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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59화 (159/407)

〈 159화 〉 #64 도움 (2)

마력을 회복하고 있던 이은하는 백록이 돌아오자 반색하며 일어나다가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단 걸 알아채고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자네, 사슴 얼굴을 보고 한숨인가?"

"아, 아니 아니라. 그것."

"그래. 알고 있네."

말과는 달리 빤한 눈초리에 머쓱해져 고개 돌린 이은하는 또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돌아갔구나 싶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얼른 던전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알파가 저리 빠릿빠릿 돌아다니는데 더 격차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자신도 그만큼 노력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환계에서 백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참 경쟁이 심하군."

"응? 소리야 무슨?"

"나야 종은 다르지만, 그나마 같은 짐승이라네. 허나 그대들은 아예 다르지 않은가?"

"……응?"

무슨 소리냐는 듯 이은하가 눈을 멀뚱거리고 갸웃거리자 백록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잘 알겠네."

"……?"

갸웃거리는 이은하를 뒤로하고 백록은 곰곰이 생각했다.

잘 생각해보면 늑대는 의외로 인간과 어울리는 모양이었으니까. 빨간 머리 마법사 소녀도 그랬고 검은 머리 소녀도 그랬다. 그리고 이 갈색 머리 이은하 또한.

어쩌면 늑대의 취향은 동족이 아니라 인간에게 향하는 걸지도 모른다. 인간의 암컷… 늑대의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백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보다 슬슬 준비해야 했으니까. 늑대의 요청에 따라 요정용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여들 테고, 어린 용이 탈피를 마치면 스퀘어로 가게 되리라.

지금은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게 먼저였다.

***

정말로 혼자… 그게 새삼스러웠다. 던전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제법 먼 길을 홀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쭉 페리와 함께 있었으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내 쪽이 페리에게 더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 벌써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것이 중증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잊기 위해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리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놈들은 끔찍한 괴물이다. 그 여파를 틀어막는 것만 해도 버거울 정도로. 놈들이 지나는 길은 오염되고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만다.

그뿐만 아니라 스테이터스만으로도 능히 화산각룡을 웃돌 터. 그 증거가 놈들의 맷집이었다.

화산각룡은 홍유리가 사용하니 대마법을 세 번이나 견뎌냈지만, 역병과 질병에 이르러서는 스퀘어 전체의 마법을 퍼붓고서도 죽일 수 없었으니까.

물론 상처는 입었지만, 놈들은 매번 도주했고 죽이기란 요원했다. 부유섬의 속도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고 그렇다고 지상에 내려왔다간 순식간에 당하고 말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놈들이 화산각룡보다 아래일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백두산에 웅크린 자색의 흑호나 모든 바다를 누리며 헤엄치는 바다의 재앙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인류를 몰아넣고 있는 건 바로 역병과 질병.

놈들을 죽이기만 하면 당장 인류가 멸망할 위협은 일단 걷어낸 거라고 할 수 있을 터. 자색의 흑호나 만상의 주인이 움직이지 않는 한에는.

하지만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릴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않았었다. 그 가능성이 생긴 건 만상의 주인을 맞닥뜨렸을 때.

그녀가 방심한 순간을 노려 공허로 그녀의 손을 먹어 치운 순간, 탈식을 포함한 스킬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에.

[잠식(B) : 먹은 대상을 지치고 피로하게 만들어 갉아먹는다]

일견 수수해 보이는 설명이고, 탈식의 하위호환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처음엔 실망했었다. 하지만 시험해 본 결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스킬이야말로 역병을 물어 뜯을 이빨이 되리라는 것을.

또, 잠식을 제외하고서도 재생이 C등급 뛰어난 재생으로 상승하고 마력 재생 또한 C등급으로 상승해 뛰어난 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역병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인류가 쓰러뜨릴 수 없었던 괴물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이제야 가능성이 조금 생겼을 뿐이니까. 하지만 가지고 있는 스킬 포인트까지 사용해 A등급 스킬 하나를 더 획득한다면 어쩌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모자라다. 놈들을 물어뜯을 이빨을 가지게 됐더라도 격차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게다가 만약에라도 놈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미약한 승산마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병과 질병을 떼어놓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싸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역병과 싸우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상처를 입히는 것.

그걸 위해서라도 아직 도움이 더 필요하다. 환수들의 도움은 얻었으니 이젠 마법사들의 도움을 얻을 차례였다.

그리고 거기에 관한 일은 홍유리에게 일임한바. 부디 일이 잘 풀렸기를 바라며 늑대는 스퀘어를 향해 달렸다.

***

창살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자 일어난 도로시는 두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태평하게 하품한 도로시는 언제 자신이 잠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에 뭘 하고 있더라?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가는 홍유리를 뒤쫓아가다가 나비의 성에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쩐지… 그 뒤의 기억이 희미하다. 미간을 주무르며 한참을 생각해봐도 도무지. 누가 머릿속에 지우개를 넣어서 쓱쓱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도로시는 별거 아니겠지 하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아래가 축축해서. 이불을 살짝 들친 도로시는 아니겠지 생각하다가 개나리색으로 물든 바지를 보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이렇게 됐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억지로 떠올리려 해도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 지우개로 지워진 부분이 엉망으로 지워져 있어서.

머리를 싸매고 애쓰던 도로시는 누군가 집 문을 쾅쾅- 두드리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는지 이른 아침부터 누가 감히 레드 스퀘어 후계자의 집을…

도로시는 곧바로 마력 감지를 사용했고 문 너머에 있는 게 홍유리라는 걸 깨달았다. 미쳤다고 열어줄 리가 없지. 도로시는 코웃음 쳤지만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잘 생각해보면, 비록 강제였으나 나비의 성에 함께 들어갔던 건 홍유리가 아니던가? 설마하니 둘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그러던 도로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면 왜 자신을 찾아온 걸까?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사이는 앙숙인데.

아니, 앙숙이었지. 도로시는 다시 코웃음 쳤다. 헌터로 허송세월하며 고릴라처럼 힘이나 길렀으니 아직 대마력도 가지지 못한 게 아닌가. 이제 우리 둘 사이의 격차는 명백하다.

실제로 후계자는 자신이었고 홍유리는 스퀘어를 박차고 나간 외부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로시의 콧대가 높아졌다.

좋아. 나비의 성에선 잘도 까불었겠다? 거기선 그랬지만 여기선 이야기가 다르다.

이번에야말로 뼈저리게 격차를 느끼게 해주리라.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고 나비의 성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고 말겠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던 것보다 빠르게 쾅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란 도로시가 황급히 침실에서 뛰쳐나왔고 탄식하고 말았다.

열린 문 너머에는 붉은 머리 소녀가 허리에 손을 얹고 발을 들고 있었으니까.

"뭐야? 왜 있는데 말을 안 해?"

"호, 홍유리! 넌 정말 개념이란 게 없는 거야?!"

세상에!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남의 집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올 생각을 할 수 있담? 경첩이 부서져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모습에 푹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가 밖에서도 이 성격은 고치지 못한 건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온 홍유리가 이마를 찌푸렸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곧 그 시선이 자신을 뚫어지라 보자 도로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에 비치는 것― 이상하게 색이 진한 자신의 옷을 쳐다보자 도로시의 얼굴이 마치 주전자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하다못해 갈아입고 나왔어야 했다. 저 상식 밖의 행동에 놀랐기 때문에, 아무리 갓 일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를 가는 도로시는 수치심에 콱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나 의외로 홍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혹시 뭘 쏟았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 행복회로를 돌리던 도로시의 산통을 깨듯 홍유리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뭐 해? 냄새나니까 갈아입고 오지?"

삐걱거리는 문을 억지로 닫은 홍유리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도로시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알고 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침대에는 얼룩이 없었으니 누가 옮겨주었다는 뜻. 십중팔구는 홍유리이리라.

그에 비참해진 도로시는 시야가 멀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겪었다. 수치심이 몰려와 비참해지니 갈아입을 기력마저 사라져 이젠 그냥 죽고 싶어졌다…….

도대체,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머리칼을 헤집으며 다시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려던 도로시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그래서는 안 된다고 뇌가 거부하는 것만 같다. 그걸 떠올려선 안 된다고 불길함이 엄습해왔다. 가까스로 침대를 짚고 일어난 도로시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고 홍유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도로시를 찾아오는 게 좋을 리 없었지만, 알파가 부탁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하려는 일은 인류의 비원과도 같은 것. 역병과 질병의 끝을 알파는 직접 이루려고 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말리기는 했지만… 알파는 멈추지 않았고, 그를 멈출 수도 없었다.

화산각룡을 앞두고도 그랬듯이. 인류의 비원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비록 그게 저 싸가지에게 협력을 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홍유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스퀘어에서 알파의 존재를 아는 마법사는 넷뿐이었으니까.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인 도로시가 협력한다면 일은 훨씬 더 진척될 터.

그걸 위해 일단, 교섭 재료도 들고 왔으니까. 홍유리는 도로시가 나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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