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70 이행
옐로 스퀘어 마스터, 북풍의 주인은 작은 감탄을 뱉었다. 당연히 레드 스퀘어 마스터가 완성한 마법이라 여겼거늘 그게 아니라서.
적발의 소녀. 물론 알고 있다. 후계자 후보였던 만큼 나름대로 재능은 있었겠지만 그게 저 정도였나?
대마법― 흑점의 폭발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더니 질병에게 적중해 터졌다. 그건 그녀가 앞서 사용했던 대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짧은 사이에 숙련된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북풍의 주인만이 아니라 그녀의 스승인 아스터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그녀를 향했다.
그만큼 대마법의 위력은 뛰어났다. 그 고통에 질병이 몸부림치며 대지가 부서지고 파편이 치솟았다. 그렇게 마침내 질병의 입이 벌려지자 홍유리는 두 주먹을 쥐었다.
분명 아직 낫지 않았던 손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멍하니 보던 홍유리는 이내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알…!"
"―――!"
마침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질병의 입이 벌어지자 홍유리는 이제 되었다는 듯 늑대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질병의 입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알파가 나오지 않아서. 추적의 마안으로도 알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이미 죽어버렸다? 먹혀서,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부글부글,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내부에서 흐르던 것이 넘쳐 솟아올랐다.
감정이 끓어오르는데 머릿속은 되레 차가워졌다.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벌써 몇 번이나 대마법을 펑펑 써 갈겼음에도 아직 마력이 남아있다― 그런 의문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깡그리 날아갔다.
가슴 속이 답답해져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도 멈추지 말라고. 계속하라고. 죽여 버리라고 계속해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홍유리는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알파를 살릴 수 없다면 하다못해 그 복수라도. 그 순간, 흘러넘친 것이 마침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한마디 말을 뱉는 것만으로 족하다. 선 앞에 서서 한 발자국 걷기만 하면 변혁을 맞이할 터. 그렇게 주문을 외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것은 무언가의 꼬리―
"뀨~!"
여태 홍유리가 보았던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꼬리였다.
***
이전 같았으면 질병은 진작에 물러났을 테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 아직 늑대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 집어삼켰다고 생각했거늘 그렇지 않아서. 질병은 마법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늑대를 찾으려 발악했나 환계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늑대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에 분노하듯 질병이 울부짖었고 고작 그것만으로 어지간한 마법은 전부 나가떨어졌지만 다시 한번 진홍의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질병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용린도 전부 떨어지고 너덜너덜해져 뼈가 드러난 상태. 더는 무리라고 판단했고 그건 스퀘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대로라면 질병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마법사들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인류가 여태 이렇게까지 질병을 몰아붙인 전례가 없었으니까.
덩치가 크다는 건 그만큼 재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길다는 뜻. 명백히 재생하는 속도보다 상처가 늘어가는 게 빠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질병이 대지 깊숙이 숨어들기 시작하자 아스터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가는구려."
그에 겨울의 주인 또한 끄덕였다.
땅을 파먹는 벌레답게 순식간에 깊은 지하로 숨어드는 모습. 이 부유섬에서 저걸 막을 방법은 없다. 마법을 쏘더라도 그것보다 놈이 도망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를 테니까.
저렇게 되면 결국 쫓을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질병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진작에 무리를 잃은 역병 또한 달아나기 시작했다.
몸을 돌린 역병이 달아나자 아스터는 넌지시 물었다.
"시간을 좀 벌어야겠는데 가능하겠소?"
말 대신 손이 올라간다. 마지막 영창의 말조차 생략한 겨울의 주인이 손을 휘젓자 그에 따라 눈꽃 같은 얼음 알갱이가 반짝이더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겨울의 주인이 움직이자 그 뒤를 따라 연주라도 하듯 마법사들의 손이 하나둘 움직였다.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던 인디고 스퀘어의 마법. 후계자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물이 부유섬에서부터 마치 폭포처럼 물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불의 마법으로 잔뜩 달구어진 땅과 맞닿아 증발하더니 금세 기세를 더해 웅덩이를 만들고 폐허가 된 도시를 물줄기가 메워간다.
엉망이 된 도시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물은 죽은 무리와 오염된 찌꺼기를 모조리 휩쓸며 기세를 더해 갔고 이윽고 홍수가 되어 역병을 뒤쫓았다.
상처 입고 지쳤다고는 하나 역병은 역병. 고작 그런 물줄기 따위에 당할 리 없다.
모든 것을 녹슬게 하고 썩게 만드는 역병의 힘에선 실체 없는 마력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물이, 마력이 사라지는 속도는 절대 심상치 않다.
인디고 스퀘어만이 아니라 뇌전을 다루는 옐로우 스퀘어의, 정작 뇌전보다도 바람을 다루기 좋아하는 북풍의 주인의 마법이 물을 밀어내 그 흐름을 빠르게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세차게 파도치는 홍수는 더 이상 홍수로 남지 않았다. 해일이 된 물줄기는 기어이 역병에게 닿았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또 하나의 영창이 이어졌다.
"―――."
겨울의 주인의 차디찬 말은 짐승의 울부짖음에 들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법은 완성되었다.
흐르는 해일이 역병을 뒤덮은 순간, 쩌적 얼어붙는가 싶더니 시간이 더디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시간이 느려진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 모든 걸 얼리는 동결의 마법. 영원한 겨울을 소망하듯 불러왔을 때, 역병을 덮은 해일은 순식간에 빙산으로 얼어붙었고 그건 대기조차 예외가 되지 못했다.
마치 열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듯한 세상. 모든 게 얼어붙었고 그건 수백 미터 상공에 뜬 부유섬에서도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본질에 충실한 마법은 재앙의 발을 묶었으나 놈이 다시 움직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어붙은 대지― 허나 그것조차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진다. 얼음은 갈라지고 깨지더니 그 틈새로 흘러나온 부정한 녹색 연기가 찾아온 겨울을 녹이고 부서뜨렸다.
이미 무수히 증명된 사실. 대마법조차 역병을 죽일 순 없다.
그렇게 더러운 봄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마법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에도 실패.
네 발을 땅에 대고 역병이 부유섬을 뒤돌아봤다. 족히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을 비웃는 듯 느껴진다.
저 멀리서 마중이라도 온 것처럼 역병을 반기는 무리가 마법사들의 이를 갈게 했다.
상처 입고 지쳤더라도 역병을 쫓을 순 없다. 부유섬은 느렸고 역병은 너무나도 빨랐으니까.
부유섬의 고도를 낮추거나 직접 쫓아갔다간 썩어 문드러지거나 저들 무리의 하나가 되고 말리라. 태우고 얼렸음에도 녹색 연기는 새로이 흘러나와 자리했다.
역병이 창궐하는 와중에 놈을 쫓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이번에도 놓치고 말았다.
무리 속에 모습을 감추고 언제나 그랬듯 상처를 추스른 역병은 몇 번이고 돌아와 다시 인류를 좀먹어갈 거다.
그걸 알면서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사무친 한이었다.
―마법사들은 그랬다는 뜻이다.
하나둘,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 점차 그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미약하디 미약한 존재. 어리디어려 아직은 용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작은 존재들. 그들의 날갯짓은 고작 미풍밖에 일으키지 못했지만, 끝도 없이 모여들어 그 수가 늘어나자 천천히 녹색 연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환상의 행렬. 그 가장 앞선 곳에 난데없이 커다란 용이 나타나자 마법사들은 말문을 잃었다. 그들을 뒤따라 나비처럼 조그마한 용들이 제멋대로 지저귀는 소리가 더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을 때, 기어이 지상에 내려앉은 요정용들에 마법사들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순식간에 한 줌 핏물이 되고 말리라. 아니 그 핏물조차 남지 않아 죽고 말 터.
그런 생각과는 달리 연기는 용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녹슬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서 환상의 용들은 즐겁게 노닐며 오염을 먹어 치워갔다. 부정한 것을 먹는 요정용에게 있어 오염은 그저 먹이에 불과했으니까.
커다란 용이 날갯짓하자, 돌풍과도 같은 바람이 불어 녹색 연기가 모두 흩날려 사라지고야 말았다.
용들의 출현. 그건 놀라운 일이었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분명 호재였으나,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다.
결국 역병을 죽이지 못하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마법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홍유리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목에 둘린 아름다운 꼬리― 이 요정용이 여기에 있단 것은 알파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어느샌가 빛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기나긴 밤이 가고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온 낮은 울음소리가 모두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에 적발 소녀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환계의 용들은 그가 바란 대로 머나먼 길을 떠나 이곳을 찾았다.
마법사들은 서로 협력해 질병을 도망치게 했고 역병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끝을 맺어야 할 때. 약속을 이행해야 할 때였다.
상처 입은 짐승. 네 발로 달려 도망치려는 역병이 별안간 멈추어섰다.
왜냐하면, 앞이 보이지 않아서. 그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찾아왔는데도 역병의 앞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어둠이, 밤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 눈으로도 한 치 앞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짙디 짙은 어둠이.
"――――――."
그 어둠 속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언뜻 붉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을 때, 역병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건 밤이 아니라고.
일렁이는 그림자와 스멀거리는 안개가 새벽의 빛에도 불구하고 밤을 연상케하는 어둠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무너진 도시에서 두 짐승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