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67 전조
확인하고 싶은 것들은 거의 다 확인했다. 마지막에 역병의 모습도 확인했고, 폭약과 탄알을 쏟아부어 무리를 쓰러뜨리고 잠깐의 소강상태에서 오염된 땅을 밟은 것까지. 딱 하나 아쉬운 거라면 질병을 보지 못한 거였지만.
생명이 살 수 없는 오염된 땅― 독 내성이 살짝 올랐을 뿐 별다를 건 없다. 이 오염조차 따지고 보면 여파의 여파에 불과한 셈이지만, 이 정도라면 역병과 직접 싸우더라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다.
완화는 오염을 막았고 재생은 늑대의 상처를 회복시켰다. 공허와 잠식으로 오염된 땅마저 먹어 치울 수 있단 것까지 알게 됐으니 망설일 건 없다.
보급으로 내려앉은 섬이 다시 떠오르자 늑대는 스스로를 점검했다.
[남은 스킬 포인트 37]
달성 조건이 환영의 나비를 쓰러뜨리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만상의 주인에게 살아남는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기어이 30레벨에 도달했다.
얼추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30레벨에 도달했음에도 진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그 루트조차 공개되지 않았다는 건 40레벨 어쩌면 50레벨까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허나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진화 또한 중요하지만, 턱없이 업이 부족한 지금 어차피 진화하기에는 요원할 테니까.
결국 더 많은 재앙을 몰아내고 멸망을 막아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레벨은 자연스레 따라올 테고. 역병과 질병은 그 초석이 될 터. …사실 불안이 없지는 않다.
스컬 울프에서 0.1%. 음영랑에서 1%. 지금의 먹어치우는 자가 되면서 10%를 소모했으니까. 여태까지의 페이스라면 100%의 업이 소모될 터. 어쩌면 앞으로 진화라는 것 자체가 없는 건 아닐까 하고.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시스템, 단세혁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민은 진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먹어치우는 자가 되기 이전부터 쭉 쌓아왔던 스킬 포인트는 A등급 스킬을 획득하고도 남음이 있다.
만상의 주인에겐 닿지 못하더라도 역병에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스킬을 획득해야 할까? 한 번 스킬을 가지게 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신중함, 망설임에 담긴 건 욕심이기도 했다. 당시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아가일의 검은 장미에 맞섰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것에게 의지했을 때.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등급 불명의 스킬, 흑린. 아가일의 대마법이었던 검은 장미를 순식간에 불사르고 강욕을 없앤 칠흑의 불꽃. ―그조차 일부에 불과하리라 여겨진 전능감마저 선사했던 절대적인 힘.
어쩌면 그와 같은 힘을 가진다면 만상의 주인에게 닿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래서 망설여졌다. 아직 목록에 등급 불명의 스킬은 찾을 수 없지만, A등급의 상위라고 한다면 최소한 64개의 스킬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말일 테니까.
이번에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게 되면 가파른 경험치 곡선과 맞물려 두 번 다시 그럴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림자 속에서 다시 무리가 짓쳐들어오는 게 보이자 늑대는 긴 숨을 내뱉었다. 계단을 오르는 홍유리의 발걸음 또한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참상은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혔으니까.
"아마 오늘 결정 날 거야."
"……."
"거의 되니까 안심해…"
혼잣말과 같은 말. 마치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말에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 말했다면 그러리라 믿을 뿐. 스퀘어의 협력만 얻으면 언제라도 나설 수 있을 테니까.
***
자색 도시를 한껏 둘러보며 백소율은 아넬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후계자는 아니라고 하나 태생이 스퀘어였으며 거의 평생을 살아온 나비의 혈족은 그 스스로가 뛰어난 자색 마법사였기 때문에 퍼플 스퀘어의 마법에 대해 해박했다.
궁금한 점을 쏟아내듯 물어도 막힘 없이 답하는 모습. 평소 여유롭고 장난치는 듯한 태도와는 달리 그 실력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배기.
어디까지나 그녀의 동생인 아가일이 규격 외였고, 환영의 나비, 어머니의 눈이 높았을 뿐. 재능이 없다고 해봤자 어차피 기준이 그 둘이라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마법사를 제외하곤 죄다 재능이 없는 거였으니까.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만큼 아넬라는 궁금해했다.
진홍의 제자에다가 당돌하게도 퍼플 스퀘어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 소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뭇 마법사들이 그렇듯 재능이라는 벽 앞에서 자신처럼 뼈저린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닌지. 아니면 그조차 넘어서 정말로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둘은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멀찍이서 나비의 성을 구경했다. 먼 곳에서 나비의 성에서 아까 보았던 잔해와 같은 위화감조차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
멍하니 올려다보는 백소율의 시선을 따라간 아넬라는 쓰게 웃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성. 시선이 꽂힌 곳은 자신이 갇혀 있던 곳. 알파가 먹어 치워 어머니께서 만들어내신 현실에 한없이 가까운 환상이었으니까.
자신이라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놓쳤을 정도로 정교하다. 단순히 감이 좋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력에 대한 논할 수 없는 끔찍한 재능이 이 소녀에게는 있다. 자신에게는 없는 특출난 재능이 말이다.
"부럽네."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이제 돌아가야죠? 소율 양 스승님이 걱정하시겠네~."
아넬라가 웃으며 하는 말에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퍼플 스퀘어로 소속이 변하게 된 이상,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주지마저 퍼플 스퀘어로 옮겨질 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나비들이 흩날리자 둘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1명 불참. 그 외 전원 찬성이라는 결과를 끌어 냈다는 소식에 늑대는 기껍게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리는 건 바라는 바였을 테니까.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기는 했다.
만상의 주인이 나서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는 반면 마찬가지인 불안이 있다. 혹시라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좀 더 시간이 흘렀을 때, 백소율이 돌아오고 겨울의 짧은 낮에 따라 어둑어둑해지자 부유섬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홍유리는 백소율에게 물었다.
"어땠어?"
퍼플 스퀘어에 갔던 감상을 묻는 말. 그에 잠깐 생각하던 백소율이 이내 답했다.
"…어지러울 것 같았어요."
도시 여기저기서 느낀 위화감이 한둘이 아니다. 현상이 아니라 환상을 다루는 만큼 퍼플 스퀘어의 마법은 여타 스퀘어와는 결이 다르다. 한 발자국 잘못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자색 마법은 절대 간단하지 않으니까. 환상에 환상을 품었다간 환상 속에서 돌아오지 못하리라.
아넬라 모레스트.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렵고 힘든 길. 환영의 계파야말로 최악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노력하지 않으면 알파와 함께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해보고 싶어요."
강한 결의가 담긴 말에 홍유리는 내심 기꺼워하며 끄덕였다.
"퍼플은 모르겠는데, 이제 여기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이틀? 여기서 할 일만 끝나면 나랑 쟤는 갈 거고. 넌 여기 남게 될 거야."
홍유리는 늑대를 향해 턱짓했다. 스퀘어에 돌아온 것 자체가 알파의 부탁 때문이었으니 더 여기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또한 백소율이 퍼플 스퀘어로 들어가게 된 이상 자신이 가르쳐줄 건 이제 없다. 부디 그 다짐이 흐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지.
"그러니까…"
홍유리는 유리병 하나를 품속에서 꺼냈다. 두말할 것 없는 알파의 용혈. 고개를 돌렸을 때, 촉수를 둥글게 말아 동그라미를 나타내는 모습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떠나기 전에 백소율에겐 용혈을 건네줄 생각이었으니까. 그것이 그녀의 성장을 가속시킬 수 있다면…
"이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마지막이야. 따라와."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며 홍유리는 백소율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주의시킨 홍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설명은 끝났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곧 알게 됐을 거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직접 겪어보는 게 아니면 모르는 법. 긴장으로 굳은 표정을 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연다?"
"네."
용혈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인삼과 같은 영약이 아니라 이것은 생물종 꼭대기에 있는 존재의 피. 희석할 수도 없거니와 정해진 양 이상을 마셨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끔. 알파의 마력에 집어 삼켜지지 않게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양을 반드시 조절해야만 한다. 그에 관한 방법을 이미 알려준 홍유리가 병의 뚜껑을 열었다.
스퀘어의 후계자인 도로시조차 눈이 돌아가게 했던 대마력을 가진 알파의 용혈. 향이 퍼지자 백소율의 눈이 몽롱해지고 초점이 흐려졌다. 상기된 얼굴로 홀린 듯이 손을 뻗어오자 일그러진 표정의 홍유리가 그 손을 탁 쳐냈다.
"내가 뭐라고 했어?"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백소율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모르는 사이에 마력에 관한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었던 걸까? 이걸 받아들이는 게 절대 쉽지 않을 것 같다.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개에 손을 가져갔다. 역시 너무 일렀던 걸까? 제어할 수 없는 마력은 없으니만 못하다. 오히려 마력의 재능이야말로 걸림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만― 용혈을 받아들이는 건 다음 기회에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홍유리는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힘에 고개를 돌렸다.
"놔. 어차피 지금 너한텐…"
"할게요. 할 수 있어요."
"너 이거 마시지도 않았어. 알아?"
"…할 수 있어요."
"더 말 안 해. 난 경고했어. 닥치고 놔."
"선생님. 제발요."
끈질기다고 손을 쳐내려던 홍유리는 백소율의 머리가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
"……부탁드려요. 도와주세요."
"왜? 대체 왜? 너도 알잖아. 너 빠르다니까?"
스스로 모를 리가 없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와 있는 거였으니까. 다른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백소율의 성장은 빠른 편이었다. 하물며 보유한 마력량은 어지간한 마법사를 뛰어넘어있을 만큼이나. 그건 상식을 뛰어넘은 성장속도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조급함을 느끼고 있는가 홍유리는 그걸 묻고 있었다.
"그걸로는 안 돼요."
"뭐?"
홍유리의 반문에 백소율은 자색 도시의 풍경을 떠올렸다. 거기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력의 향이, 거기서 느껴지는 마력이 동일했기 때문에.
알파는 분명 퍼플 스퀘어로 향한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무너졌던 도시의 일각은 분명 싸움의 흔적이었다.
알파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었을까? 후계자도 없는 퍼플 스퀘어에서. 게다가 나비의 성에서 느꼈던 위화감은? 자색 나비를 보았을 때, 백소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알파와 싸웠던 건 환영의 나비이리라고. 그러고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건 막연히 자신이 상상하던 것보다 알파는 훨씬 더 멀리에 있다는 거다. 스퀘어 마스터조차 적수가 아니었을만큼.
그의 옆에 있으려면 그만큼 기준이 높아져야만 한다. 만족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 따위는 없다. 두 눈 가득히 결의를 담은 눈에 홍유리는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등신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게 다 의지? 노력? 그딴 걸로 극복할 수 있는 거였으면 죄다 스퀘어 마스터에다가 칠영웅이게?"
"……선생님!"
홍유리는 끝까지 달라붙는 백소율의 팔을 기어이 뿌리쳤다. 그 재능을 믿고 될 거라 여겼지만, 역시 일러도 너무 일렀던 거다. 만약 저걸 마셨다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 운이 좋아도 마력에 취해 중독되었으리라. 가슴이 조금 따끔거리지만 홍유리는 이 판단이 틀리지 않다고 믿었다.
물론, 용혈은 건네줄 거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시간이 더 지났을 때 주도록 하는 게 나으리라. 한숨을 쉰 홍유리는 이마를 짚곤 잡생각을 떨쳐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늑대 또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높게 떠오른 부유섬에서 보내는 밤은 각자의 생각으로 가득했고 그와는 반대로 지상에선 마침내 그것, 역병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