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73 변혁
레드 스퀘어, 홍유리의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늑대는 생각을 정리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단 가장 급한 건 홍유리의 변혁을 막는 것. 시스템과 만나는 건 그다음에나 할 일이다. 어차피 50레벨은 아직 달성하지 못했으니까.
"뀨우우~!"
"얜 또 왜 이래?"
유난히 반기는 페리를 겉으론 싫은 척 받아주는 홍유리와 그걸 부러워하는 백소율의 모습. 이제 막 돌아와 피곤할 테지만 이 말만큼은 미리 해둬야겠다.
변혁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굳은 표정으로 할 말이 있다는 늑대에게 백소율과 말을 나누고 있던 홍유리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뭐 중요한 얘기? 얜 들으면 안 되는 그런 거야?"
물론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겠지만, 알게 모르게 침울해하는 백소율의 표정을 보자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한숨 쉰 늑대는 진중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맞지만 네 일이다. 너도 뭔가 느낀 게 있을 텐데."
종족이 변해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분명 어떠한 징조가 있었을 터.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을 마시고 살덩이 키메라로 변이한 구마준과는 경우가 다르다.
변이가 외부 요인에 의한 부정적 변화라면 변혁은 외부 요인에 의한 긍정적 변화. 적어도 혜견이 알려준 바로는 그랬다.
감정을 빼고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그녀는 생물 종으로서는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스스로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했는지 홍유리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물었다.
"너 뭔가 알고 있어?"
"용혈."
"……씹."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키는 그녀. 100%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몬스터도 아닌 인간이 종족이 변하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으리라. 그런 경우는 이단의 탕아들. 그 간부들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변혁이 아니라 변이나 타락에 가까운 것이었고.
"…서, 선생님?"
갑작스레 뭔가를 보았는지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비비는 백소율. 그 시선을 따라 목 뒤를 긁은 홍유리는 딱딱한 무언가가 손톱과 부딪치자 와짝 표정을 찌푸렸다.
처음엔 벌레가 앉았나 생각했지만, 피부와 붙어 있는 비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거꾸로 돋아난 비늘. 곧바로 역린이라는 단어가 생각났고 불쾌함에 뜯어내려던 홍유리는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알고 이를 갈았다. 피부를 뜯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떼어내려 했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씨발. 어쩐지…"
페리가 유난히 달라붙던 게 이 때문이었던 모양.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홍유리를 보며 늑대는 말을 이었다.
"너는 변하고 있다."
붉은 비늘을 보건대 십중팔구는 용에 가깝게. 래서 슬라임에서부터 먹어 치우는 자까지 수많은 진화를 거듭한 늑대와는 달리 인간으로 살아오며 종의 변화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그녀에게 변혁이란 갑작스러운 것일 터. 오히려 패닉에 빠지지 않는 게 대견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는 홍유리의 눈에도 늑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막아봐야지."
언제나처럼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늑대는 계속 궁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 바뀌는 걸 막을 방법으로 짐작 가는 게 없다.
원작에서도 비슷한 경우는 있었다. 변이를 막으려 한 적이 있었고 실제로 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변이의 근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 들이켠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을 토해내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홍유리는 진작에 용혈을 소화했을 터. 지금쯤 그녀의 혈관을 타고 달리고 있을 텐데 용혈만 깔끔하게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미라라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요인을 제거해 변혁을 막는 건 무리라는 뜻이다.
피곤이 찾아온 건지 홍유리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다. 역병을 쓰러뜨린 아침. 견디고 견디던 홍유리는 곧 백소율과 함께 잠에 들었고 지켜보던 늑대는 결국 저택을 나섰다.
***
그녀의 변혁도 변혁이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아직 떠오르지 않은 부유섬 아래, 테헤란으로 내려왔을 때 보인 건 장관이었다.
요정용들이 날갯짓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쓰러진 역병의 무리는 군주의 지배를 잃어 한낱 시체로 전락해 부패하고 썩어가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늑대는 후각을 비활성화했지만 반대로 페리는 좋다는 듯 몸을 비틀고 있었다. 물론 시체 그 자체가 좋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 스며든 부정한 오염을 말하는 거였지만.
요정용들이 시체에서 나오는 부정을 먹고 있는 가운데 늑대는 그 중심에 있는 오래된 용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 잠깐 둘러본 바로는 몇 년은 걸릴지도 모르겠군."
몇 년간 노력해야 하는 일인데도 싫어하는 내색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정, 그것도 역병씩이나 되는 재앙의 여파라면 그들에게 있어 더 없는 만찬일 테니까.
잠깐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고작 몇 년 만에 끝낼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테헤란부터 서유럽 끝까지는 수천km에 달하니까. 길이만 해도 그러한데 면적은 얼마나 넓을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어느샌가 페리 또한 날아올라 부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변화라고 한다면 홍유리뿐만 아니라 페리도 마찬가지였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흰 같은 종족이 아닌 건가?"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늑대는 그리 물었다. 혜견은 분명 오래된 용을 페어리 드래곤이라 말하고 있다. 거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동양의 용과 흡사한 모습인 오래된 용과는 달리 페리는 드래곤을 닮아 있었다.
아니, 페리만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탈피 전의 페리 또한 용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으니까. 시작점과 종착점이 보이는데 중간 지점에서 다른 모습이 됐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그런 뜻이 담긴 물음에 오래된 용은 천천히 고개 저었다.
"우리는 그런 존재니까."
"뭐?"
"허물을 벗을 때마다 우리는 달라지네. 우리의 본질은 형상에 있지 않으니. 저 모습은 어린 용이 바란 모습이겠지."
"……."
"내 모습은 내가 바란 것일 뿐. 시작은 같아도 끝이 같을 수는 없는 거라네."
그 말을 끝으로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오래된 용은 눈을 감았고 늑대는 멍하니 부정을 먹어가는 페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페리(페어리 드래곤)]
[체장 1.19m] [체고 37.7cm] [체중 14.8kg]
[힘 72] [민첩 91] [체력 111] [마력 205]
크고 작은 두 쌍의 날개를 지닌 페리의 모습을.
***
백록과도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이은하가 아직 환계에 남아있는진 모르겠지만, 몇 년이나 걸릴지 모를 일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고마워."
솔직한 감사를 표했다. 백록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질병에게 먹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역병을 쓰러뜨리긴커녕 싸우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으리라. 그 말에 흰사슴은 알게 모르게 웃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부르게."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됐으니까.
어느새 눈높이가 달라져 계속 올려다봐야 했던 백록마저 내려다보게 됐다. 백소율도 그랬지만 주변인과 비교 할수록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 이제 나보다도 한참이나 커졌군."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
"그거 알고 있나? 자네는 보고 있으면 참 조마조마하다네."
"……."
"나도 어지간해선 동요하지 않는 편이라 자신했네만, 자네는 정말이지… 하기야, 말해서 들을 거라면 벌써 고쳤겠지. 분명 그 거대한 괴물도 먹어 치울 생각이겠지?"
질병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병은 쓰러뜨렸지만 이제 겨우 한 발을 디딘 것에 불과하다. 질병은 역병보다 강하니까. 그를 위해서라도 역시 스퀘어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하다.
놈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나 작정하고 모습을 숨길 셈이라면. 깊은 땅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놈을 쓰러뜨릴 방법이 없기도 하고.
말은 미리 맞춰두었지만 상세한 이야기는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휴… 맘 같아서 나도 남아있고는 싶네만."
그러기에는 이은하나 다른 던전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 편히 가라고 말해주었다. 백록의 축지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부디 조심하라는 말을 남긴 백록의 모습이 사라지자 늑대는 뒤늦게 끄덕였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원하는 만큼 부정을 먹어 치워 잔뜩 배불러진 페리와 함께 스퀘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고 부유섬은 높게 떠올라 있었다.
어차피 발판을 만들어 오르면 됐기에 상관없기는 하다. 오르는 중에 몸을 줄여 다시 강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광장에서 레드 스퀘어의 마법사가 오기만을 기다리려 했는데 그럴 필요 없이 홍유리가 마중 나와 있었다.
"…늦어."
투덜거리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 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완연한 겨울이긴 해도 한국만큼 춥지는 않은데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라 밤바람을 계속 맞고 있어도 될 정도는 아니다. 홍유리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고 그에 도시는 붉게 물들었다.
"뀨~!"
말없이 걷는 홍유리를 따르며 저택으로 향하던 중,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생각 좀 해봤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 귀가 잔뜩 붉어질 만큼 광장에 남아 있었을 테니까. 가장 머리가 복잡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본인이리라.
"……변혁이 꼭 나쁜 건 아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눈을 보았더니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변혁. 용혈을 마신 게 원인이라면 그게 용과 관련된 것이란 건 확실하다. 드라코니안처럼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잃지 않는 정도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어디까지 변혁하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용혈을 들이켰을 뿐이니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정말 최악의 경우엔 용종 그 자체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용종 자체가 생물로선 정점에 있으니 그 또한 변혁은 변혁이리라.
설마 지성까지 잃을 리는 없겠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
"어떻게 변하든 도와줄 테니. 어떻게 해서든."
시스템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용혈을 요구한 것도 마신 것도 그녀였지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결국 용혈을 준 건 나였으니까.
애초에 홍유리가 아니었다면 이번 역병 토벌에서 마법사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다. 화산각룡과 싸울 때부터 여태까지. 지금의 나와 그녀에게는 어느 정도 유대가 있다고 생각한다.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깔끔하게 주고받고 끝나는 그런 관계는 아니게 됐으니까. 가능한 한 최대한 도울 생각이었다.
추위를 타는 체질이었나? 어느새 올려다본 그녀는 귀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테헤란의 겨울은 내가 느끼는 것보다 좀 더 추운 모양이었다.
***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말인데도 숨이 멎었다.
변혁이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될 대로 돼라. 잠들었지만 자고 일어나니 불안함이 엄습했다.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알파의 말은 자칫 잘못하면 몬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도구로 자신을 감정했을 때, 변혁 중이라는 걸 보았을 때 실감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게 되고 있다고. 정말 만약에 내가 몬스터가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만 해도 싫다. 나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사람이었으니까. 계속 싸워온 증오스러운 몬스터가 되는 건 생각하기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스승님이나 여명의 동료들… 그리고 백소율까지도. 그들의 시선이 변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을까?
절대 아닐 거다. …성질도 더러운데 몬스터까지 되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연? 강태호? 구진하? 글쎄… 한 명이라도 있긴 할까? 그래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수록 외톨이가 되는 것 같아서. 고작 피 좀 마셨다고 몬스터가 될 리 없다고. 찬 공기에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했다. 자조할 만큼 대책 없고 얄팍한… 그걸 알파가 몰랐을 리 없다.
속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한 말은… 너무 깊게 와닿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 변하든 도와주겠다고.
다른 사람이 했다면 빈말로 치부했을지도 모르지만, 여태 함께 지내는 동안 그가 빈말 같은 걸 하는 성격은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아닌 그였기에 그 말이 훨씬 더 와닿았다.
아. 그렇구나.
내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별거 아닌데… 정말 별거 아닌데… 가슴께에 얹은 손으로 콩닥거리는 심장을 느꼈을 때, 홍유리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참, 신기했다. 아까까진 그렇게 추웠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서. 춥기는커녕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아무래도 테헤란의 겨울이 생각보다 따뜻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