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72 쓰러진 재앙 (2)
역병을 먹어 치우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 짧은 시간도 아니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도무지 시선이 떼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무시하고 포식을 시작하니 놀라워하는 감탄이 종종 뱉어지는 것을 청각을 비활성화해 애써 무시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까. 비록 늑대 자신은 느끼지 못했지만, 역병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덩치를 불리는 모습은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으음…"
아스터의 깊은 눈조차 늑대의 겉을 감싸고 있는 업의 문양을 뚫지 못한 채 막히고 말았지만,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마랑의 종족 명이 먹어 치우는 자라는 건 알게 되었으니까.
물론 들어본 적조차 없다는 점에서 종족명을 알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역병을 먹으며 점점 커지는 모습은 정말 그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런데…
떨떠름해 하는 아스터의 옆에 선 홍유리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러게 왜 설레발을 쳐요?"
"……."
"목숨을 바치긴 개뿔… 휴. 말을 말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체면이라도 지키기 위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준다는 말에 끄덕일 수밖에 없다. 믿기 어렵지만 정작 마랑과 싸웠다는 환영의 나비 본인이 마랑을 보증했으니까. 애초에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한 마랑은 기어이 역병을 전부 먹어 치웠다.
[멸망 확률 84.15% → 60.63%]
[23.52%만큼의 업을 획득했습니다]
과할 정도로 내려간 멸망 확률. 시스템의 말소리가 다시 한번 역병의 죽음을 확인시켜준다. 놈이 어떠한 괴물이었는지까지를. 먹어 치우는 동안에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려온 시스템 메시지. 먼저 스테이터스부터 확인했다.
[불길한 마랑(먹어치우는 자{Swallower}) Lv.44]
[EXP 2321601 / 2798452]
[업 28.27%] [영량(影量) 141.37m³]
[체장 8.62m] [체고 3.37m] [체중 3.32t]
[힘 432] [민첩 471] [체력 521] [마력 589] [극기 50]
먼저 스테이터스가 큰 폭으로 늘었고… 모르는 사이 극기가 30에서 50으로 늘어있었다. 환영의 나비 때문일까? 아니면 녹색 증기에 당해 죽기 직전까지 몰려서? 어쨌든 극기가 올랐다는 건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시선이 애써 외면하던 경험치에 닿았을 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도 없이 치솟는 경험치 폭. 28레벨 당시 147만이던 경험치가 44레벨에 이르러 280만까지 치솟았으니 아주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31레벨에서 44레벨까지 단숨에 레벨이 상승했다. 달성 조건 또한 역병이었을 터. 놈이 준 경험치가 그만큼 어마무시했단 게 그나마 위안이었지만… 40레벨에서 멈추지 않고 44레벨이 된 것을 보면 다음 진화는 아마 50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진화에 대해선 추측밖에 불가능하다. 그에 대해선 역시 시스템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여태까지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소모되는 업은 10배 증가해 100%여야 하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 어쩌면… 다른 요소가 필요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진화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역병을 쓰러뜨리고 획득한 업은 23.52%. 여태 얻은 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단번에 획득한 셈. 하지만 그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였으니.
애초에 멸망 확률이라는 것 자체가 인류의 모든 위협을 걷어낸다는 뜻이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지금은 시스템의 자아인 단세혁이 말했던 건 자신이 했던 만큼 인류의 멸망을 걷어내라는 것. 방법은 다르더라도 단세혁이 없는 세상에서 그가 했던 것만큼 기여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멸망 확률은 타인이 아니라 늑대의 행동으로밖에 줄어들지 않는다.
원작에서 단세혁은 질병과 역병을 쓰러뜨리고 네버랜드를 공략했으며 이단의 탕아들을 와해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자색의 흑호와 바다의 재앙은 쓰러뜨리지 못했고 만상의 주인에 이르러선 그 정체만 어렴풋이 유추했을 뿐. 단세혁이 했던 일. 그 전부가 100%의 멸망 확률의 정체였다.
아무튼 여왕이 말했던 대로 멸망과 종말은 별개라는 것.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몇 년이나 지난 때였던 만큼 훨씬 더 많은 던전을 공략했기까지 하다. 획득한 업은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정도였다.
"……."
거기까지 상념을 끝낸 늑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시선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일단 역병을 쓰러뜨린 것이니 좀 더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괜히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뀨우우우!!"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달려드는 페리를 반겨주었다. 페리가 가까이 오자 요정용들이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되게…"
놀란 듯 입을 가리는 백소율이 조금 어색했다. 그녀 자체가 어색한 게 아니라 눈높이가 달라져서.
"…커다래지셨네요."
까치발을 세운 백소율의 손이 아래턱에 간신히 닿았다. 그에 고개를 내려주자 조금 편해졌는지 까치발을 내렸다.
백소율을 보고서야 확실히 커다래졌다는 걸 뒤늦게 실감했다. 따지고 보면 몸길이가 8m에 체고마저 3m를 넘게 된 이상 어지간한 코끼리보다 더 커진 셈이니까.
심지어 아직 50레벨을 달성한 것도 아닌데. 다음 진화가 있다면 어디까지 커질지 기대가 되기는 한다.
모독자 때와는 다르다. 변화로 소모되는 마력 정도야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으니까. 새삼 덩치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환수들에 둘러싸인 늑대의 시선이 돌아갔다.
마법사― 스퀘어 마스터들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
붉은 현자. 겨울의 주인. 북풍의 주인. 환영의 나비… 늑대는 그들의 면면을 보고 만상의 주인이 오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마랑과 스퀘어 마스터들의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라고는 해도 거의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늑대가 새삼 그들에게 궁금한 게 있지는 않았던 만큼 질문의 대부분은 마법사들이 했다. 다만, 서로 같은 생각이겠지만 질병 토벌에서도 협력을 바라고 있으니만큼 선을 넘는 듯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예전에 강태준이 물었던 것과 비슷한 정도. 거기에 대한 답 또한 비슷해 별다를 게 없었다.
"이단의 탕아들…"
침음섞인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아넬라와 아가일의 일도 있었으니 스퀘어 마스터라면 아주 모를 수는 없을 터.
"놀랍군…"
아스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믿는 게 쉽진 않았지만, 여명에서 지내기까지 했다는 홍유리의 말을 믿지 않을 순 없다. 게다가 환영의 나비 또한 늑대의 말을 거들었고. 무엇보다 직접 대화해 본 마랑은 감출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지는 미지의 존재이기는 했으나 악함과는 거리가 있고 말에선 지성이 느껴지고 있다.
"……흠."
제자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아 아스터는 마른세수를 했다. 지레짐작으로 목숨을 바치느니 마느니 하는 헛소리를 했으니 얼마나 뜬금없이 느껴졌을지… 어쩌면 영감탱이가 노망이 왔느냐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새삼스레 수치심이 올라왔으나 마법사로서 쌓은 수양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뒤는 자연스레 환계의 존재― 백록과 용들에게 이어졌으나 늑대는 그 질문에만큼은 자신을 도와주러 온 이들이라고 일축했다.
환계의 존재들을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백록이 있는 한 자신이 멋대로 말하는 건 주제넘을 테니까. 백록과 마법사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걸 보며 늑대는 스킬을 확인했다.
[보유 스킬 목록]
[A] - 겁화↑ (2)
[B] - 폭풍, 잠식↑ (6)
[C] - 초감각, 혜견↑ (8)
[D] - 독 내성↑ (10)
[E] - 약한 육감 (3)
[F] - 요정어 (1)
[남은 스킬 포인트 15]
위압과 흑무가 겁화에 통합되며 전체 스킬의 가짓수는 줄었지만, 스킬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니 상관없다.
가장 급성장한 스킬은 독 내성이었는데,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E등급 초반에 머물러있던 스킬이 단번에 D등급까지 일거에 성장했다.
하지만 싸운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닌 역병이었던 만큼 독 내성이 상승한 건 오히려 당연한 일. 심지어 역신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몰렸으니.
그렇게 잠깐 보고 있자니 홍유리가 다가왔고… 늑대는 그녀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 왜? 뭐 묻었어?"
자기 얼굴을 가리키는 홍유리. 그에 늑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보고 있던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늑대의 표정이 잠깐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홍유리(변혁 중)]
―그도 그럴 것이 인간으로 표시돼야 할 그녀의 종족이 변해 있었으니까.
***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환계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한 함구 해달라 부탁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많은 마법사가 목격한 만큼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퍼지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라도 해둔 이상 노력 정도는 할 터.
"그럼…"
질병에 대한 대처까지 서로 간에 필요한 대화는 나눴다. 비록 모습은 감춰달라는 부탁은 받았지만, 스퀘어에 정식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모습을 감추는데 뭐가 정식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대한 사정은 이해하고 있는바. 사람들 앞에서 본신을 드러내는 건 늑대 자신 또한 꺼리고 있었으니까.
이젠 일부러 위압을 사용하지 않아도 마랑이라는 정체성과 칭호의 효과로 인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겨주고 만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인 도로시마저 쓰러진 걸 떠올려보면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본신은 드러내지 않는 게 맞으리라.
"시작할 텐가?"
백록의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과 대화는 나눴지만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정용들의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애초에 역병의 무리를 막기 위해 부른 게 아니었으니까. 이곳, 이란에서 유럽의 서쪽 끝까지. 역병에 의해 멸망한 유럽의 부정을 먹어 치워주길 바랬을 뿐.
그런 의미에서 요정용이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역병으로 인한 오염을 처리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물론 아직 질병이 살아있다는 위험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언제든 환계로 이동할 수 있는 환수들인 데다가 오래된 용 또한 함께 있으니 정말 위험한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터.
마음 같아서는 질병도 지금 당장 처리하고 싶었지만… 역병이 사라진 이상 놈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예 모습 자체를 감춰 땅 속에 숨어버리면 놈을 잡을 방법이 사라지는 거였으니까.
일단 당장 급한 건 질병보다도 홍유리였다. 종족이 변혁하는 건 십중팔구 용혈 때문일 터. 그 일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종족이 변한다는 건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처음엔 태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 반드시 실감이 오리라. 그때가 되어서도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그게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늑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가능하면 막아볼 테지만… 변혁을 막는 게 쉽지는 않으리라. 늑대는 짧게 한숨 쉬었다.
이렇게 될 거라면 차라리 용혈을 주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어련히 알아서 할 거라 생각했지만 도로시에 대한 경쟁심이 불을 지핀 모양.
그에 자연스레 나비의 성에서 보았던 도로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홍유리가 갖지 못한 대마력까지 가진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 그래. 저번에도 딱 이 정도 거리를 두고 도로시가 있었는데…
"……?!"
마력을 회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어째선지 도로시와 눈이 마주친 늑대는 한숨을 쉬었다.
홍유리 때를 생각하며 당연히 기절할 거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도로시는 자신을 지나치는 당당함을 보였고 그에 늑대는 감탄했다. 역시 스퀘어의 후계자가 괜히 된 건 아니라는 걸까?
…감탄은 딱 거기까지였다.
늑대를 지나치자마자 무언가가 침몰하듯 쓰러졌으니까. 자연스레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아스터만이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물론 제자의 일은 안타깝지만, 덕분에 수치심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서… 그는 멋쩍게 헛기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