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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65화 (165/407)

〈 165화 〉 #68 유인 (2)

부유섬의 끝에 가장 먼저 도착한 아스터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저건…"

어두컴컴한 밤중에도 더욱더 검게 불타는 불길한 불꽃. 제자인 홍유리가 데려온 불길함의 근원. 필경 환영의 나비와 싸웠다던 마랑이 일으킨 화마이리라. 테헤란과 바라민을 잇는 길목을 덮은 검은 불꽃이 역병의 무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불을 일으키는 정도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겨우 그런 거로 막을 수 있다면 역병의 무리에 전선이 뚫릴 리 없다. 하지만 어째선지 역병의 무리는 쉽게 지나가지 못하고 있다. 불길의 조금 너머 마치 석유처럼 녹아내린 무리를 보고 아스터는 침음을 흘렸다.

검은 화마에서 일순간 악귀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아서. 불길함은 더욱 커지기만 해 그는 저도 모르게 제자의 얼굴을 보았다.

……백소율이라는 재능 있는 아이를 대동하고 온 제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아스터만큼은 그 표정에 불안과 흡사한 감정이 담겼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그 마랑에게 대가로 준 것이 무엇이길래? 왜 그 마랑이 인류를 돕는단 말인가?

아스터 또한 개인적으로 알아본 게 있다. 뒤늦게나마 알아본 바로는 마랑의 정체는 알파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 뉴스로도 보도되었던 홍유리와 마랑의 사투를 알게 됐다.

결국 패한 것은 자신의 제자였고 마랑은 목숨을 거두진 않았다 한다.

지성 있는 괴물― 바로 그 지성이야말로 아스터에게 불길함을 세기는 주된 원인이었다. 지성을 가지고 있는 이는 누구나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니까.

비록 마랑은 질병과 역병을 처치할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 했지만… 아스터는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마랑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가하고. 무엇 하나 섣불리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그를 중심으로 붉은 마력이 휘감기기 시작했다.

***

완전한 봉쇄는 불가능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효율이 좋다.

발 빠른 것들은 돌아가거나 멀리 달릴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스스로 가연물이 되어 화마를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쉽게 꺼지지 않는 귀화는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고 늑대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정확히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게 맞으리라. 바라민에서부터 지면이 파도치듯 출렁였고 지하를 파먹는 벌레, 질병이 맹렬하게 피난민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으니까.

놈의 속도는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의 발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피난민들은, 아니 병사들까지도 전부 먹이가 되고 말리라.

결국 부유섬은 하나뿐. 스퀘어가 두 곳을 동시에 커버할 수 없다면 놈을 유인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역병과 싸우는 도중에라도 질병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거기까지만 갈 수 있다면 미리 말했던 대로 마법의 폭격이 질병과 역병을 상처입히고 갈라놓을 터.

그나마 다행인 건 역병과 마찬가지로 질병 또한 지성은 없다는 점이다. 감정에 몸을 맡기고 본능으로 움직이는 짐승이라면 유인할 수 있다. 유일한 문제는 놈의 시선을 끌고 유인하는 동안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도시 하나를 먹어 치우고도 식탐을 보이는 괴물을 피난민과 가능한 한 멀어지도록 길목을 빙 둘러서.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

수십 만에 달할지도 모르는 피난민 전체를 질병의 미끼로 줄 수는 없으니까.

스퀘어의 마법이 퍼부어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 늑대는 곧바로 위압을 발했고 지하를 달리던 질병은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늑대를 지나쳤다.

늑대의 위압은 잠깐 시선을 끄는 정도는 가능했으나, 질병을 움츠러들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폭군의 칭호까지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도 그럴 것이 질병은 늑대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 격이 다르다고 해도 좋다. 늑대의 이빨은 질병에게 닿지 않는다. 개가 짖는다고 용이 신경 쓸 리 없듯이 질병이 늑대를 무시하는 게 이상할 건 없다는 뜻이다.

질병과 늑대의 차이는 그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어디까지나 땅을 파먹는 벌레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지하에 살며 시력마저 감퇴한 벌레는 그저 본능으로 늑대를 느꼈을 뿐 그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내면에 잠재된 힘을 읽을 정도로 뛰어난 감 혹은 식견이 없다는 뜻.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질병은 여러 번 자신을 살렸던 본능 그대로 멈췄고 깊게 바닥을 파고든 무언가를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

지하에서 울부짖는 소리는 무저갱에서 들려오는 지옥의 부름과도 같다. 위협만이 아니라 무언가가 자신을 공격했다― 그 사실에 질병은 격노했다.

늘 자신을 공격하던 창공의 섬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 하물며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

오연한 붉은 눈을 보았을 때, 질병이라 불리는 지하의 왕은 몸을 틀었다. 먹이를 먹는 것보다도 우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했으니까.

거대한 몸이 출렁이자 지면이 깨져나가고 늑대는 다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땅을 깊게 드러낸 힘. 공허는 닿지 않은 게 아니라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먹어 치우지 못한 거였다. 그 만상의 주인조차도 방심한 틈을 타 손을 먹어 치웠거늘 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붉은 눈이 꿰뚫어 본 질병이라는 괴물은 늑대가 여태 만났던 그 무엇과도 비교를 불허했으니까.

역병을 퍼뜨려 오염시키고 무리를 만드는 역병과는 다르다.

병을 퍼뜨리고 무리짓는 게 아니라 대지를 좀먹고 부수어가는 괴물.

단순히 개체만을 놓고 보자면 역병보다 질병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걸 지금 두 눈으로 보고 확신했다.

[대지를 병들게 하는 자(어스 이터)]

[체장 132.8m] [체고 11.53m] [체중 1.44kt]

[힘 808] [민첩 673] [체력 786] [마력 727]

설령 상처 입더라도 질병을 쓰러뜨리는 건 힘들 것 같다고.

스테이터스부터가 늑대가 여태 확인했던 모든 것들을 크게 상회한다. 가장 낮은 민첩조차 화산각룡의 가장 높은 스테이터스인 힘과 얼마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차는 있었다고 해도 홍유리의 대마법을 세 번이나 견딘 화산각룡. 하지만 질병은 스퀘어 전체가 퍼붓는 마법을 수십 년 간 고스란히 받아내고도 죽이지 못한, 인류가 죽일 수 없었던 대재앙.

역병과 함께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가장 큰 원인. 그 실체가 늑대의 눈을 빌어 선명하게 드러났다.

붉은 눈은 질병을 담고 있지만, 귀는 먼 곳의 소리를 듣고 있다. 폐허가 된 도시에 내리꽂히는 무자비한 폭격. 그 폭음을.

두말할 것도 없이 스퀘어. 무리를 향해 언제나 그랬듯 자비 없이 퍼부어지는 마법의 세례가 작렬하는 와중, 늑대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놈을 유인했고, 그 뒤를 따라 지면이 파도쳤다.

속도는 늑대가 우위에 있다. 어렵잖게 도망칠 수 있는 정도였으나 늑대는 그것이 놈이 지하에 있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지를 부수고 달리는 속도가 어지간한 기차에 맞먹고 있으니 지상 위에 실체를 드러내면 제아무리 자신이라 한들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순간, 초감각과 육감이 강한 경고를 발했고 뇌리에 그려진 예지에 가까운 장면에 따라 늑대는 다리를 굽혀 뛰어올라 발판을 밟고 돌풍을 터뜨렸다.

그런 늑대를 향해 무수한 촉수가 한 박자 늦게 지면으로부터 일어나 휘저었다.

꿈틀거리는 촉수는 수십 미터에 달할 만큼이나 길었고 그것이 지면을 훑자 모래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흙먼지가 일어났고 나무와 바위는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꺾이고 부서져 모조리 잔해가 되었다.

늑대가 가진 가시 촉수보다도 몇 단계나 위에 있는 끔찍한 촉수는 제각기 의지를 갖추기라도 한 것처럼 늑대를 끝없이 뒤쫓았다.

셀 수 없는 가닥이 700에 가까운 민첩의 반응과 800이 넘는 힘으로 휘둘러지는 건 그 자체가 재앙.

촉수가 마구 휘둘러질 때마다 그 하나하나가 음속을 초월해 소리의 벽을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그 풍압마저 돌풍으로 상쇄한 늑대는 무수한 촉수 사이에서도 멈추지 않고 하늘 높이 달렸다.

섬뜩한 촉수가 사방에서 덮쳐오자, 마지막으로 탄력을 발하고 결국엔 고도를 높여 촉수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1초― 아니 1초도 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시간. 뒤늦게 촉수 다발은 손뼉이라도 치듯이 공중에서 부딪쳤고 늑대는 그 풍압, 바람에 몸을 실어 다시 수십 미터를 떠올랐다.

그러고서도 안심할 순 없다. 촉수가 닿을 리는 없겠지만 고작 이걸로 끝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것은 늑대가 가진 가시 촉수의 몇 단계나 위에 있는 스킬. 당연히 늑대처럼 가시를 쏘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늘이 검게 물들 만큼 쏘아지는 것들에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부유섬이 높게 떠 있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인류는 몰살당했으리라.

그나마 촉수는 피할 수 있었지만 가시는 그마저도 힘들다. 아예 창공이 검게 물든 이상 피하고 말고 할 영역에 있지 않았으니까.

허나 그것은 발출된 것. 질병의 몸과 붙어있지 않으니 스킬의 영향은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늑대가 어떤 생각을 품는 것과 동시에 하늘을 수놓았던 검은 가시들은 공허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시와 촉수에서 모두 벗어난 그 순간, 아주 잠깐의 틈을 늑대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질병이 아직도 늑대의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늑대의 혜견과 같은 통찰력이 질병에게는 없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지하의 왕에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으니까. 역병조차도 개체로서의 힘은 질병에게 닿지 않는다.

"――― ―――!"

그것이 울부짖자 대지가 들썩거리고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순한 포효가 아니라 그 의지에 따라 일어난 스킬이었다.

[보유 스킬]

[지신(A)] [마수魔手(B)] [대마력(B)] [바위 가죽(B)] [신력(B)] [완화(C)] [용린(C)] [마력 갑주(C)] [뛰어난 청각(D)] [재생(D)] [악식(D)] [뛰어난 직감(D)] [독 내성(D)]

무수한 스킬 중, 놈이 가지고 있는 A등급 스킬― 지신. 놈으로부터 시작된 커다란 지진. 대지의 판과 판이 부딪혀 땅이 부서지고 파헤쳐지더니, 부서진 파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쏘아지기 시작했다. 공허로 먹어 치우는 건 가능했지만, 대마력의 무식한 마력을 담은 가시만큼은 피해야 했다.

부서진 대지를 질병은 촉수를 뻗어 들어 올리더니 파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대지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촉수가 던지는 바위와 지신에 의해 부서져 쏘아지는 대지.

대부분은 피했지만, 그 무식한 크기와 갯수를 전부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가시는 쏘아져 늑대를 위협했다. 영량이 그물처럼 넓게 펼쳐져 대지를 자르고 잘게 쪼개진 바위를 공허가 먹어 치운다. 견디고 또 견디며 늑대는 계속해 달렸다.

만약 초감각의 경고가 없었다면. 그대로 지상에 발 붙인 채로 있었더라면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형을 바꾸는 게 저렇게나 쉽다면 그림자에 숨어드는 것조차 아무 의미도 없을 터. 그에 늑대는 실소했다. 막연한 생각보다 이것들은 훨씬 더 끔찍하고 암담했으니.

이것이 재앙. 인류가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 버거워했던 불합리한 존재. 대지를 먹어 치우는 질병.

늑대가 알고 있던 소설 속 세계관의 꼭대기에 자리한 괴물이었다.

허나― 결국 넘어서야 할 존재에 불과하다.

내면에 집중한 늑대는 더 높은 공중을 향해 달리며 아슬아슬한 선을 그었다. 휘날리는 촉수가 닿지 않고 바위나 대지의 파편을 피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에서 계속해 달렸다.

지하에 있는 한, 질병은 늑대를 따라잡을 수 없다. 촉수도 바위도 무엇 하나 늑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고도에서 늑대가 계속해 달리자 결국, 질병은 지상에 그 거신을 드러냈다.

―여태 도망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대지를 부수며 쫓아왔기 때문에. 원래 속도에서조차 질병은 늑대를 크게 웃돌고 있었다.

드러난 모습은 어스 서펜트와 흡사하나 뱀보다는 지네에 가깝다. 진짜 다리는 없으나 무수한 촉수가 지네를 연상케한다.

실체를 드러낸 질병. 스퀘어의 폭격이 이어지는 곳까지는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으나 늑대는 침을 삼켰다.

유인하는 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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