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71. vs 역병 (3)
터진 고름에서부터 끝도 없이 녹액이 흘러내리자 늑대는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대지가 녹아내리더라도 발판을 만들 수 있으니 움직이는 건 상관없지만, 정작 그 대지를 녹이는 와중에 녹색 증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만큼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그 증기에 발판이 녹아내릴 테니까. 순간, 역병이 꼬리를 휘둘러 녹액을 날리자 공허를 일으켜 막아낸 늑대가 폭풍을 불러와 겁화를 밀어냈다.
이글거리는 검은 불꽃을 바람이 뒷받침하는 가운데 용암이라도 된 것처럼 흐른 녹액이 맞닿았다. 우위를 차지한 건 겁화였으나 그것도 잠깐. 흐르는 녹액의 압도적인 양이 겁화를 다시 한번 꺼트렸으니까.
터져 나온 고름 껍질이 엉망으로 나뒹구는 와중, 퍼지고 퍼진 녹액이 기어이 더 깊은 대지를 녹여가자 늑대는 이를 악물고 물러났다.
녹액의 구렁텅이 속에서 역병이 숨죽이고 있다. 도망치려 하는 건 아니다. 늑대의 주박에서 쉽게 벗어날 만큼 역병의 자존심은 낮지 않으니까. 다만 그 깊은 구덩이 속에서 놈은 상처를 재생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았다. 그 샛노란 눈동자에 담긴 건 짙디짙은 살의. 반드시 늑대를 죽이고 말리라는 의지였다.
상처 입은, 집념을 가진 짐승은 이렇게나 끈질기다.
마력조차 개의치 않고 녹여버리는 역신에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건 역신을 다루는 역병. 녹액의 구덩이 속에서 역병이 잃어버렸던 팔이 재생해갔지만, 늑대는 역병을 막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무리를 막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끝없이 달려드는 무리가 시간 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고름이 터져 흐른 녹액만 하더라도 골치 아픈데 이 많은 무리를 거둬들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가장 먼저 달려드는 쥐 떼를 불사르고, 폭풍은 연기와 함께 무리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무리는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추거나 검은 안개로 들어가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슬쩍, 늑대는 구덩이 아래를 보았다. 어느새 역병의 상처는 대부분 회복되어 있었다. 역병이 다시 움직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으리라.
[경험치가…]
무리를 먹어 치우는 와중에 레벨이 올랐을 때, 역병이 구덩이 속에서 기어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이 주변을 둘러보았을 땐, 이미 검게 타오르는 불이 둘을 감싸고 있었다.
역병의 군주이기도 한 놈에게 있어 무리는 자신의 군세인 동시에 보험. 역신이 스며든 무리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저장고이기도 할 테니까. 따라서 서로가 접촉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겁화가 둘러싸고 있는 이상 아무리 녹액을 두르고 있더라도 쉽사리 빠져나가지는 못할 터. 반대로 아무리 무리가 몰려와봤자 겁화를 넘을 수는 없다.
역병이 상처를 추스르는 동안 늑대 또한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
이젠 더 물러날 곳도 나아갈 곳도 없다.
"―――!"
녹아버린 대지. 검게 불타는 땅에서 두 짐승이 끝을 향해 치달으며 울부짖었다.
***
아침이 밝아왔음에도 칠흑 같은 불이 타올라 밤을 불러왔다.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불길한 불꽃이 밝아온 빛조차 집어삼키는 듯했다.
수백 미터 상공. 높디높은 부유섬에서조차 검은 불꽃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마력조차도 검은 불꽃 너머를 감지할 수 없었으니까.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치닫는 사투.
"……."
감히 끼어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돕는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본래 무리는 테헤란만이 아니라 이란의 동부 전역을 덮을 만큼 셀 수 없이 많다는 뜻.
하지만 그 전부가 무너진 테헤란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자 마법사들은 침음을 금치 못했다. 오랜 시간 역병과 싸워온 그들로서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은 없다.
역병의, 군주의 위기를 깨달은 무리가, 군세라 불러야 마땅할 셀 수 없는 무리가 한데 모여들고 있다.
그것은 마랑이 역병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더없는 증거이리라.
"……."
스퀘어 마스터들은 다가올 끝을 준비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게 주문을 영창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마법― 대마법을.
검은 불꽃이 사그라들고 나타난 것이 역병이라면 그들의 마법은 망설임 없이 쏘아지리라. 그리고 마랑이라면…
…물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암담하다고 여긴 상황에서조차 흰 사슴의 말마따나 마랑은 아직 싸우고 있었으니까.
마랑이 재앙을 먹어 치울 것인가 아니면 마랑 또한 재앙에 집어 삼켜지고 말 것인가.
싸움의 끝은 머지않아 다가온다.
그를 위해 하다못해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이 흰 사슴에게로 향했다.
그런 마법사들의 시선을 알고는 있는 건지 흰 사슴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한 눈으로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서려 있다.
왜 말리지 않았겠는가. 말렸음에도 늑대는 듣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멈추지 않았고 나아가고 있었다.
"가지 말게."
조용히 읊조리는 말은 사실 그 자신도 하고 싶지 않았던 말. 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백록은 그게 고집 피우고 있다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듣지 못했다는 듯 기어코 내려가려는 어린 용을 붙잡은 백록이 말을 이었다.
"고작 한 번 탈피했다고 무언가 극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네. 저런 싸움에 끼어들 순 없네."
역병과 늑대. 둘의 싸움에 끼어들 수 있는 건 적어도 이 자리엔 아무도 없다. 또한, 가부를 떠나 그가 원치 않으리라. 하물며 이 어린 용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로서는 더더욱.
다소 실망한 듯한, 시무룩한 울음소리에 백록의 깊은 눈이 조금 떨어진 곳을 보았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겠지."
그래. 늑대와 역병의 싸움에는 끼어들 수 없다.
하지만 무리를 막는 정도라면 가능할 터. 마법사들의 시선이 환수들에게 향해있듯, 백록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을 향했다.
***
이 자리에 유일하게 겁화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소녀는 그 사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마 여기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쓰러뜨릴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거라 생각했다.
환영의 나비와 싸울 당시, 늑대와 역병에게는 그만한 차이가 있었다.
아니, 아직까지도 늑대와 역병에게는 크나큰 격차가 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늑대의 송곳니는 역병에게 닿고 있다.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처입히고 지치게 했으며 환계의 생물을 데려오기까지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을 도움을 청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 도움마저, 자신을 돕게 한 것마저 늑대가 만들어 낸 결과. 덕분에 늑대의 이빨은 역병에게 닿고 있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데 죽을 뻔한 위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환영의 나비와 싸우고 질병에게 먹힐 뻔했으며 역병과 대적하는 지금까지도.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살아있다는 것.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얇은 사선 위에서 노닐면서 그 눈동자엔 한 점의 망설임도 없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걷는 길에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간다.
덧없게 타오르는 그 모습이 소녀에게는 더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주 오래전, 자신에게도 그랬던 때가 있었으니까.
잃어버린 자들의 희망이 촛불처럼 자신을 불사르는 모습을 소녀는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렇게, 끝은 서서히 다가온다.
***
역병과 싸우며 늑대는 까다롭다고 느꼈다.
서로의 송곳니는 서로를 물어뜯기에 충분할 만큼 날카롭다. 하지만 자신이 역병을 죽이기 위해선 한 번으로는 안 된다. 공허로 물어뜯어도, 겁화로 불태워도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물며 녹액을 두르고 있는 지금에서야 더더욱.
반대로 놈에게 필요한 건 딱 한 번의 기회. 붙잡고 짓누를 잠깐의 시간. 녹액에 제대로 닿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하물며 놈의 속도는 여전히 자신을 한참이나 웃돌고 있으니까.
미리 보고 움직이지 않으면 대응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미리 보았다면 싸울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격차는 그만큼이나 줄어들어 있다. 상처는 재생하더라도 잃어버린 체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으니까.
폭풍을 둘러 증기를 몰아내고 새장처럼 둘린 겁화의 원 안에서 비스듬히 공중을 달리며 늑대는 역병의 움직임을 읽었다.
맹렬히 쫓아오는 역병의 꼬리가 녹액을 던졌고 그것을 피한 순간, 벽처럼 둘러 타오르는 겁화에 닿아 순식간에 타올랐다. 겁화는 증기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웠고, 늑대는 곧바로 가시를 쏘아냈다.
경화된 가시. 겁화에 녹액이 타들어 간 것처럼 가시 또한 녹액을 뚫지 못하고 사라졌다.
어느새 등 뒤까지 바싹 쫓아온 역병에 섬뜩함을 느끼고 늑대는 공허를 일으켰다. 뻗어온 촉수가 순식간에 씹어 먹히고 역병에게 달려들었다.
그 아지랑이 속에 보이지 않는 늑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게걸스레 역병을 물어뜯었고 녹액에 닿아 사라지고 만다.
공허가 녹액을 먹어 치웠다면 역신도 마찬가지로 공허를 녹여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늑대가 가진 송곳니는 아직 남아 있었다. 공허가 먹어 치운 녹액의 틈새 사이로 늑대에 의지에 반응해 검은 불꽃이 타올라 이글거렸다.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 기다란 꼬리가 늑대를 쳐내려 했으나 그 또한 미리 읽어 피해낸 늑대는 발판을 없애자 떨어지기 시작했다.
녹액은 끝도 없이 대지를 녹여 깊은 고랑을 만들었던 것. 늑대가 바닥없는 바닥으로 떨어지자 역병의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꼬리를 피하려다 판단을 실수했다고 역병은 그리 생각했다.
저 아래로 떨어지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떨어지는 늑대를 뒤쫓아 역병 또한 뛰어내렸고 마지막 남은 바닥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이젠 발 디딜 틈 없는 완전한 낭떠러지.
바닥에 가득한 녹액에 늑대의 그림자가 비치는가 싶더니 훨씬 거대한 그림자가 가려온다.
재앙의 괴물. 떨어지는 늑대를 놓치지 않겠노라 역병이 뒤쫓아오고 있었던 것.
그 순간, 늑대는 강하게 염원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하염없이 바랐다. 낭떠러지 아래서 증기가 치솟는 와중에도.
어느새 녹색 증기가 만연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겁화의 안, 공기 대신 흐르고 있는 건 오직 녹색 증기뿐. 그에 역병은 승리를 직감했다.
증기의 농도가 진해질수록 늑대가 두른 바람은 옅어져만 간다. 그조차 완전히 꺼지고 녹액의 구렁텅이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역병은 어쩐지 뜨겁다고 느꼈다.
"―――?!"
넓게 둘러싸고 있던 겁화가 늑대의 의지, 바람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 아니, 조여들고 있다…!
구렁텅이를 검은 불이 덮으려 하고 있었다. 녹액의 양에 겁화가 꺼졌다면 마찬가지로 커다란 불을 일으킬 뿐. 둘러싸고 있던 검은 불꽃은 단순히 무리와 역병을 떼어놓기 위함이 아니었던 거다. 불꽃에서 불길로. 불길에서 마침내 커다란 화마가 된 겁화가 증기를 내리누르며 불사르기 위해 다가온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 전에 늑대가 구렁텅이에 빠지는 게 먼저일 테니까. 녹색 증기가 만연한 장소에선 마력으로 발판도 만들지 못하리라. 늑대가 죽으면 결국 저 검은 화마도 사라지고 말 테니까.
순간, 늑대가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구렁텅이에 빠진 건 아니다. 바람이 사라지고 대신 두르고 있던 공허를 포기한 것. 공허가 사라지자 녹색 증기가 늑대를 천천히 녹이기 시작했다.
그에 역병은 늑대가 포기했다고 여겼다. 도망칠 방법이 없다고.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언가가 역병의 뺨을 스쳤다. 그것은 바람. 허나 어떻게? 한 줌의 대기도 없어 숨 쉬는 것조차 불가능한 이곳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세고 난폭하게 휘몰아치는 폭풍이.
대기가 없는 장소에서 불어온 바람은 녹색. 사라진 대기 대신 녹색 증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늑대의 전신이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경화와 완화조차 증기 속에서 늑대를 지켜주진 못한다. 반대로 역병에게 증기는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 증기는 역병이 가진 역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거기서 역병은 역시 늑대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바람이 폭발했다.
"――――――?!"
눈을 부릅뜬 역병은 구렁텅이에 떨어지기 직전, 늑대가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녹색 증기를 터뜨린 늑대는 벌써 자신이 상당히 녹아내렸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떠오르는 늑대와 떨어지는 역병의 시선이 교차해 같은 높이에서 마주친 순간, 역병은 꼬리를 휘두르고 손을 뻗었다.
빠르고 정확하다.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상처 입고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의 짐승은 여전히 끔찍할 정도로 강하다. 탄력을 발한 순간, 긴 꼬리가 아슬아슬히 늑대를 비껴갔으나 아직 팔이 남아있었다.
정말로 끝이라고 역병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늑대가 자신의 손을 피할 방법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 눈에 들어찬 것은 포기가 아니라 각오. 필사의 각오였다. 여전히 붉은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다.
―어째서?
역병의 손이 늑대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없었으니까.
역병이 깨닫지 못했을 뿐 진작부터 공허가 먹어 치우고 있었다. 추락하는 중,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기꺼이 증기에 녹아내리는 걸 감수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야만 이길 수 있었으니까.
급히 턱을 벌려 늑대를 씹어 삼키려했으나 역병의 이빨에 닿은 거라고는 녹색 증기 뿐이었다.
검은 불 사이로 너덜너덜하게 녹아내린 늑대가 검은 불꽃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황망히 바라보며 역병은 녹액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풍덩, 녹액이 치솟았고 곧 거대한 화마가 구렁텅이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