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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70화 (170/407)

〈 170화 〉 #71. vs 역병

붉은 눈과 샛노란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서로를 보고 있지만 드러난 감정은 전혀 다른 것. 담담한 마랑과는 달리 역병의 표정은 더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내려오기만 하면 모조리 찢어발길 수 있는 잡것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굴욕. 자신의 무리를 휩쓸고 역병을 흩어냈다는 불쾌함.

그리고 무엇보다 전에는 신경 쓰이지도 않던 늑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 그 전부가 역병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든 부둥켜안고 견디려는 꼴이.

긴 꼬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틈을 노리지만, 늑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게 또 한 번 역병의 심기를 건드렸다.

쥐는 앞발을 뻗었지만 늑대는 예상했다는 듯 피해 그 팔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피했다는 사실이 거슬렸으나 역병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닿았으니까.

멍청하게도 죽을 자리도 모르고 자신을 타고 오르고 있다. 상처 입고 지쳤다지만 그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다. 머잖아 한 줌 핏물로 녹아내리리라― 그 생각이 오산이었다.

금세 부패해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그래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역병은 늑대가 자신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자 놀라 몸부림쳤다.

급히 손을 뻗어 늑대를 집어 던지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뛰어내린 늑대.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상황을 역병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도대체 왜? 아니, 어떻게?

늑대의 이빨 끝에 걸린 자신의 살점을 보았을 때, 심지어 그것을 퉤 뱉고 짓밟기까지 했을 때, 역병의 눈에서 점차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미약한 이성조차 전부 날아간다. 역병의 군주는 앞발을 땅에 짚으며 일그러지게 포효했다.

생존에 대한 본능보다 늑대에 대한 분노가 살짝 웃돌았다. 이 거슬리는 늑대를 먹어 치우고 말겠다고 짐승이 울부짖었고, 시선을 피하지 않은 붉은 눈이 재앙의 실체를 꿰뚫어 보았다.

[역병을 퍼뜨리는 자(플래그 로드)]

[체장 35.4m] [체고 16.4m] [체중 259.6t]

[힘 674] [민첩 751] [체력 738] [마력 754]

격이 다른 능력치는 질병에 비해선 다소 부족해 보이더라도 재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괴물.

그나마도 개체로서가 아니라 무리로서 온전한 군주. 그런데도 지금의 늑대가 닿기에는 한참이나 먼 곳에 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늑대는 싸우려했다.

실낱같은 한 줄기 욕심이 애써 늑대를 붙잡고 있었다. 스스로 납득하기 전까지 분명 늑대는 멈추지 않으리라.

마랑의 그림자가 수십 갈래로 일어나 역병을 꿰뚫으려 했으나 닿기도 전에 전부 녹아내렸다.

실체 없는 그림자가 흐물거리더니 바닥에 스며들어 사라진다. 이윽고 땅을 박차고 거대한 앞니를 앞세운 역병이 달려들었고 늑대는 그 움직임이 눈에 익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눈에 익는 일 따위는 없었다. 가까스로 잔상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드는 짐승은 그 자체가 더 없는 위협. 역병의 턱 사이로 녹색 연기가 흘러나와 늑대의 안개와도 흡사한 모양을 갖춰 역병을 뒤따라왔다.

피부에 닿는 정도라면 녹아내리는 것보다 잠식이 먹어 치우는 게 빠르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역병의 근원인 저 연기에 닿았다간 한 줌 핏물이 되고 말리라. 늑대의 예측이 가까운 미래를 수도 없이 보고 읽었다.

그 무수한 미래 속에서 늑대가 우위를 차지하는 공방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선이 없다면 최악만을 피할 뿐. 아니,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돌진을 옆으로 피해낸 순간, 곧바로 앞발이 뻗어왔다. 핏물로 물든 손이 뻗어와 늑대의 발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 또한 미리 보았지만 대응하기조차 쉽지 않다. 미래를 보고 대비하더라도 역병은 그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먼 미래를 읽어봤자 반응에서 밀리는 이상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결정적으로 압도적인 속도. 폭풍을 두른 늑대조차 보고도 당해야만 하는 불합리함.

지치고 상처 입었더라도 역병은 늑대의 한참 위에서 노닐고 있는 괴물. 단순히 속도만으로 따지자면 질병보다도 빠르다. 여태 늑대가 상대했던 적 중에서도 최속의 괴물.

발목을 쥐려는 앞발은 피했지만 기다란 꼬리가 늑대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챘다. 척추가 찌그러질 것만 같은 압박 속에서 별안간 늑대의 모습이 사라지자 역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사라졌던 늑대는 꼬리 위에서 튀어나와 바람처럼 달렸다. 상처투성이인 역병의 전신을 밟고 뛰어올라 물어뜯기 위해 달렸다. 몸부림은 거셌지만 노련한 늑대를 떨쳐내기엔 역부족.

촉수를 꺼내 상처 사이를 헤집었으나, 그 진득한 붉은 핏물에 순식간에 녹아 늑대는 혀를 찼다.

놈의 전신이 독이요, 역병의 근원이었으니. 촉수를 끊어낸 늑대는 핏물을 밟은 순간 자신의 발이 뜨겁게 타오름을 느꼈다.

귀화를 불러 역병을 태우려했으나 오히려 귀화가 꺼졌다. 서로 간의 아득한 격의 차이가 검은 불꽃을 짓누르고야 만다.

―귀화로는 도무지 닿지 않는다.

잠식을 사용해 독을 먹어 치우는 쪽이 그나마 나았지만, 완화와 재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바닥이 거의 녹아내려 있었다.

하지만 늑대는 아직 납득하지 못했다.

기어이 등 위로 올라타 고름을 밟은 늑대는 거기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녹색 연기를 보았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등 전체에 자리한 혈관이 덮인 박동하는 고름. 이것이야말로 역병의 근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것만 집어삼키면 싸움은 한결 편해지리라. 이미 지쳐 깊은숨을 내쉬면서도 긴 꼬리가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에 늑대는 뛰어올랐으나 애초부터 꼬리가 노리고 있던 건 늑대가 아니다. 스스로 고름을 찔러 터뜨린 역병. 터진 고름에서 핏물과도 같은 진득한 녹색 액체가 흘러나왔고 그것으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늑대의 표정이 굳었을 때, 역병은 뒤이어 늑대를 노려 뛰어오르려 했다. 그 순간, 역병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일렁이는 미지의 무언가― 역병의 본능이 저것만큼은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위험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무시.

고작 잡것 따위가 펼치는 잔재주가 자신에게 닿을 리 없다고 자신한 것이다.

그 대가는 컸다. 늑대를 향해 뛰어오르려 했던 역병은 찾아온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보이지 않는 짐승의 이빨이 역병을 물어 뜯고 게걸스레 먹어치운다. 녹색 연기조차 공허는 가리지 않고 집어 삼켰다.

부정한 고름이 터져 액체가 흘러나왔고 늑대는 높은 곳에 만든 발판을 붙잡아 자신을 끌어올렸다. 촉수를 거두고 아직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역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무시하고 업신여기기를 바랐다. 그 방심이야말로 자신의 이빨이 닿을 가장 빠른 길이 될 테니까.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본다.

재빨리 발판을 만들어 밟아 거리를 벌렸고 그 뒤를 역병이 쫓아온다. 역시 자신보다 한참이나 빠르다. 따라잡히기 직전, 늑대는 두르고 있던 폭풍을 터뜨렸다.

날붙이 같은 바람이 역병의 얼굴에 자상을 남겼으나 부정한 피가 흘러나오자 폭풍조차 녹아 사라졌다.

상처를 입었음에도 역병은 끝까지 쫓아온다.

거센 바람에도 불구하고 점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연기는 잘 흩어지지 않았다.

기어이 연기 사이에서 커다란 턱이 튀어나오자 늑대는 황급히 그림자 속에 숨어들려 하다 멈추었다. 그래봤자 다음 순간 영량이 녹아내리고 말리라.

그렇게 되면 무방비. 더는 저항할 수조차 없다.

단순한 격의 차이. 그림자나 흑무로는 연기를 견딜 수 없다. 늑대의 혜견이 역병의 본질을 다시 한번 꿰뚫어 보았다.

[보유 스킬]

[역신(A)] [지배(B)] [대마력(B)] [뛰어난 은신(C)] [독 무효(C)] [마력 집중(C)] [뛰어난 재생(C)] [모든 피해 감소(D)] [가시 촉수(D)] [뛰어난 후각(D)] [탐식(E)] [간파(E)] [약한 시각(E)] [질긴 피부(E)] [열 감지(F)] [암시(F)]

역신. 그것이 오염의 근원인 녹색 연기의 정체.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존재 자체가 재앙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스킬.

가지고 있는 스킬중에 역신에 제대로 대항할 수 있는 건 역시 공허밖에 없다.

다가오는 거대한 턱을 탄력을 발해 피한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가 무수한 가시를 발출했다.

같은 스킬―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역병의 가시는 모조리 늑대의 가시에 막혀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같은 가시끼리 부딪쳤음에도 늑대의 가시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다.

그것도 당연한 결과. 경화에 잠식까지 적용된 가시를 막기란 역부족일 테니까. 결국 무수한 가시에 꿰뚫린 역병은 지독한 고통에 신음했고 그 짧은 일순간이 늑대에게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거리를 벌리고 숨을 가다듬는 늑대― 거리를 두고 싸우면 혹시 이길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애초에 속도에서 뒤쳐지는 이상 거리를 벌릴 수 있을 리 없다. 가시에 꿰뚫린 상처. 고름으로부터 잔뜩 새어 나온 액체가 일대에 연기를 자욱하게 퍼뜨리고 있었다.

상처를 입히면 입힐수록 연기는 가득해진다.

흑무로 저항해봤자 역신은 마력이 아니었으니 우위를 점할 순 없다. 귀화를 일으켜봤자 오히려 지독한 연기에 검은 불이 꺼지고 만다.

그나마 이렇게 폭풍으로 밀어내는 게 고작. 동등한 등급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힘과 속도를 비롯해 모든 스테이터스가 크게 뒤쳐져있다.

지금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것조차 놈이 지치고 다친 탓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단 걸 생각하면 그저 암담하게만 느껴진다.

늑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역병 또한 입가를 씰룩거렸다.

도무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이 정도 상처라면 진작 회복했어야 정상인데도. 앞발로 어깨를 쓸었을 때, 여전히 진득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물기는커녕 심해지고 있다.

늑대를 잡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건 인정했다. 자신의 무리도 다가오고 있지만 부유섬도 마찬가지로 가까워져 온다. 사실 마음 먹으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냥 달려 지나치기만 하면 되니까. 늑대의 발이 아무리 빨라봤자 자신을 따라잡기엔 한참이나 느리다. 그래. 그러기만 하면 되는데…

"――――――!"

그러기에는 저 붉은 눈이 너무 거슬린다―!

얼마 전에 자신을 도전하듯 보던 그 눈.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흔들림 없는 붉은 눈을 앞에 두고 달아나기엔 역병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오염된 자들의 군주는 크게 소리치며 땅을 박찼다.

높게 도약해 쫓아오는 괴물의 모습에 늑대는 잔상처럼 사라졌다. 그런데도 상관없다는 듯이 역병은 늑대가 있던 자리를 할퀴고 비집었다.

비가시화로 모습을 감춘 늑대는 그 압도적인 속도에 아연해 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졌다. 잔상조차 쫓기 힘든 속도는 그저 아연하게 느껴질 뿐.

순간, 역병의 고개가 돌아가자 늑대는 기함했다.

명백하게 자신의 위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놈에게 그런 스킬이 있었나?

아니, 아니다. 위치를 찾은 게 아니라 자신이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고 늑대는 뒤늦게 깨달았다.

역신. 녹색 연기를 흩날리기 위해 폭풍을 두르고 있었으니까. 연기가 흩어지는 곳이야말로 자신이 있는 곳이라는 뜻.

곧바로 기다란 손이 늑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조여 들어왔다. 그 사이로 공허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공허를 밀어내고 달려든다.

그 무식한 손이 피할 틈도 없이 자신을 짓누르자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땅에 처박혀 척추가 내려앉은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물론 고통은 없지만 그래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이빨 틈새로 녹색 연기가 흘러나오고 진득한 침이 흘러내려 대지를 녹인다. 목을 붙잡은 손은 비록 공허에 물어뜯겨 너덜너덜해져 있었으나 고작 그것뿐이다.

무리는 다가오고 있고 샛노란 눈은 늑대를 깔보듯 내려다본다. 점점 숨통이 조여드는 와중에 늑대는 여기까지 와서 새삼스레 느끼고 확신했다.

자신은 역병을 이길 수 없노라고. 계속 고집부리고 있다간 순식간에 죽는다. 그래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결심을 굳힌 순간, 늑대의 목을 조여들던 역병의 앞발이 검게 불타올랐다. 잿더미가 되어가는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역병은 앞니로 자신의 발목을 물어뜯어 끊었다. 잠식이 몸을 무겁게 하는 와중에 샛노란 눈이 쓰러진 검은 늑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킨 늑대의 입에서부터 타버린 듯한 검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남은 스킬 포인트 33 → 1]

그리하여, 늑대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겁화(A)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약속을 이행하고 재앙의 짐승을 먹어 치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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