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67화 (167/407)

〈 167화 〉 #69 탈출

제아무리 흑무라 한들 스퀘어의 마법 세례를 전부 막기란 당연 불가능하다. 마력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고 해도 정도가 있다.

완성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완성된 마법은 쉽지 않다. 3절까지의 마법이라면 막을 수 있다. 4절부터는 몸을 지키는 정도라면 가능할 거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대마법을 막는 건 어떻게 해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것이 스퀘어 마스터의 것이라면 더더욱.

이미 역병의 상태는 너덜너덜하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으며 무리는 이미 반파되어 남은 군세는 아직 멀리에 있었다. 대부분은 짓눌리거나 동강 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아예 불살라져 살점 덩어리가 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무리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 따위는 늑대에게 하등 위협이 되지 못한다.

늑대가 경계하고 있는 건 역병이라는 괴물과 질병이라는 재앙 그리고 부유섬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마법일 뿐.

"……!"

다리를 잃은 늑대는 촉수를 변형시켰다. 변화의 다음 등급, 변이는 한층 더 완성된 다리를 만들어냈고 늑대가 원하는 것에 따라 잘려 나간 다리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했다.

어깨 위로 뿔이 돋아난 듯한 외형은 평소보다 크고 난폭해졌다. 본래 가지고 있지 않은 붉은 비늘이 돋아나 마치 갑옷이라도 된다는 양 늑대를 덮어 마랑이라는 이름에 좀 더 걸맞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형태만 변한 게 아니라 그 특성을 가져온 것. 늑대가 온전히 먹어 치운 존재의 형질을 가져올 수 있는 스킬. 변이한 형질은 화산각룡. 늑대가 여태껏 먹어 치워온 것 중 가장 강대한 적이기도 했다.

각룡의 피부와 뿔이 갑주처럼 마랑을 덮고 있는 듯한 형상. 물론 그 실체에는 닿지 못한다.

비늘은 각룡이 가졌던 용린에 비하면 물렁하고 뿔은 종잇장이나 다름없다. 화산의 의지, 그 굳건함은 어디까지나 각룡이 가진 스테이터스에서 기인한 것. 늑대의 힘과 체력은 각룡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으니 온전한 형상을 이룰 순 없다.

애초에 D등급 스킬인 변이로 화산각룡이라는 괴물을 흉내 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허나 그 힘의 일각인 미약한 일부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굳건함을 조금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일대의 창공을 덮은 마법의 폭격을 피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결국,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마법은 늑대에게 닿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 변한 모습. 변이에 이어 경화마저 사용해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쳤다.

***

마법사들은 진작에 기진맥진할 만큼 마력을 쏟아부은 상태. 그 사이에서 마력 하나만큼은 어지간한 마법사를 넘어서 있는 백소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시 한번 영창을 시작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3절의 마법은 홍유리가 알려준 백색 폭발하나뿐. 따라서 그것 하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반복이 백소율에게 빠른 숙련을 요구했고 주문을 외는 말소리는 점점 빨라져 갔다.

아직은 견딜만하다고 그렇게 느끼고 있다. 마력 중독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다. 이미 10번이 넘게 대마법을 외웠음에도 마력은 바닥나지 않았다.

아니, 절반이 넘게 남아있었다. 부유섬의 고도가 낮아진 만큼 잔여 마력이. 마법을 사용할 때 낭비되고 흩어지는 마력이 계속해 그녀에게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며 주문을 영창한 백소율의 눈에 보인 건 아까의 괴물이 섬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 무수한 촉수 하나하나가 전부 공기의 벽을 쳐부숨에 따라 귀가 먹먹해져 고막이 터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귀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닦으려던 백소율은 입술을 씹으며 수인을 맺고 영창을 이어갔다.

그러자 서서히 감각이 변해갔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귀가 예민해지는 것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백소율의 신경이 눈에 집중되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걸 보여주었다.

눈에 띄는 붉은 색이 잔상으로 남게 된 탓도 있었지만, 아까까진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촉수들이 낭창낭창 흔들리며 무언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 붉은 비늘을 두르고 뿔이 돋아나 있었지만, 그 정도로 몰라볼 리 없다. 백소율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알파라고 확신했다.

왜 쫓기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보다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소율은 마법을 완성해갔다.

"Iată moartea ta―!"

부디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

화마에 닿기도 전에 익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늑대를 감쌌다. 그 열기의 근원은 수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마법. 곧 늑대는 고개를 들어 그 모든 마법을 읽고 파악했다.

마법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마력의 양을 읽어낸 것. 혜견과 함께 직관적으로 파악한 늑대는 몸을 돌렸다.

돌렸을 때, 시야를 가득 메운 건 검은 촉수들. 그것들이 늑대의 죽음을 바라며 공기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질병의 힘을 생각해보면 살짝 닿기만 해도 분명 치명상.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이어질 터.

그런 사선을 향해 늑대는 기꺼이 달려 나갔다.

생환의 길은 사선 위에서 춤춘 뒤에야 어렴풋하게나마 보이게 될 테니까.

"――――――!"

도망치기는커녕 자신에게 달려드는 늑대를 불쾌히 여긴 질병이 부르짖은 외침에 마력이 섞여 나와 대기가 일그러지고 늑대가 비틀거렸다.

그 탓에 피할 수 있었던 촉수가 아슬아슬하게 늑대를 스쳤다. 스친 것뿐임에도 불구하고 늑대의 다리는 이상한 모양으로 비틀리고 일그러졌다.

상처는 곧바로 회복됐다. 아니,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냈다. 검은 숲 사이로 온전히 들어왔을 때, 열기는 더욱 거세져 마침내 레드 스퀘어의 폭격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

늑대에 닿기 전 검은 숲에 먼저 닿아 질병이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질병의 울부짖음이 일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검은 숲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촉수 다발은 언제나 그랬듯 마법의 불이 하나둘 소각해갔다.

불이 붙은 검은 숲은 불의 마법 속에서도 쉽게 불타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있다. 질병이 괴로움에 이리저리 몸을 비튼 탓에 촉수의 포위망 사이로 불꽃이 새어 들어왔고 그것이 조금 닿았을 때,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질병과는 반대로 고통은 없지만 견디기 힘들다. 나아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질병의 촉수를 방패 삼은 덕에 그나마 위력은 줄였지만, 스퀘어 마스터와 그 후계자의 대마법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어쩌면 마법을 뚫고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덕분에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지 잘 알게 됐다.

바람을 일으켜 불을 흩어낸 늑대가 아래를 향해 달림에 따라 서서히 올라오던 녹색 연기마저 흩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 새어든 불에 닿았을 뿐인데도 인류가 어떻게 두 재앙을 틀어막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 위력을 정면으로 받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문제는 마법뿐만이 아니다.

질병이 긴 꼬리로 바닥을 내리치더니 파편을 띄워 올렸고 무수한 대지의 파편이 늑대를 찢어발길 듯 날아올랐다.

기껏 만든 발판이 파편에 부서져 내리자 늑대는 발판을 만드는 대신 쏘아진 파편을 밟고 추락하듯 달렸다.

땅을 갉아먹는 벌레에게 있어 그것은 마치 늑대가 불을 몰고 달려오는 듯 보였다. 겁화를 몰고 달리는 늑대의 모습에 넋을 잃은 건 아주 잠시간이었다.

순간, 거대한 지진과 함께 지각이 변동하기 시작했다.

땅이 일어나 바위산이 되어 늑대를 마중하고 질병의 거신이 뛰어올라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한껏 입을 벌렸다.

하늘에선 겁화가 내려와 추락하고 대지에선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그사이, 늑대의 시야에 질병의 턱이 한계까지 벌어져 시야를 가득 메웠을 때 늑대가 두른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갔다.

폭풍의 폭발은 대기의 흐름을 바꾸었고 아주 짧은 순간, 추락하던 마법을 조금이나마 밀어냈다.

그 사실에 의미는 없다. 어차피 겹으로 쌓인 마법이 지상에 내려앉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폭풍조차도 마법의 폭격에 비하면 산들바람에 불과했으니.

늑대가 바랐던 건 그저 조금의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질병이 자신을 놓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건 훌륭하게 성공했다.

바로 머리 위까지 닥친 마법. 어딜 가더라도 도망칠 수 없을 텐데 그 어디에서도 늑대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은은한 검은 안개만이 잔상으로 남았을 때, 질병의 뛰어난 청각이 늑대를 찾아냈다.

자신의 턱 아래 버젓이 숨어있는 늑대. 가증스럽게도 늑대는 질병 자신을 방패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촉수를 뻗은 순간― 전부 녹아내렸다.

마침내 스퀘어의 마법이 닿았으니까. 세상이 붉게 변하는 와중에 질병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악했고 추락한 질병의 거신이 기어이 지면에 부딪혔을 때, 늑대는 오래전에 본 비슷한 광경을 떠올렸다.

어스 서펜트― 놈이 그랬던 것처럼 질병이 지면에 부딪힌 순간, 대지가 완전히 반파되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와중 가득 메운 마법에 짓눌려 가라앉는다.

질병의 거신이 내려앉아 지면에 부딪혀 거대한 충격이 일자 턱 아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늑대조차 한순간 아찔했을 정도였지만 지형이 부숴지지 않는 한― 그림자는 흩어지지 않는다. 그런 충격 속에서도 질병은 멈추지 않았다.

더 깊은 지하로 숨어들어야 살 수 있다는 듯 꿈틀거리는 질병을 늑대가 용납지 않았다.

어느샌가 정면을 막아서고 있는 알 수 없는 일렁이는 무언가를 본 질병은 고민해야 했다.

억지로라도 저것을 뚫고 지하로 숨어들어야 하는가 혹은 마법의 폭격을 견뎌내야 하는가.

그리고 정작 그 고민이야말로 질병의 선택을 앗아갔다.

추락한 질병을 따라 마침내 지상에 내려앉은 붉은 마법의 폭격이 그를 강타했기 때문에.

늑대라면 몰라도 질병은 능히 마법을 견뎌낼 수 있다. 상처는 입겠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재생할 테니까.

기어이 재앙의 괴물에게 작렬한 마법은 그것이 마냥 상상하던 것보다, 일전에 당했던 때보다 훨씬 강렬한 고통을 선사했다.

어째서? 그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용린이 뜯겨나갔기 때문에. 유인하는 동안 이어진 늑대의 공격들. 물어뜯고 가시를 쏘아내는 행위는 질병에게 있어 가소로웠을 뿐. 실제로 별다른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탈식이 나아간 잠식은 계속해 끊임없이 질병의 비늘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 잠식되어가면서도 격정에 휩싸인 질병은 미처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질병은 마력 갑주에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마력을 할애했고 마력의 벽이 내부에서부터 질병의 전신을 두르자 늑대 또한 마찬가지로 그림자로부터 튕겨 나오고 말았다.

비늘의 보호 없이 작렬한 마법은 질병에게 끔찍한 고통과 피해를 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늑대 또한 마찬가지. 턱 아래 달라붙어 있던 늑대는 뜨거운 열기가 침범하자 까드득 이를 갈았다.

흑무를 둘렀음에도 짓눌리고 폭풍을 불러와도 잠잠해진다. 대부분은 질병이 막아냈으나 붉게 뒤덮인 마법은 늑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각룡을 흉내 낸 붉은 비늘이 녹아내리고 빌려온 뿔이 형태를 갖추지 못하게 됐다. 덕분에 조금 시간은 벌었으나 이 이상은 무리. 결국 끝없는 겁화에 휩싸여 죽고 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늑대의 눈앞으로 새하얀 빛이 번뜩였다.

―마치 광명처럼 빛나는 새하얀 폭발이 불의 마법을 걷어내고 아주 작은 틈을 열었을 때, 늑대는 빛을 향해 달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