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69 탈출 (2)
탈진할 만큼 마력을 쏟아부은 백소율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그녀의 상태를 알려주고 있다. 아무리 마력이 모여들더라도 사람의 몸은 물건이 아니다. 바람을 넣었다 빼는 풍선과는 달리 마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지치는 게 당연하다.
한계를 넘어 마력을 사용한 탓에 마치 무언가가 어긋나는 듯한 엇갈림을 느꼈다. 마력은 아직 할 수 있다고 속삭이지만, 몸이 따라가질 못한다.
헐떡이며 주저앉은 백소율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지만, 착각일까? 주변을 둘러보았을 땐 이미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부유섬의 끝에서 아찔한 바람이 불어오자 백소율은 심장을 감싸 쥐고 파우치에서 아직 남은 포션을 꺼내다가 손목을 붙잡혔다.
"하지 마세요."
선생님인가 싶었지만 거기 있는 건 아넬라였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시선에 보라는 듯 아래를 가리킨 아넬라의 손을 따라 내려다보았을 때, 백소율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붉었다. 다만 아넬라의 손이 자신의 눈을 쓸자 백소율에게도 아넬라가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야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는 걸 환상으로 똑같이 보여주는 것일 뿐이지만 결과는 같다.
아넬라라고 해도 늑대의 움직임을 쫓기란 힘들었지만, 늑대가 상처를 입은 것과 더해 적어도 백소율보단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검은 잔상이나마 볼 수 있었던 것.
안심한 백소율은 긴장이 풀린 순간 죽은 듯 잠들었다. 마력은 남았는데 정신 고갈― 생각보다 고집불통인 그녀의 결의에 아넬라는 고개를 저었다.
백소율이 안심하고 쓰러진 다음에도 질병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기어이 마법을 견뎌내고 늑대를 뒤쫓는 모습에 침을 삼켰을 때, 누군가가 영창하는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떠오른 진홍의 마법진. 그 눈동자에서 아름다운 진홍빛이 흩뿌려지며 소녀는 마지막 주문을 영창했다.
***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질병은 죽지 않았다. 스퀘어의 폭격에 상처 입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로 죽었다면 재앙으로 불리지도 않았을 터.
그 정도로 죽기에 질병이란 괴물은 너무 강대했다. 곧바로 뒤쫓아오는 괴물로부터 늑대는 창공 위를 달렸다.
광명과 같은 새하얀 폭발 사이로 벌려진 틈으로 빠져나올 순 있었으나 늑대의 상태는 좋지 않다. 아니,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몸 대부분이 녹아내렸고 그건 장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뇌와 심장은 가까스로 남았지만, 위장과 내장을 비롯한 장기는 깔끔히 불살라진 치명상. 재생이 회복하려해도 제법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런 아슬아슬한 상태. 가까스로 목숨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용혈과 극기. 용의 피를 가진 생물은 결코 쉽게 죽지 않으니까.
그런 상태에서조차 늑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폐가 녹아내려 숨을 쉴 수조차 없었지만, 용혈에 가득 담긴 산소가 늑대를 움직이게 해 연명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변이로 움직인다 해도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다. 지금의 늑대는 이전의 절반 정도로밖에 달릴 수 없다.
그게 아넬라 모레스트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늑대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늑대와는 달리 질병은 상처 입었음에도 아직 충분히 움직일만한 상태였다. 곧바로 뒤쫓아오는 괴물에 이를 악물며 창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런데도, 당연하게도 거리는 좁혀져만 간다. 질병의 몸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녹아내린 놈의 몸에서부터 촉수가 뻗어 나와 늑대를 쫓았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피할 수 없다. 촉수의 움직임은 훤히 읽을 수 있었지만 그걸 수행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애초에 탈식으로 질병의 체력을 빼앗은 게 아니었다면 이미 몇 번이고 죽었으리라.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분명히 있다.
―모조 엘릭서. 모방한 신의 피를 마신다면 이깟 상처쯤은 순식간에 회복될 터. 단순한 회복만이 아니라 잠깐은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질병을 죽일 수 있을 터. 짧은 시간이나마 죽지 않는다면 능히 질병을 물어뜯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또, 그러는 과정에서 높은 확률로 재생 스킬 또한 몇 단계는 나아가게 되리라.
질병뿐만 아니라 상처 입고 도망치려고 하는 역병마저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복용할 생각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질병이 코앞까지 다가온 암담함. 한껏 벌린 입이 당장에라도 늑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탄력은 이미 사용했고 폭풍은 진작에 터뜨렸다. 자력으로 벗어날 방법은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늑대는 끝까지 마시지 않았다.
지금 모조 엘릭서를 들이켰다간 나중엔 극복할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올 땐 일말의 희망조차 남지 않을 테니까. 미지의 존재와 닿지 않는 재앙 앞에서 늑대는 그저 하염없이 벗어나기 위해 달렸으나, 검은 숲이 길을 막고 늑대를 삼키기 위해 벌려진 거대한 턱은 점점 좁아져가고 있었다.
이젠 모조 엘릭서를 마시더라도 늦고 말리라.
그 절체절명의 암담함 속에서 늑대는 웃었다.
미친 게 아니다. 무모함 또한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
질병이 턱을 닫은 순간, 늑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붉은 눈에 비치는 건 깜깜한 어둠이 아니라 탁 트인 시야였으니까.
"괜찮은가?"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놀람이 가라앉았다. 어찌 됐건 살아남기는 한 모양…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하얀 사슴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에는 좀 더 가벼웠던 것 같은데. 휴. 아무튼 이만 내려와 주지 않겠나?"
현계가 아닌 환계. 질병에게 삼켜지기 직전 다가온 백록이 늑대를 데리고 환계로 이동한 것.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늑대는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백록은 고개를 저었다.
"됐네. 그것보다 자네, 저런 것과 싸울 셈인가?"
"……."
"나쁜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만…"
백록이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할 때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록의 말에 틀림은 없다. 아직 질병에게 닿지 못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유 부릴 시간은 없다. 이번에는 스퀘어와 환계에 협력을 구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다음번에는 힘들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늑대가 상대하려는 건 질병이 아니다. 상처 입은 녀석이 도망쳐주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 싸우는 도중 난입해오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늑대가 노리는 사냥감은 어디까지나 역병. 개체로서 우월한 질병이 아니라 마법에 의해 무리를 잃고 상처 입은 역병을 노리고 있었다.
"페어리 드래곤들은?"
늑대의 물음에 사슴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고 아직 먼 곳에서 뾸뾸거리며 날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머지않아 도착하리라. 축지를 이용한 백록이 여기까지 먼저 달려온 것이리라.
환계의 용들이 온다… 그건 필연적으로 페리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써 감정을 내리누른 늑대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환계인지라 질병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녹아내린 신체는 계속 재생되고 있었고 대화하는 동안 상처는 대부분 회복했다.
―질병은 머지않아 도망칠 터. 죽을 거란 기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십중팔구는 살아남을 거다. 마법의 폭격이 끝날 짧은 시간을 기다리며 늑대는 허공을 천천히 올랐다.
관건은 역병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히는가.
늑대는 다가올 싸움을 기다리며 찬찬히 숨을 골랐다.
***
영창하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홍유리는 백록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
질병의 턱이 닫히는 순간, 홍유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알파가 당했다는 믿기 힘든 사실… 아니, 어쩌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각룡때도 늑대는 먹혔지만, 기어이 뛰쳐나왔었으니까.
―가능할 거야. 틈을 벌리기만 하면 나올 수 있을 터.
진홍의 마법진에 빛이 밝혀진 순간, 홍유리는 동요를 삼키고 마법을 구현했다. 번쩍이는가 싶더니, 날아간 흑점은 질병에게 작렬했으나 끝에 몸을 비틀고 만다. 용린이 뜯어져 나간 그 속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충분한 피해였다. 그럼에도 홍유리는 만족하지 않았다. 질병이 끝까지 견디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턱을 벌리게 만들어야 하는데……?
"너, 너 왜 지치질 않는 거야?!"
숨을 헐떡이는 소리에 돌아본 홍유리는 허리를 꺾은 도로시를 볼 수 있었다.
"이, 이!"
뭐라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홍유리는 깔끔히 무시했다. 저 싸가지랑 투닥거리 할 여유가 있다면 주문 한 소절을 외는 게 더 나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왜 지치지 않는가… 거기에 의문을 가진 건 홍유리였다. 대체 왜? 분명 대마법을 영창한 건 서로 같다. 그렇다면 먼저 지치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대마력을 갖지 못한 나는…?
그에 의문이 차올랐다. 입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애초에 대마력이란 게 도대체 뭐길래? 생각을 집어넣고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하자 무언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여왔다.
"Se înroșesc―"
……더. 조금 더.
그 속삭임에 홍유리는 신경질적으로 귀를 때렸다. 고막이 터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데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선지 영창을 멈출 수가 없다.
"Puterea cuvintelor mele Acoperă lumea."
……외쳐. 읊어. 소리쳐. 소리 질러.
속삭이는 목소리에 홍유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됐다.
"Prin urmare, Ceea ce vreau este devenit realitate!"
사실 난 이미 쓰러졌고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전부 잘 끝났고 눈을 떴을 때 알파가 먹혔다든가 하는 일은 없는 게 아닐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나약한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려 했다.
"―Acoperit în foc negru."
아무래도 좋아. 현실이건 꿈이건 간에 어차피 마법은 사용할 거니까. 그러니까 닥치고 있어. 가슴 어림에 가져다 댄 손을 그러쥔 홍유리는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점점 빨라져만 가는 고동. 그러는 가운데, 내면에서부터 바깥으로 무언가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Arzând în abis și transformându-se în cenușă―!"
마지막 영창을 뱉었을 때, 홍유리는 자신의 목 뒤로 붉은 무언가가 작게 도드라져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