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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73화 (173/407)

〈 173화 〉 #72 쓰러진 재앙

겁화가 구렁텅이를 덮자 단말마와도 같은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역병이 울부짖는 가운데, 몸부림치는 기척은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올라오지는 못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늑대는 거친 숨을 뱉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호흡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녹색 증기가 마냥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게 촉수를 뻗으며 변이까지 사용해 안간힘을 써 발악한 결과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 살아남았다. 살아서 그 녹색 증기 밖으로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목 아래가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심장이 뛸 리 없듯이 늑대의 생물로서의 기능은 정지해있었다.

그나마 남은 의식조차 희미해져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모조 엘릭서. 그걸 마셔야만 한다.

늑대는 촉수를 뻗어 수납을 열었고 모조 엘릭서의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마셔본 적 없는 맛이 혀에 닿은 순간, 사라진 목 아래가 100분의 1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완전히 재생하는…… 그게, 늑대가 본 미래였다.

하지만 그 미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촉수를 뻗어 수납을 열고 싶었지만 그 짧은 사이에 악화되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아니, 스킬이 반응할 만한 미약한 의식 혹은 자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거였다. 극기가 없었더라면 그 희미한 자아조차도 남아있지 않았으리라.

점차 흐려가는 시야 저편에 늑대의 눈에 보인 건 몰려드는 역병의 무리.

…이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급박한 상황에서 역병을 쓰러뜨리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아쉬움은 있다.

기어이 코앞까지 다가온 무리가 손을 뻗어 늑대의 머리를 들어 올렸고, 그 턱이 벌어지는 것에 늑대 또한 마주 턱을 벌려 자신을 잡은 손목을 씹었으나… 그저 이빨이 닿았을 뿐, 씹을 만한 일말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에 늑대는 죽음을 직감했다.

직감했지만… 그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작은 바람이 늑대의 뺨을 간질였다.

그리고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냉기가 끊어지기 직전의 의식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러는 중 시야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늑대를 잡고 있던 무리 중 하나가 커다란 얼음송곳에 꿰뚫려 나가떨어지자 손을 놓치고 만 것. 그렇게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누군가가 자신을 받자 늑대는 그 누군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가 않았다.

녹색 증기는 늑대의 안구를 녹여버렸고, 스킬조차 반응하지 않을 만큼 의식은 흐려졌으니까. 이제 그것을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지조자 의문일 만큼.

"……."

말없이 끌어안는 손에 몸을 맡긴 늑대는 그게 익숙하다는 걸 느끼고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떨어져 자신의 입가에 닿았을 때, 감각은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붉은 피… 건네주었던 자신의 피였다.

들이킬 수조차 없었지만, 마개를 딴 그녀는 늑대의 머리에 용혈을 뿌렸다. 작은 양이지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스며들어 흐릿한 시야가 조금 뚜렷해졌다. 그러자 어느샌가 환계의 수없이 많은 용이 비행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창공을 노니는 날갯짓을 보고 있는 사이, 늑대를 향해 한 마리 용이 춤추듯 내려왔다.

크고 작은 두 쌍의 날개와 뱀보다는 용에 가까워진 몸. 다른 요정용들에 비해선 여전히 컸지만, 원래보단 작아진 모습. 자색과 에메랄드색이었던 몸은 좀 더 다채로워져 신비한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 것 따윈 전부 상관없다.

보는 순간, 그게 페리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아름다운 꼬리가 자신을 휘감았을 때, 선명한 빛가루가 스며들었다.

부정함을 먹는 용. 상처를 회복시키는 힘을 가진 요정용의 빛가루가 늑대에게 스며들어 침몰하는 의식을 끌어올려 부양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의식이 뚜렷해지자 늑대가 가진 것들이 반응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머리가 씨앗이라도 된 것처럼 발아했고 싹을 틔우는 것처럼 사라진 목 아래가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습니다. 재생(D) Lv.10 → 뛰어난 재생(C) Lv.1]

한층 나아간 재생이 늑대의 몸을 재구성해 간다. 머리를 붙잡힌 채로 몸이 생겨나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재생이 응답하는 것에 뒤따라 또렷해져가는 의식에 스킬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각, 청각에 이르러 시각까지. 다시 뜬 눈이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엉망이 되고 지쳐있는 데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마력까지 전부 사용해 기진맥진한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겠다는 듯 끌어안은 걱정 서린 표정을.

"……괜찮으세요?"

상냥한 말소리. 용과 소녀에 둘러싸인 늑대는 백소율의 얼굴을 잠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요정용들이 날아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대지가 초토화돼 간다. 그건 늑대 자신과 역병이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법이 퍼부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유섬에서 내려온 많은 마법사가 싸우고 있었다. 자색 나비와 요정용들이 어우러져 춤추고 무리를 밀어내고 또 막아내고 있다.

마침내 다시 온전해진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메시지 중에 그가 찾는 말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쟁과도 같은 폭음과 굉음 속에서도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잘 들린다. 깊은 구렁텅이에서부터 만신창이가 된 그것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역병. 새까맣게 타올라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다. 가까스로 살아있는 이유는 늑대의 의식이 옅어져 겁화가 사그라졌기 때문에. 비록 만신창이에 지칠 대로 지쳐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

고개를 쳐들어 울부짖는 괴물의 울음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마력이 담긴 살기등등한 울부짖음에 시선이 집중된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처음보다 더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검은 재앙에 백소율을 비롯해 그 모습을 본 모든 이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압도적인 위용. 그리고 살기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덜덜 떨리는 다리는 좀처럼 뇌의 신호를 듣질 않는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공포가 각인된다. 부유섬의 위가 아니라 정말 닿을 수 있는 자리에서 가까이에 있는 역병. 그제야 재앙이라는 말을 실감하고야 만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역병은 역병. 단순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전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무리의 움직임은 빨라지고, 뒤늦게 정신 차린 마법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스퀘어 마스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 전역을 덮었던 그 숫자. 수십 또는 수백 만에 달하는 무리는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끝없이 밀려와 어쩔 도리가 없다.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중 역병에게서 녹색 연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혼란이 심화되기 시작했을 때―

"―――."

깊은 심연에서 들리는 듯한 낮은 울음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불길함. 마치 심장이 붙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그들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퍼져나간 영량이 마치 가지를 뻗듯 그림자를 지배해나갔다. 자르고 먹어 치우고를 반복한다. 뻗은 그림자가 가지라면 그 뿌리는 영량. 그 시작점엔 검은 마랑이 서 있었다.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늑대는 검게 불타오른 역병과 시선을 마주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달려드는 역병이 사라진 손 대신 턱을 벌려 씹어 삼키려 했을 때, 늑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늑대의 양옆에는 용과 소녀― 페리와 백소율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늑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역병의 이빨이 늑대에게 닿는 것보다도 빠르게 늑대가 가진 두 개의 송곳니, 겁화와 공허가 불태우고 먹어 치우는 게 더 빨랐으니까.

달려들던 짐승의 발이 굳어 걸음이 점차 느려져 갔다. 기우뚱 괴물의 몸은 바닥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흙먼지조차 집어삼킨 겁화가 사그라졌을 때는 마랑의 발치엔 역병이 쓰러져있었다.

마침내, 재앙의 짐승은 그 숨을 거뒀다.

수십 년간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간 주된 원인이었던 재앙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에 따라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군주가 쓰러지자 무리 또한 바닥에 몸을 뉜 것. 역병의 무리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쓰러지자 가려져 있던 시야가 트였고 검게 불탄 괴물의 모습을 보았을 때, 믿기 힘들다는 것처럼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그들만큼은 질리도록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역병이라는 괴물이 어떠한지. 어떤 괴물인지를. 죽여도 죽지 않는 무리의 주인이, 그 군세가 쓰러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득한 정적을 깨고 다가오는 발굽 소리가 다가오자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기어코 해냈군. 축하하네."

백록의 말에 늑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벅찬 가슴이 들어차 있었다. 알고 있는 가장 큰 네 가지 재앙… 마침내 그중 하나를 걷어냈으니까.

하지만 군중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인류에 드리워진 멸망의 암운이 걷히고 무너진 도시 테헤란에 싸늘한 평화가 찾아왔다.

***

결국, 성공하고야 말았다.

한참이나 격이 높은 상대와 맞싸워 그는 기어이 승리를 쟁취해냈다. 그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모든 건 그가 만들어내고 쟁취해낸 것. 거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당장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를 훌륭하게 쓰러뜨렸다…….

덕분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여기서 역병이 쓰러져서는 안 됐는데.

물론 보고 있으면서도 방치한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저 싸움에서만큼은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으니까…….

감정이 담긴 한숨을 쉬며 하늘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쓰러진 재앙을 보고 마법사들은 침묵했다.

인류를 몰아넣던 재앙 중 하나는 쓰러졌으나 그 위업은 인류의 손으로 해낸 게 아니었으니까. 또 한 마리의 괴물. 불길한 검은 마랑을 앞에 두고 그들은 침음을 금치 못했다.

가슴 속을 파고든 본능적인 두려움. 생물로서 포식자를 본 피식자의 반응. 재앙을 쓰러뜨렸다는 건 마랑이 원한다면 또 다른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싸늘한 평화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였다. 긴장이 깊어져 갈 때, 아스터는 마랑을 향해 다가가는 자신의 제자를 보았다.

―그럴 순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생각으로 아스터는 가장 먼저 마랑에게 말을 걸었다.

"마랑이여."

백록과 대화하고 있던 늑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 아니, 늑대만이 아니라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꺼내는 건 물론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에는…

아스터의 시선이 잠깐 홍유리를 향했고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역병을 쓰러뜨리는 것에 대체 무엇을 요구했을까? 무엇을 바친다고 약속했을까? 설마하니 마랑이 재보를 탐낼 리는 없을 터. 목숨? 수명? 어쩌면 그의 생각 밖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역병을 쓰러뜨려 주었다 한들 차마 제자의 목숨을 바칠 순 없다. 그런 마음에서 아스터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시오."

"아, 아스터 님!"

누군가의 부름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늙은 몸이나 스퀘어 마스터라는 자리에 있소. 그 아이의 스승이기도 하니 대신해도 부족함은 없을게요."

각오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역병을 쓰러뜨린 마랑 그리고 그 마랑을 돕는 미지의 용들과 사슴을 생각하면 그를 적으로 두었다간 또 다른 재앙이 되고 말 테니까.

결연한 각오와 함께 다시 눈을 뜬 아스터는 고개를 모로 꺾은 마랑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제자의 끔뻑거리는 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밝아온 아침과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어색하게 내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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