냈다. 도움이 필요하다. 현계에 있는 역병과 질병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린 늑대는 무수한 페어리 드래곤이 자신을 도와줬음 한다고 밝혔다.

―부정한 것을 먹는 용. 그것은 페어리 드래곤의 본질.

그렇다면 분명 질병과 역병에게도 대항할 수 있으리라. 다만 늑대가 원하는 건 질병과 역병과 맞서 싸우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아무리 부정한 것을 먹는다지만 감히 역병과 질병에 맞설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그 여파. 역병이 퍼진 땅의 부정을 먹고 정화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오염된 땅을 다시 인류가 밟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늑대는 첨언했다.

묘한 눈으로 오래된 용은 늑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정말 그것으로 족한가?"

"…그래."

늑대의 눈은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 오래된 용은 그 사실을 깨닫고 백록을 잠깐 쳐다보았다.

사실, 그건 부탁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먼 길을 떠나 부정을 정화해달라는 말이었지만 요정용들에게 있어선 멀기는 하지만 먹이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말이었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성장하려 하는 요정용은 많지 않다지만 늑대의 말대로라면 싸울 일조차 없으니 사실상 위험도 없다는 말. 꺼릴 필요가 없다. 요정용인 오래된 용에게 있어 그건 오히려 호의로 다가왔다.

애초에 그 많던 용벌레들을 우화 시킨 게 이 마랑이라지 않는가. 게다가 수많은 던전을 없애주었다면 그를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오래된 용은 늑대의 옆에 선 아직은 어린 용을 보았다.

"나를 보거라."

충분히 성장했지만, 그럴 계기가 없어 탈피하지 못한 어린 용. 의아한 듯 갸웃거리는 모습에 오래된 용은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동시에 혜견을 가진 눈이 투영하듯 늑대의 옆에 선 어린 용을 보자, 어린 용― 페리의 눈이 멍해졌다.

"뀨…"

힘 빠진 듯 멍해진 페리는 더 이상 날갯짓하지 못해 내려앉았다. 동그랗게 웅크린 몸이 동면이라도 하듯 깊은 잠에 빠져든 순간, 오래된 용은 엄습하는 불길함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마랑의 붉은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살의는 없지만, 혹시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마랑의 발톱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찢어발길 터.

무슨 짓을 한 건지 해명하라는 듯한 압박 섞인 시선에 오래된 용은 침을 삼켰다.

일견 작아 보이는 검은 마랑의 안에 내재된 것은 감히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증유의 무언가였으니까.

그를 떠올리게 하는 괴물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허나, 마랑의 그런 반응을 오래된 용은 되려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건 마랑이 그만큼 어린 용을 아끼고 있단 증거였으니까. 대체 어떤 유대를 쌓아왔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흰 사슴과 검은 마랑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리는 천천히 껍질을 벗기 시작했고, 늑대는 그걸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하지만 자네는 한시가 급해 보이는군."

"……페리를 두고 갈 수는 없어."

그 강경한 말에 오래된 용은 다시 한번 웃었다.

"허물을 벗으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테지. 그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셈인가?"

"……."

"게다가, 자네가 말한 스퀘어라는 곳을 우리는 알지 못하네. 어린 용이 탈피를 마치면 길잡이 삼아 함께 가도록 하지."

"……."

"망설이지 말게. 자네가 가야 할 길을 가게나."

울리는 목소리에 늑대는 잠깐 백록을 쳐다보았고 백록 또한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은 건 사실. 오래된 용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다만, 페리와 떨어져야 한다는 그 사실이 불쾌하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늑대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린아이 같은 제멋대로인 고집일 뿐이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받아들이는 게 조금 어려울 뿐. 자조한 늑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요정용들의 도움은 얻었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을 조금 앞당겨서 도전할 뿐.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불안을 없앨 수 있다면.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희망을 심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늑대는 환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거기엔 자신이 우화시킨 많은 요정용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환계에 뿌린 씨앗은 결실을 맺었고, 머잖아 저 무수한 요정용들이 대륙을 넘어 오게 되리라.

이제 남은 건 자신이 질병과 역병을 쓰러뜨릴 수 있는가― 오직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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