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66 협력 (2)
광장에 서자 아넬라로부터 자색 마력이 흘러나왔다. 백소율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날이기도 하고 절차도 밟아야 하니 잠깐 따라 오겠냐는 말에 끄덕여 따라간 곳이 여기였으니까.
"왜요~? 그리 다를 건 없을 텐데."
물론 도시의 풍경은 그리 틀리지 않다. 하지만 성이 있다는 점과 붉은 도시가 자색으로 물들어 한층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신비… 사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곳에서 살다간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다.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굳이 도시의 정경까지 스퀘어의 컬러에 맞출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이 정도면 길도 헷갈릴 것 같은데…
그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 것인지 아넬라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쩔 수 없어요. 그거 아시나요? 마력이 색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
"그래서 자색 마력을 다루는 퍼플 스퀘어를 보라색으로 물들일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게 효율이 훨씬 더 좋으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 아시겠나요?"
"……네."
미묘한 표정으로 백소율이 끄덕이자 아넬라도 마주 끄덕였다.
"그럼요. 마법진도 아니고 색칠놀이로 마력에 영향을 줄 리가 있나요. 소율 양은 참 영리하네요. 앞으로도 그딴 개소리들은 다 무시하세요. 저도 볼 때마다 영… 쯧."
멍한 얼굴이 된 백소율이 쳐다보자 아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곤해보이던, 눈시울이 젖었던 자색 마법사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종 잡을 수 없는… 조울증 환자처럼 변한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다들 이미 병을 앓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른 스퀘어로 가는 걸 잠깐 고민하자 아넬라는 헛기침과 함께 백소율의 팔을 끌었다.
"자, 이제 곧…"
익숙한 길로 걷던 아넬라는 이마를 짚었다. 둘의 시야에 보인 것은 무너진 건물이 잔해가 되어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모습에서 이상하게도 백소율은 어쩐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
"아~ 이러면 돌아가야겠네."
혀를 내밀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에 대충 주억인 백소율의 시선은 무너진 잔해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
의자 다섯개가 놓인 비어 있는 테이블. 그러나 앉아 있는 사람은 여인과 노인 둘 밖에는 없다. 인디고와 레드 스퀘어의 마스터만이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아스터는 비어있는 세 자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만상의 주인이 오지 않을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그러려니하겠지만, 지금 스퀘어에 없는 옐로우 스퀘어 마스터만이 아니라 환영의 나비까지 불참할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들은 게 있소?"
"아뇨. 하지만 소문은 들었지 않나요?"
"……."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말. 이미 30분이나 더 지났거늘 나타나지 않는 건 정말 사실이라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단 둘이서 회의를 진행하겠다는 건 어불성설. 결국 자리가 파토나는가 싶었더니, 자색 나비가 날아왔고 곧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말 없이 앉은 그녀의 모습에 아스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왔구려."
무표정한 얼굴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일견 평소와 다를 거 없는 모습. 그러나 겨울의 주인은 떠보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퍼플 스퀘어에서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수습은 되셨나요?"
별 거 아닌 투로 하는 말이었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스퀘어 안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리 함구시킨다고 해봤자 모든 입을 막을 수는 없다. 당연 이야기는 새어나가기 마련.
사소한 일도 아니고 마랑과 스퀘어 마스터의 싸움. 그런 사건이 퍼져나가지 않을 리 없으니까. 미미하게 눈가가 찌푸려진 환영의 나비를 보고 놀란 건 오히려 겨울의 주인이었다. 그 표정이야말로 소문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 싸움에서 패한 건 환영의 나비였노라고.
스퀘어 마스터가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스퀘어에서 패배했다는 믿기 힘든 말. 환영의 나비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더하다.
정적과 침묵이 내려앉은 그 때, 아스터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대들을 모은 건 다름 아니라 역병과 질병 때문이오."
"움직였나요?"
"아니오. 오히려 그러길 바라고 있지."
"……."
"이번에야말로 역병과 질병을 끝낼 기회요. 부디 그대들이 협력해줬으면 좋겠소."
"그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건가요?"
겨울의 주인이라고 모를 리 없다. 도로시와 홍유리에 의해 이미 말은 전부 전해진 뒤였다. 자신의 후계자에게 무슨 바람을 집어넣었는지 몰라도 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ㅡ 십중팔구는 환영의 나비를 쓰러뜨렸다는 마랑의 도움을 받아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리겠다는 말을.
그래. 몬스터와 협력해 몬스터를 죽이겠다는 그 허무맹랑한 말.
하지만 여기까지 오니 마냥 허언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실제로 그런 전적이 있었으니까. 네버랜드의 일은 이미 스퀘어에서도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환영의 나비와 마랑의 소문까지. 그게 사실이라면 마랑은 그럼에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게 되니까. 협력을 생각할만한 지성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그리고 마랑은 아직도 스퀘어 어딘가에 숨어있으리라. 한데도 찾을 수 없다는 건 분명 누군가가 마랑을 돕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그 말을 꺼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마랑과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겨울의 주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이었나요? 마랑을 감추고 있는 게."
싸늘하게 변한 목소리는 시인하기만 하면 곧바로 마법이라도 영창할 것처럼 차가웠다. 눈보라는 사람을 가려 몰아치지 않는다. 갑작스래 돌변한 태도에도 아스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
"내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알지 않소? 그녀라면 몰라도."
빈 자리를 보는 아스터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 있었다. 스퀘어 마스터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녀에게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아니 무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쩌면 역병과 질병을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문조차 차오르고 있다.
수십년 전, 그녀가 처음으로 인류에 마법이라는 기적을 알리고 퍼트렸을 때, 인류는 기적을 맞이했다. 어쩌면 멸망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차올랐으나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 됐다.
실제로 많은 몬스터들을 막아낸 건 맞았으나, 그럼에도 불가능은 남아있었으니까.
자색의 흑호는 쓰러뜨리기는 게 불가능했다. 바다의 재앙에 이르러서는 그 존재 하나로 인류는 사실상 바다를 포기해야만 했고. 심지어 십수년 전에 나타난 네버랜드는 아직도 클리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직접 움직였다.
허나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병과 질병은 유럽을 멸망시켰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법사들은 배움을 더해갔고 스퀘어는 체계가 생겼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녀가 움직이는 일 또한 적어졌다. 아니, 지금에 이르러서 만상의 주인은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스퀘어 마스터라고 불리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녀의 한계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법을 익히고 마력이 늘어갈수록 점점 더. 이제와서는 이해할 수 없게 됐다. 만상의 주인은 정말 역병과 질병을 막을 수 없었던 걸까?
어쩌면 그럴 수 있음에도 내버려 둔 게 아닐까. 마치 조절하는 것만 같았다. 인류가 멸망해가는 속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가지면서도 감히 의문을 표할 수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에. 만약에 그렇다고 시인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몰랐으니까.
따라서, 이번엔 그녀의 의중을 알아볼 기회가 되리라.
정말 그러한지 아니면 그러하지 않은지.
―인류는 불가해의 손아귀 위에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그리하여, 나는 그대들이 협력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어찌되었건 이번은 흑백을 가릴 기회이니. 게다가 해야 할 일은 어차피 달라지지 않으니까."
마법으로 역병과 질병을 상처입히고 물러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 여전하다.
이번엔 그 마법을 좀 더 많이, 확실하게 사용할 뿐. 역병과 질병을 갈라놓는다면 마랑은 상처 입은 역병을 물어뜯으리라.
그럴 수 있다면 지긋지긋한 역병과 질병을 끝낼 수 있는 더없는 기회였고, 그러지 못하더라도 아쉬움이 있을 뿐 그들이 손해보는 건 없다.
셋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아스터의 깊은 눈이 두 사람을 담았다.
두 눈을 감은 겨울의 주인과 여전히 무표정한 환영의 나비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 전, 갑작스레 터번을 쓴 젊은 사내가 들어오자 아스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빨리 오지 그러셨는가."
"죄송합니다. 이제야 일이 마무리 됐군요."
자리를 비웠던 옐로우 스퀘어의 마스터― 만상의 주인을 제외한 각 스퀘어의 마스터가 마침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
다시 일주일이 지나 보급을 위해 지상에 내려선 부유섬. 홍유리와 그림자에 숨어 밖으로 나온 알파는 인류의 전선― 철조망과 울타리. 급히 만든 진지가 있는 곳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피와 화약이 섞인 전쟁의 냄새. 먼 곳에서도 보이는 참혹한 광경. 놈들이 걸어온 땅이 변색하고 물들어간다.
폭음이 터져 귀가 먹먹해진다.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 막고 있으나, 무리는 점점 가까워져온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늑대의 눈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무리 속에서 수많은 대마법을 그 몸으로 직접 받아낸 그것은 조용히 잠들어있는 듯 보였으나 순간, 눈을 번뜩였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고서. 그 먼 거리에서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눈을 감은 건 역병이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역병은 시선의 주인― 늑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아서.
물론, 역병에게 지성은 없다. 오로지 본능으로 살아가는 짐승이나 그렇기에 그 감은 어지간한 지성을 훨씬 웃돌아 있다. 늑대는 자신이 무시당했음을 알았으나 거기에 불쾌한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주기만을 바랐다. 무시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될 미약한 존재로 기억되기만을 바랐다.
―그래야만 놈의 목덜미를 물어 뜯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만족해?"
물론, 홍유리의 눈에는 역병이 보이지 않았다. 회색 연기와 무리들만이 철조망 너머로 보이고 있을 뿐. 늑대가 보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
하지만 늑대가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선홍색 눈동자가 자신을 보는 중에 늑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병은 보았고 혜견은 역병을 읽었다. 괴물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지만 승산은 0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늑대는 한숨 쉬었다.
역시 역병이 읽을 수조차 없었던 만상의 주인에게 닿기엔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그리고 질병만큼은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놈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탐지까지 사용했음에도 찾을 수 없다. 늑대가 느낄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거나 혹은 탐지조차 무시할 만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어쩌면 자신이 가진 비가시화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스킬을. 그게 불안요소였으나 어차피 함께 나타날 걸 상정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래. 역병은 머잖아 움직일 거다. 놈의 눈동자에 들어찬 광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늑대는 조용히 그 때를 기다렸다. 놈의 목덜미를 물어 뜯어 결국엔 먹어 치울 그 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