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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60화 (160/407)

〈 160화 〉 #65 약속

갈아입고 나온 도로시는 테이블 반대편 의자를 가리키는 홍유리를 보곤 기가 찼다. 주객전도도 유분수지 이건 완전…

한 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자신은 저런 왈가닥이랑은 달리 스퀘어의 후계자였으니까. 마법사들의 정점에 오를 자로서 기품을 가지지 않으면…

"갈아입은 거 맞아? 창문 좀 열지?"

코를 막으며 인상을 쓰는 모습에 도로시는 마력을 끌어올리려다 홍유리가 흔드는 붉은 병에 흠칫 멈추고 말았다.

"힘자랑하지 말고 앉지?"

하, 힘자랑은 누가 했었는데? 말만 나눠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지만, 무시하고 마력을 끌어올리기엔 병 속의 내용물이 너무 신경 쓰였다.

자신이 가진 안목이 그 물건이 절대 범상치 않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일단 이야기만 들어보는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거야. 그다음엔 정말로 버릇을 고쳐주겠어.

그리 생각한 도로시는 속을 가라앉히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래서 그녀는 보지 못했다. 홍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유리병의 마개를 잠깐 열자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너, 너 설마?"

"왜? 아닐 것 같아?"

"그럴 리가…!"

착각이 아니라면 황홀을 불러일으키는 이 농후한 마력의 향은 분명 용혈이었으니까. 하지만 용혈을 가진 진짜 용이 대체 얼마나 있다고?

홀린 듯 다가오는 도로시를 손을 들어 제지하곤 곧바로 마개를 닫았다.

"조, 조금만! 잠깐 확인만!"

조그마한― 10cc밖에 되지 않는 정말 조그마한 시약병이었지만 거기 들어 있는 용혈은 마법사에게 있어 더 없는 유혹이었다.

용의 피는 그 자체로 마력을 늘릴 수 있는 영약이기도 하지만 마법진이나 물건을 제작하는 데도 용이하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신비를 품고 있어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하고 수요가 많다.

물론 용은 대부분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어 한 마리를 잡으면 많게는 수십 톤에 달하는 피가 나오기는 하지만, 진짜 용혈을 가지고 있는 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

하물며 그 대부분은 A클래스 헌터에 상응하거나 혹은 훨씬 상회하는 데다가 던전에서도 극히 드물게 발견되기에 일단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거기다 싸우는 중에 유실되는 경우가 많아 불순물 없는 순수한 용혈은…

"조, 조금만! 조금만!"

끈질기게 매달리는 도로시를 밀친 홍유리가 턱도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미쳤냐?"

막말로 날개 달린 용이라면 날개를 펼쳐 도망치기만 해도 잡을 수 없다. 스퀘어에서조차 용혈의 잔량이 많지 않을 정도로. 허나 그렇다고 후계자인 도로시가 고작 10cc 남진한 용량의 용혈에 눈을 붉힐 정도냐 하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이 용혈에서는 여태 맡아본 적 없는 강렬한 향이 난다. 분명 최고급 품질의… 어쩌면 대마력까지 가지고 있는 용일지도 모른다. 좀 더 확인하고 싶었지만, 비릿한 미소를 띠고 있는 홍유리를 보니 그렇게 해 줄 것 같지가 않다.

낚인 물고기를 보는 듯한 표정은 열받지만 이건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도로시는 이를 갈았다. 헌터로 굴렀다더니 마냥 허송세월은 아니었는지 귀품을 가지고 있지 않나.

"…뭘 원해?"

"별로?"

"자랑하려고 꺼낸 건 아닐 거 아냐."

네가 그럴 성격은 아니지 않느냐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에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평소 하던 거나 열심히 해보자는 건데?"

"……평소 하던 거?"

순간, 홍유리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갑자기 정색하는 모습에 도로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슬슬 끝내고 싶지 않아? 역병과 질병… 지긋지긋하잖아."

"……?"

도로시는 '얘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어이없어했다. 그게 안 되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50년이나 발버둥 치고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러고도 잡을 수가 없어 전선이 자꾸 밀리는 거였고.

근데 난데없이 꺼낸 말이 뭐? 역병과 질병이 지긋지긋하다고? 진심으로 꺼내는 말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진 몰라도 생각은 있다는 것. 일단 들어보기로 해 잠자코 있자 홍유리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도로시 자신을 시작으로 스퀘어의 마법사들에게 협력받을 거란 것. 알파의 존재는 공표할 수 없지만 해야 할 일은 평소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질병과 역병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떨어뜨려 놓을 것. 알파가 역병을 상대하는 동안, 질병을 향해 가능한 한 마력을 쏟아부어 시간을 벌 것.

"잠깐만.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뭐가."

여기까지 이해 안 될 부분이 있었나?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도로시를 쳐다보았다. 얘기하는 도중에 말을 끊어먹은 낯짝을 보자니 괜히 한 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어졌다.

"하기 싫음 말든가. 그럼 그냥―"

용혈을 품속에 집어넣는 뻔한, 명백한 도발적인 제스쳐에 황급히 손을 뻗은 도로시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 아까부터 말하는 알파가 대체 누군데?"

"뭐? 아…"

그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알파라는 이름은 여명에서 멋대로 붙인 거였으니까. 아가일을 죽인 알파라는 마랑에 대한 소문은 퍼져있더라도 그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리 생각한 홍유리가 눈치를 주었지만, 그래도 알지 못한 건지 갸웃거리는 도로시에게 홍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에 눈치도 없는 년.'

물론 자신의 경우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일단 같은 경험을 했던 이상 배려해주려 했는데 눈치를 줘도 모르면 말로 하는 수밖에 없지.

"누구긴 누구야? 너 지렸잖아."

"……뭐?"

"뭐가. 너 걔 보고 질질 싸서 까무러쳤잖아 이 등신아.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잠깐, 아까부터 뭔 헛소리야?"

또 말을 끊은 도로시. 모르는 척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모르면 그건 눈치의 영역이 아니라 지능의 영역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이 싸가지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던가? 뭔가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것 같다.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 오줌까지 지린 주제에?

그 위화감을 더듬어 간 홍유리는 곧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억상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어 보인다. 싸가지 꼴 좋다고 비웃고 싶은 맘이 없지는 않지만… 어떤 근육 뇌를 떠올리곤 그냥 한숨만 쉬었다.

"됐으니까, 네가 할 일은 영감탱이한테 말이나 전하라는 거야."

"……."

"어차피 할 건데 열심히 좀 한다고 손해볼 거 없잖아."

그렇게 말한 홍유리의 눈 밑이 다소 퀭해 보인다. …그래. 열심히 한다고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겨우 그 정도 일로 용혈을 받는다면 남는 장사다.

하지만 홍유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같은 병을 두 개나 더 꺼내자 도로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인디고랑 옐로우. 거길 설득하는 걸 도와주면 이것까지 전부 다 네 거야."

어떡할 거냐는 눈빛에 침을 삼킨 도로시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끄덕였다.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렬한 유혹. 알파라는 게 뭘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결국 해야 하는 일은 역병과 질병을 향해 마법을 퍼붓는 것. 평소보다 조금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바뀌는 건 없다.

기껏해야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말하는 정도… 의견을 피력하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다.

비록 홍유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꼽긴 하지만… 도로시는 군침을 삼켰다.

곧 10cc 용량의 유리병 세 개를 받아들고 희희낙락 좋아하는 도로시의 모습을 보고 홍유리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무한 리필 가능하단 걸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싶어서.

***

"선생님?"

벌써 오셨나? 노크하는 소리에 백소율은 문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랐지만, 덕분에 인지할 수 있었다. 늑대가 은신하고 있단 걸 확인하고 백소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놀랐어요."

자리를 비운다는 말은 했었지만, 거의 이틀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아예 떠나버린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늑대를 보고 안심한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리는…?"

"잠깐 사정이 있어서 환계에. 금방 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항상 지켜봐 온 백소율은 늑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옆에 없다는 것만으로 그를 흔들리게 하는… 그게 부러웠다.

손을 뻗어 강아지 모습의 그를 들어 올리자, 이젠 그도 익숙해졌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것뿐. 그가 스퀘어를 떠나게 되면 한동안 만나지 못할 거다. 그러기 전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

"할 말이요?"

"계속 스퀘어에 남아 있을 생각인가?"

갑작스러운 질문. 아까 생각했던 것과 겹쳐 그가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 마음을 누르고,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고."

아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늑대가 숨을 뱉었을 때, 백소율은 상반되게도 기쁨을 느꼈다. 그가 자신과 떨어지는 걸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곧 늑대는 진지한 어조로 낮게 말했다.

"그럼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건 원래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 물론 전부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애초에 만상의 주인이 정말 진심이라면 그 모든 건 쓸모없는 것이 될 테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이 방법뿐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늑대는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다.

만상의 주인을 조심하라는 것. 머잖아 역병과 질병을 토벌할 셈이며 그와 관련해 요정용들이 오게 될 것이란 점. 그러니 그들 중 한 마리와 함께 하라는 것.

만상의 주인에게 벗어날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건 환계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으니까. 혹시라도 그녀를 보게 되면 망설임 없이 벗어나라는 것.

"만상의 주인이요?"

"이 스퀘어의 지배자를 말하는 거다."

또한, 최초의 스퀘어인 블랙 스퀘어의 마스터. 세간에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있지 않고 설령 그녀를 알고 있더라도 그 실체를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으리라.

애초에 스퀘어에서 살아가는 마법사들의 대부분은 블랙 스퀘어의 존재도 모르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오직 그녀 혼자만의 계파였으니까.

스퀘어의 모든 마법사와 싸우더라도 그녀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거다. 역병과 질병조차 단순한 변덕으로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터.

그리고 그건 백소율 또한 마찬가지다. 만상의 주인이 여기 있는 한,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마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다.

애초에 그녀의 선택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만상의 주인이 그럴 생각만 있다면 인류는 지금 당장이라도 멸망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스퀘어의 지배자가 탕아들의 수장이라는 말에 백소율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여기 있는 건 위험하다는 거다."

"……."

"선택은 네 몫이다."

그 말에 고민하던 백소율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래도…"

그건 평생을 괴롭힌 악몽. 자신이 마녀가 되어 타인을 죽이는 꿈.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녀에게 있어 그 주체가 여기에 있단 건 더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래. 두려움이었다. 이젠 그게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다. 불안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몇 번이라도 구해주실 거잖아요?"

그가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한 점의 가식조차 없는 미소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늑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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