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66 협력
레드 스퀘어 마스터, 아스터는 두 제자를 앞에 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둘이 함께 왔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건만 꺼낸 말은 그보다 더하다.
역병과 질병을 죽이겠다는 건 사실 그리 이상한 말은 아니다. 그건 수십 년이나 이어진 인류의, 스퀘어의 비원이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수십 년이나 이어지는 동안 죽일 수 없었기에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게 되었을 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그게 절대 쉽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굳이 말한다는 건 그만한 방법이 있단 것이리라.
그리고 십중팔구 그 방법이란―
"그 존재와 관련 있는 것이더냐?"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닌 위대한 마법사로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존재. 잔재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감히 업신여길 수 없는 불길함의 상징과도 같은 괴물. 분명 그가 관련되어 있음이리라. 십중팔구 홍유리가 여기까지 그 존재를 데려온 이유가 질병과 역병의 말살에 있다는 거다.
"네."
망설임 없는 즉답에 아스터는 길게 한숨 쉬었다.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간단하지 않았을 테니까.
"……"
그 불길한 존재의 협력을 얻는 대가로 대체 무엇을 바쳤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존재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질끈 눈을 감은 아스터는 이를 악물었다. 감정을 내려놓고 마법사의 눈으로, 머리로 계산했다.
그 어떤 대가를 바치더라도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설령 그것이 제자의 목숨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일지라도.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결국, 역병과 질병을 막지 못한다면 인류는 언젠가 멸망하고 말 테니.
아스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홍유리와 특히 도로시의 표정이 밝게 환해졌다. 스퀘어 마스터인 아스터가 돕는다면 다른 스퀘어를 설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
백소율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며 홍유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건 몰라도 스퀘어의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것만은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완연한 밤이 되어 홍유리가 돌아왔을 때, 늑대는 빤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쳐 보이는 표정에 실패했나 싶었던 늑대는 곧 지친 듯한 표정의 입꼬리가 올라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변하자 작게 감탄했다.
고작 이틀 만에 얘기를 끝냈다는 건 그녀의 수완이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으니까.
"뭐, 사실 아직 끝난 건 아닌데… 그렇게 봐도 상관없을 것 같네."
아닌 것처럼 재는 말투에 늑대는 픽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라면 문제는 없으리라. 다만 불안한 점은 역시 만상의 주인. 그녀의 존재일 뿐. 홍유리의 말에 반대 의사를 내비치기라도 한다면 여론은 순식간에 반전될 거다.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고 대응하기도 어렵다.
물론 가능하면 그런 일이 없는 게 제일이지만… 역시 모든 방면에서 불합리한 존재.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스퀘어의 도움이 없다면 결국, 싸움은 성립하지도 않을 터. 여기까지 와서 일을 수포로 만들 순 없다.
고민하는 늑대에게 홍유리는 2층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것보다 너 듣긴 했어?"
"……?"
"쟤. 얼마 안 있으면 스퀘어로 들어갈 거야."
백소율을 말하는 것이리라. 늑대는 잠자코 홍유리의 말을 들었다.
"퍼플 스퀘어. …괜찮겠어?"
걱정이 서려 있는 목소리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건 결국 환영의 나비는 죽지 않았다는 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상의 주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환영의 나비라면, 백소율과 비슷한 처지의 그녀라면 오히려 안심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퍼플 스퀘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스승인 홍유리를 따라 레드 스퀘어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으니까.
"존나 당돌하더라."
그 의문에 홍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퍼플 스퀘어 후계자가 공석이니까 지가 먹겠다던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늑대도 마찬가지로 실소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닌가. 확실히 결심하긴 한 모양. 아가일이 죽은 뒤, 퍼플 스퀘어의 후계자는 쭉 공석인 게 사실이긴 했으니까.
그 길이 절대 쉽지는 않을 거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퍼플 스퀘어의 모든 마법사의 정점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허나, 마녀라고 불렸던 그녀라면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알고 보면 쟤도 정상은 아니야. 근데 요정용은?"
항상 같이 다녀서 그런 건지 둘 다 페리의 부재를 묻는구나 싶었다.
탈피 중이라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홍유리는 눈을 끔뻑거렸다.
"탈피…?"
용도 그런 걸 하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따지고 보면 파충류에 가까울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홍유리는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늑대가 요정용에 대한 일을 허투루 했을 리 없으니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그래서, 역병과 질병이 움직일 기미는 있나?"
스퀘어 마법사들의 마법은 군세의 진격을 막아냈고 일시적으로나마 역병을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장애물에 가로막혀있었으나 역병의 여파, 무리는 다시 걸어 진작에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귀를 기울이면 적어도 늑대에겐 전쟁과 같은 총소리가 똑똑히 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저번 침공에서 인디고 스퀘어의 대처가 빨라 테헤란을 완전히 버리진 않아도 됐다는 점일까.
"…역병은 보이는데 질병은 안 보여."
상처 입고 물러난 역병의 위치는 포착할 수 있었지만, 질병은 찾지 못했다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병의 습성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어차피 최악의 경우― 둘이 함께 출현했을 경우를 상정한 거였으니 질병이 나타나건 나타나지 않건 달라질 건 없다. 나타나지 않으면 그걸로 좋고 나타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이니까. 다만 스퀘어의 마법사들이 협력하기를 바라며 늑대는 잠자코 그때를 기다렸다.
***
레드 스퀘어의 말은 곧 다른 스퀘어에도 전해졌고, 필연적으로 이 부유섬의 주인 또한 알게 되었다. 가장 높은 곳― 지붕에 앉은 소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료한 듯 내려보는 그녀의 눈에는 보일 리 없는 지상의 풍경이 속속들이 보이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봐왔던 모습. 철조망과 함정. 격벽과 진지를 설치하며 총을 난사하고 폭탄 세례를 퍼부으며 어떻게든 진격을 막기 위해 애쓰는 인류. 이젠 아무 감정도 들지 않을 만큼 봐 왔지만 결국, 모든 결과는 같았으니까.
이번에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는 여태 그래왔듯 포기하지 않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희망은 자신이 불살라질 때까지 끝없이, 덧없이 타오를 거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애초에 지금의 희망은 역병과 질병을 불태울 수 없다. 그녀가 직접 확인한 그는 아직 미약했으니까.
성장은 이뤘으나… 지금 역병과 질병에 맞서는 건 너무나도 이르다.
그럼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그는 실패할 테고, 역병과 질병은 학살을 이어가겠지.
그래. 분명 이번에도 막지 못할 거다. 많은 사람이 죽어갈 테고 부유섬은 좀 더 동쪽으로 움직이게 될 거다.
그들의 발버둥은 아직 발버둥인 채로 남아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래도 나아간다면…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얄팍한 기대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과연 그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
"……."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백소율은 두 눈을 비볐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직 이른 시간… 잠깐 눈을 붙여도 좋겠지만 기지개를 켜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건 오늘은 퍼플 스퀘어로 향하는 날이었으니 미리 준비해 나쁠 건 없을 테니까.
…이제 정말로 알파와 헤어질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울적해지는 것 같다.
종종 페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와 떨어지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한숨 쉬는 동안 대강의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백소율은 의외의 광경을 보았다.
말소리가 들리길래 선생님과 알파겠거니 했지만 거기 있는 건 붉은 머리 소녀가 아니었다.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처음 보는 사람… 다소 지친 모습의 여마법사가 알파와 마주 앉아있는 모습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는 사이, 알파가 자신을 발견하곤 촉수를 흔들자 백소율 또한 손을 흔들어왔다.
그 모습이 새삼 귀엽게 보여 백소율은 웃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중증이었으니까.
알파의 행동에 따라 마법사의 시선 또한 자신을 향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잘 보니 저번에 잠깐 인사를 나눴던 퍼플 스퀘어의 마법사… 분명 아넬라 모레스트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한 걸까? 붉은 눈시울과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한 그녀가 생긋 웃었다.
"백소율. 맞나요~? 내가 기억하기론 그런 이름이었는데."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넬라님."
"기억해 준 건가요? 기쁘네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퍼플 스퀘어로 올 생각이라고요?"
"네."
눈초리를 좁힌 아넬라는 비음을 흘렸다. 그런 성격으론 보이진 않는데 대답에 망설임이 없으니까.
과연 호부 아래 견자 없다는 걸까? 진홍의 제자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호출을 받았을 때, 퍼플 스퀘어로 오려는 이유도 들었다. 후계자 자리를 가지기 위해… 참 당돌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허나 그게 마냥 허언은 아니리라. 백소율이라는 소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전신에 충만한 마력은 그녀의 나이에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력량 하나만큼은 자신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으니까. 기량은 몰라도 역량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러브 콜을 보낸 것도 자신들 퍼플 스퀘어였으니 그녀의 가입을 거절할 명분은 없다. 물론 그럴 이유도 없고.
고개를 주억인 아넬라는 승낙의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퍼플 스퀘어는 당신을 환영할 거예요. 잘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꺾으며 손을 잡는 모습에 아넬라는 보이지 않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확실히 스승인 홍유리와는 다르긴 한 모양. 늑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넬라는 기껍게 그녀의 가입을 환영했고 그렇게 아침은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