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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71화 (171/407)

〈 171화 〉 #71. vs 역병 (2)

두 짐승의 싸움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군중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다르다. 그냥, 격이 다르다. 마법사인 그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싸움. 무식하고 원초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싸움이기도 했다.

그저 서로를 물어뜯기 위한 사투.

물론 그 싸움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두 짐승의 속도가 너무 빨라 잔상조차 보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이는 극소수였고 그중에는 홍유리도 있었다.

시종일관 밀리는 건 늑대. 일견 대등한 싸움처럼 보였지만 우위를 점하는 건 역병이다. 늑대가 부족한 게 아니라 역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합리였다.

"슬슬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겨울의 주인이 꺼낸 말. 그 말이 언뜻 들려오자 홍유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당연한 판단― 역병은 상처 입었고 지쳐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알파가 붙잡고 있는 동안 함께 묻어버리겠다는 심산이리라. 마법사로서 인류로서 옳은 판단이었지만 홍유리의 가슴 속엔 불안이 커졌다.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휘말리는 건 역병뿐만이 아닐 테니까.

그러지 말라고 잠자코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역병을 죽이는 것은 전 인류의 소망이니까.

일순간 스승의 눈이 자신에게 향했다.

그 눈이 묻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그 시선에 홍유리는 차마 멈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심정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알파가 이길 거라고 마냥 믿고 있긴 힘들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 괴물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강한지를. 도무지 죽일 수 없었던 절망스러운 재앙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무리 알파라도 이번만큼은 승리를 점치기 어렵다. 기대는 품고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닿지 못하는 걸까. 그럴 바에야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름이 터지고 역병의 상징과도 같은 녹색 연기가 퍼져간다. 기어이 목을 붙잡혀 바닥에 박혔을 때, 홍유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안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안타까워하는 한숨. 아쉬워하는 외마디 소리. 그 뒤를 이어 주문을 외기 시작하는 말소리가 들려오다, 끊어졌다.

"기다리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를 대신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으니까. 자연스레 내려선 목소리의 주인을 따라 수없이 많은 용이 날갯짓하고 있었다.

"백록……?"

이윽고 거대한 용이 흰 사슴을 두르듯 부유섬에 내려앉자 마법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잃었다.

"아직 그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

그 말을 뒤이어 소름 돋는 짐승의 울부짖음이 몸을 떨게 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고 거기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한쪽 팔을 잃은 역병이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늑대로부터 검은 불길이 일어났을 때, 홍유리는 눈을 부릅떴다. 늑대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건 정말로 그 검은 불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불길함을 가득 담은 듯한, 검은 마랑을 상징하는 듯한 새까만 불꽃이 늑대를 뒤덮고 있었다.

적어도 레드 스퀘어의 불을 다루는 모든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심지어는 아스터조차도 침을 삼키고 말았다.

검은 불꽃이 역병을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그 광경을 목도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멍하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마랑과 역병의 사투를.

***

[흑무(B) Lv.4가 겁화(A)에 통합되었습니다]

[위압(E) Lv.9가 겁화(A)에 통합되었습니다]

[겁화(A)― 격의 상승 1/3]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스킬 포인트를 전부 소모했다. 마침내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건 본래 늑대가 걷지 않았던 길이었다.

겁화의 길. 늑대가 선택하지 않았던 검은 불꽃. 흑무로 충분할 거라 여겼지만 그게 얼마나 오산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공허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힘이라면 겁화는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

물론 걸어간 길에 후회는 없다. 늑대는 그 선택이 틀리지 않다고 믿었으니까. 끈적끈적한 점성. 폭풍을 불러일으켜도 잘 밀려나지 않던 연기가 순식간에 불타 사라져간다.

끔찍한 연기를 불사른 겁화는 자신의 영역을 고수해갔다. 역병의 자리가 좁아지고 늑대의 영역이 커져 간다.

그에 역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늑대는 자신의 상처를 추슬렀다.

역병 또한 더디게나마 재생하고 있었지만, 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내려앉은 척추가 아직 붙지 않았으니까.

역병이 가진 C등급 재생은 유용하디 유용한 스킬. 하지만 늑대가 가진 잠식이 시종일관 상처를 갉아먹고 있다. 체력이 부족해질수록 재생하는 속도는 당연히 더뎌진다. 반대로 탈식의 효과로 체력을 앗아온 늑대의 재생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잠깐 시간이 흘러 늑대의 척추가 제 모습을 찾았을 때, 역병은 아직 팔을 완전히 재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병이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건 그 자신에게 닿을 수 있는 두 개의 송곳니― 겁화와 공허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역병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는 건 같잖은 잡것― 늑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게 거슬렸기 때문에.

허나, 그건 늑대의 주박. 놈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그럴 수 있었음에도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걸 위함이었다.

처음부터 올가미에 걸려있었단 걸 깨닫지 못하고 역병은 이를 드러냈다. 끊어진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발을 모두 땅에 붙이고 싸울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두 개의 A등급 스킬. 하나하나가 역신에 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늑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제 반반일 뿐이었으니까.

역병이 자신을 깔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만한 힘의 격차가 실제로 있었으니까.

그 고랑을 메우고 있는 건 스퀘어의 폭격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과 여태 입은 상처들.

만약 그 상처가 없었더라면 설령 처음부터 겁화를 가지고 임했더라도 승산은 적었으리라.

겁화가 연기를 불태워가자 역병은 자신이 흩뿌린 것들을 전부 되돌렸다.

늑대가 불과 바람을 가지고 있는 한 닿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일대를 덮은 녹색 연기는 끈적끈적한 액체로 화해 역병의 전신을 얇게 덮었다.

폭풍을 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깔끔하게 연기는 전부 사라졌지만, 오히려 긴장은 더해졌다. 그 자욱한 연기가 전부 모여들었으니까. 도대체 얼마나 농축돼 있길래?

역병의 몸에서 끈적한 녹색 액체가 떨어지자 무너진 폐허의 바닥을 녹이고 깊게 파고들었다.

완화? 재생? 전부 부질없다. 녹액에 닿는 순간 그 부위는 포기해야 하리라.

긴 꼬리가 이리저리 휘둘러지자 늑대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바로 달려들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아서. 액체가 아닌 연기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 녹액을 꼬리로 흩뿌리며 던지기 시작했다.

겁화와 공허 사이에 타들어 불살라졌지만, 쉽지 않다. 이렇게 된 이상 놈이 먼저 달려들 이유는 사라진 셈이니까. 필연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건 자신이어야만 한다.

곧바로 늑대가 달리자 역병은 거기에 한술 더 떠 가시 끝에 독을 바르듯 녹액을 쏘아냈다. 재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스퀘어 마스터에도 뒤지지 않는 마력을 코팅하자 늑대는 달리는 와중에 흑무를 둘렀다.

마력은 흑무에 닿아 벗겨졌고 가시를 감싼 녹액은 겁화를 넘지 못하고 불살라졌다.

녹액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연기를 거둬들인 이상 늑대 또한 고삐가 풀린 셈. 사용할 수 없었던 흑무와 그림자를 다시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바람처럼 달리는 늑대. 역병은 검은 안개 너머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머잖아 저 너머로 마랑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의심치 않고.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가 뛰쳐나오자 역병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단숨에 낚아채 분질렀다.

단숨에 찢어발겨 졌다. ―늑대의 촉수가.

닿은 순간, 촉수가 잠식해 녹액을 먹어 치우려하더니 그것보다 빠르게 녹아내렸다. 촉수가 녹아내렸을 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에 몸을 돌린 역병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거기서 달려드는 건 늑대가 아닌 그림자였으니까.

연기에조차 녹아내린 그림자가 녹액을 꿰뚫을 수 있을 리 없다. 아무 의미 없이 그림자가 흩어졌을 때, 역병이 몸을 돌리는 것보다 빠르게 고통이 찾아왔다.

가시라면 모를까 늑대에게 촉수 자체를 쏘아내는 능력은 없다. 역병이 녹인 촉수는 분명 늑대의 몸에 붙어있었던 것. 다만 비가시화와 은신을 사용해 그림자와 흑무 속에 자신을 감추었을 뿐.

약자로서 행사할 수 있는 기만을 늑대는 아낌없이 사용했다.

"――――――!"

비명을 지른 역병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겁화에 타오르는 고통은 쉽게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겁(劫)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불살라지는 건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실제로 그만큼 실속을 챙기진 못했다. 역병의 몸 위에서 겁화가 이글거렸으나 녹액을 여태까지의 연기처럼 쉽게 불태우진 못했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꼬리를 휘둘러 늑대를 노리는 역병은 타고난 짐승이라 부를 만 했다. 예측한 늑대가 뛰어올라 꼬리를 피해냈고 꼬리에서 나타나 올라오는 촉수를 그림자가 깔끔하게 잘라냈다.

잘린 촉수가 타들어가듯 도시를 녹이는 사이에도 역병의 등에서 검은 불꽃이 녹액을 불태우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같은 A등급 스킬―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액체와 불이라는 차이 이전에 늑대에게는 또 하나의 송곳니가 있었으니까.

공허. 비실체에 잠식을 적용하는 힘은 당연 겁화에도 사용할 수 있다. 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검은 불길은 녹색 액체를 불사르며 새까만 연기를 태워올렸다.

녹색 연기를 다시 불러와 녹액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겁화가 태워 만들어진 검은 연기만큼은 역병 또한 어쩌지 못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검은 연기가 흩날려 시야가 트였을 때, 역병은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늑대를 죽이면 이 불길 또한 사그라질 테니까.

뒤로 물러나려던 늑대는 등 뒤까지 무리가 몰려왔음을 깨달았다.

무리 자체가 늑대에게 위협이 되느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그깟 무리가 아무리 모여봤자 늑대에게 위협이 되진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 놈들이 벽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러날 순 없다.

늑대는 자신에게 안개를 드리웠다.

앞뒤가 전부 안 된다면 도망칠 곳은 위밖에 없다. 하지만 위로 뛰어오르려던 늑대는 흩뿌려진 녹액이 초승달을 그리며 길을 막아서자 몸을 움츠렸다.

도망칠 길이 전부 막힌 늑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바닥 아래로 숨어드는 것. 허나 그조차 불가능했다.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고 역병이 이미 코앞까지 닥쳐왔으니까.

앞발보다 먼저 뻗어오는 것은 긴 꼬리. 녹액을 두르고 있는 이상 아까처럼 그림자 속으로 숨어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잠식과 공허. 그리고 겁화에 타오르며 지칠 대로 지친 역병의 체력은 그 자신의 민첩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할 만큼 떨어져 있었다.

잔상만 보일 정도로 재빨랐던 움직임이 좀 더 뚜렷하게 보인다. 그런데도 늑대에 비하면 아득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든다.

꼬리는 피했다. 앞발도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벌어진 턱만큼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커다란 앞니에 물어뜯긴 늑대가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이미 한쪽 다리가 물린 뒤였다.

빠른 판단으로 그림자로 하여금 스스로 다리를 자른 늑대가 거리를 벌렸을 때, 역병은 보란 듯이 늑대의 다리를 씹어 삼켰다.

그 순간, 역병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본 늑대의 뇌리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아주 조금 뒤의 미래. 역병이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무리. 역병의 군주가 자신의 무리를 난데없이 땅에 처박는 모습.

그 미래를 보고 늑대는 다시 현실을 직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았던 그대로 움직이며 역병이 무리를 쥐어 들어 땅에 처박으려는 순간, 늑대는 그 행동을 저지했다. 가만둘 리 없다. 처박히던 무리는 공허에 씻은 듯 사라졌고 역병의 발은 애꿎은 바닥만을 때려 부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초감각은 이미 보여주었다. 당연히 오염된 무리에게도 역신은 스며들어있다. 역병이 하려던 것은 무리를 터뜨려 스며든 역신을, 연기를 흩뿌리려 했던 것.

의도가 막히자 열 받은 것처럼 도약한 역병이 덮쳐오자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겁화가 불태운 지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녹액이 타오르지 않은 걸까?

도약한 역병을 어떻게든 피해낸 늑대는 두 눈을 부릅떴다. 꿀렁거리고 있다. 마치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등 위에 자리한 고름이 박동한다.

이윽고 역병의 등을 가득 덮고 있는 부정한 고름이 하나둘 터져나가더니, 점성을 가진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두말할 것도 없는 녹액. 수백, 수천 리터에 달하는 치명적인 양. 역병의 몸이 부정형처럼 흘러내리는 듯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그 압도적인 양에 기어이 겁화가 꺼졌을 때, 늑대는 마른침을 삼켰다.

놈의 등 전체를 덮고 있던 고름이 마침내 전부 터졌으니까. 싸움의 끝은 머지않아 다가오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흘러내린 녹색 액체에 점차 대지가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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