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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64화 (164/407)

〈 164화 〉 #68 유인

깊은 밤. 역병이 몸을 일으키자 무리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졌다. 진격의 속도가 빨라지자 필연적으로 무리를 틀어막는 것도 한계가 찾아왔다.

인간이 역병에 물든 건 그나마 막을 수 있었지만 코끼리나 물소 같은 대형동물 혹은 몬스터가 역병에 감염된 것은 철조망, 울타리, 격벽으로도 막을 수 없다.

신체 능력이 상승한 게 아니라 어지간해서 죽지 않게 되었고 역병을 퍼뜨릴 뿐이었지만,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달라진다.

철조망과 울타리를 향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짐승들. 집중 사격으로도 폭탄을 터뜨려도 막기란 요원하다. 결국엔 충격을 이기지 못한 벽이 통째로 날아가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밀고 들어온 짐승들이 꺼진 바닥 아래로 빠졌다는 것.

미리 파 둔 구덩이. 다소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결국, 놈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큰 의미는 없다.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 서로를 밟아 쫓아올 테니까.

전선이 뚫려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저 먼 곳에서 흩날리는 듯한 긴 꼬리가 눈에 밟혔다. 그것을 목격한 순간, 군은 미리 심어뒀던 폭탄과 지뢰를 전부 격발시키고 곧바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역병의 출현― 설령 전선이 붕괴하지 않았더라도 같은 선택을 내렸으리라.

차량에 시동을 걸고 치누크가 떠오른다. 상공으로 떠오른 병사들은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끝없이 고도를 높여가는데도 그 선명한 존재감에 넋을 잃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감정은 곧 아득함으로 변했다. 지상과는 달리 테헤란은 물론 이란 전체를 물들여가는 군세를 보자 희망이 서서히 꺼져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리 발악해봤자 이게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현실. 다신 밟을 수 없는 땅에 버려진 모든 생명들은 역병에 물들어 버려졌음에 분노하듯 다시 일어나 괴물이 되어 갔다.

물들어가는 테헤란의 지상. 머잖아 그곳 전체가 역병에 의해 함락당하고 말리라. 바라민까지 후퇴한다는 말에도 병사들은 멍하니 반응하지 못했다.

도시가 흔들리는 걸 맨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바라민 시 전체의 건물이 무너지고 쓰러져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점차 폐허가 되어갔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시가 가라앉기 시작했으니까. 곳곳에 검은 점이 찍히고 있었으니까.

그 광경을, 참상을 병사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테헤란에서 피난했던 피난민들과 바라민 시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다가도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결국엔 모두 지하로 끌려가는 모습에 그들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개미지옥.

넋을 잃고 보다가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쌍안경이 무저갱과 같은 지하로 떨어지자, 깊은 지하 아래에서부터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수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집어삼켰다.

결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짙은 밤 속에서 대지는 마치 흑사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점으로 찍힌 대지는, 질병이 갉아먹은 지하는 그 때문에 지반이 약해진 것인지 폭삭 가라앉았고 폭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종국에는 도시 하나가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 앞으로 지도상에서 바라민이라는 도시는 찾아볼 수조차 없으리라.

그 아득한 참상을 모두 넋을 잃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대지에. 지구를 갉아먹는 벌레. 그게 질병의 정체였으니. 헬기는 빠르게 방향을 선회했다.

***

"―――!"

스퀘어 전체에 이상 사태를 알리는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새벽이 밝아오기도 전 밤중에 마법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보았던 참상. 테헤란으로 밀고 들어오는 역병의 군세와 예고 없이 등장한 질병으로 인해 바라민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광경. 그것이 늑대의 눈에는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예상보다 더 빠르다.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급습해 온 재앙은 다시금 인류를 덮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전조일지도 모른다.

이게 끝나면… 아니, 아니다. 우선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재앙을 몰아낼 수 있을 테니까. 다른 곳에 생각을 할애할 여유 따위는 없다. 애초에 승산도 희박하니까.

골치 아픈 점은 놈들이 제각각 다른 곳에 나타났다는 것. 부유섬이 하나인 이상 결국 스퀘어가 막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으니까. 함께 나타나 갈라놓는 게 최선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선택해야 한다. 역병을 치건 질병을 치건…

"……어쩔래?"

어쩐지 조심스러운 목소리. 홍유리가 넌지시 묻는 말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자체가 대답이고 결정. 백소율의 눈빛이 불안한 듯 떨리는 게 느껴졌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하지만, 여기는 지금의 그녀가 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개를 끄덕여 묻지 않은 물음에 대답했다.

…….

늑대가 저택 바깥으로 나갔을 때, 마찬가지로 준비를 끝낸 홍유리가 손을 뻗자 백소율이 파우치를 건넸다. 하지만 그 손에 힘이 들어가 놓질 않는다.

"뭐?"

"저도 가고 싶어요. 가게 해 주세요."

"……."

홍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네가 가서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 그 짧은 시간, 여전히 사이렌이 울리는 사이에 백소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망하신 건 알아요."

용혈의 향을 맡는 것만으로 취해버렸다. 자신이 가진 마력의 재능에 기대를 걸고 있던 선생님을 실망시켰다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래도, 그래서 보여주셨잖아요."

"뭐가."

"스퀘어 아래서 들어오기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그래도 배우고 싶냐고… 네. 그래도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하고 싶어요. 아니, 하게 해 주세요."

신발 끈은 진작에 묶었지만 홍유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역병의 무리를 직접 보진 못했더라도 테헤란 시의 풍경을 일부러 보여주기는 했다.

그래서 물었던 건 이런 모습을 계속 보게 되면서도 마법을 배우겠냐고. 포기하지 않겠느냐 물었던 것. 이미 포기하고 좌절해서 문을 걸어 잠근 마법사들처럼 되지 말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요.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게 전부였으니까."

"너 말 존나 쉽게 한다? 쟤가 구해줬으니까 그게 전부였다고?"

눈썹이 찌푸려진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시선에 백소율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저한테는 그랬어요."

그랬다는 건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양치기 소녀가 되어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스스로 믿을 수 없었던 삶… 백소율이 느꼈던 건 그녀 본인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리라.

악의에 휩쓸린 한 명의 피해자로서 휩쓸려가는 피난민들을 돕고 싶다는 건 당연한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 알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니까.

"…끝까지 할게요. 쓰러질 때까지 ."

신경질적으로 홍유리는 백소율이 건넨 파우치를 받았다. 힘에 밀려 손이 떨어지자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이어진 말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한다고 한 거니까 조금이라도 방해되면 각오해. 알아 들어?"

백소율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바라민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군의 통솔에 따라 인근 도시에서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진작부터 경고했음에도 그러지 않거나 혹은 그러지 못한 이들.

정작 문제는 바라민 동쪽의 도시가 아니라 테헤란과 바라민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고립된 이들이었다. 북서쪽에선 역병의 무리가 다가오고 남동쪽에선 도시가 무너져 내렸으니까.

남은 선택이라곤 무리를 피해 코지르 국립 공원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것뿐. 사실 그조차 질병이 쫓아온다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테지만.

불안한 건 피난민뿐만이 아니라 군인들 또한 마찬가지. 치누크 같은 헬기를 타고 빠져나간 이들은 살 수 있겠지만, 차량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질병이 만족하고 멈췄으면 좋겠으나 발아래 지면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에 달릴 수밖엔 없다.

선두에서 쌍안경을 든 병사는 바라민이라는 도시 자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한 것이 자신이 저기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고 만다.

반대로 몸을 돌려 먼 곳을 보았을 때는 역병의 무리, 그중에서도 특히 발 빠른 것들― 개나 몬스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피난 행렬은 따라잡히고 말 터.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갑작스레 역병의 짐승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분명 보고 있었음에도 환각을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어느새 그것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깡그리 사라져 있었으니까.

***

스퀘어의 끝으로 달린 늑대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떠오른 달에 잠깐 비치는가 싶더니 발판에 발판을 밟고 순식간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테헤란의 남동부 디스트릿 20. 테헤란의 구역 중 하나이자 바라민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길. 늑대는 그 길목에 내려서 비가시화를 유지한 채로 스퀘어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선택은 저들이 하게 될 거다. 역병과 질병이 서로 다른 장소에 나타난 이상, 스퀘어는 선택해야만 하니까.

떨어져 있다면 막을 수 있는 건 결국 하나뿐이다. 하지만 늑대는 스퀘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짐작하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역병을 막는 걸 우선시할 터.

질병의 특성을 생각하건대 쫓는다고 쫓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으니까. 좀 더 확실한 선택을 할 터. 적어도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리라. 따라서, 선택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머지않아 테헤란에는 마법이 퍼부어질 터…

디스트릿 20― 돌풍을 두른 늑대는 달리고 또 달렸고 그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검은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귀화는 점점 커졌고 어느샌가 화마라고 불릴 거대한 불로 덩치를 키웠다.

새까만 불은 구획 전체를 덮을 것처럼 넘실거렸고 늑대는 그 길로 바라민을 향해 달렸다.

귀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리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시간을 벌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질병― 깊은 지하에 숨어있는 괴물을 유인해 피난민들이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도록.

탐지를 유지한 채 바라민을 향해 달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반이 무너진 건지 검게 물든 바라민과 도망치는 피난민과,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질병의 모습이 늑대의 눈에는 똑똑히 비치고 있었다.

일단, 스퀘어의 폭격이 시작될 테헤란으로 저것을 유인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전에.

늑대는 고개를 돌렸고 거기엔 검은 불길을 기어코 뚫어내고 달려드는 짐승의 무리가 있었다. 뻗어간 길고 긴 그림자가 탐욕스레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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