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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78화 (178/407)

〈 178화 〉 #73 변혁 (4)

[얼룩점박이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늑대는 온갖 몬스터를 움직이지도 않은 채 섭취하고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홍유리가 쓰러뜨린 몬스터들. 어차피 남겨놔봤자 다른 몬스터들의 먹이가 된다. 어차피 버릴 거라면 먹어주는 게 가장 유용한 사용법이었다.

외곽과 중심부의 몬스터를 전부 처리하고 마침내 최심부에 다다랐을 때, 홍유리의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악으로 깡으로 견디고 있지만 흑무가 뺏어가는 마력의 양은 적지 않다. 남은 마력은 이제 반의반도 미치지 못하리라.

그에 홍유리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씹었다.

최심부에 있을 보스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아직 놈의 모습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아무리 못해도 하이 랩터보다는 강할 테니까. 정상적인 판단이라면 휴식을 취하는 게 옳다.

검은 안개를 잠깐 거두라고 말하고 일단 마력과 체력을 회복한 뒤에 보스를…

"쉬었다 가지."

그리고 그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늑대가 선수 쳐 말했을 때, 홍유리의 표정이 와짝 일그러졌다.

물론 한 번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그게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더 정확히는 알파가 그 말을 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쉬었다 가자고 하는 말은 넌 여기까지라고. 보스를 쓰러뜨릴 수 없을 거라고 단정 짓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정작 그런 알파는 화산각룡때도 역병을 토벌할 때도 가장 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이견의 여지 없이 자리에 앉자 홍유리의 눈꼬리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체력과 마력.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한 보스. 그럼에도 홍유리는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일어나. 바로 갈 거니까."

독단적인 결정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에 백소율이 말리려 했지만, 늑대가 제지했다. 씩씩거리며 한참이나 먼저 걸어가고 있었기에 홍유리는 보지 못했다. 뒤에서 늑대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

최심부에 다다랐을 때, 불쾌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체 썩는 악취와 까마귀가 우는 듯한 소리. 그에 페리만이 기뻐하고 있었다. 그 전부가 부정함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흐느끼는 듯한 귀곡성이 들려왔을 때,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목을 붙잡았다. 숨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지만, 늑대가 바람을 만들어내자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고마워요."

감사 인사에 늑대는 고개만 끄덕였다. 벌써 홍유리는 지저분한 숲을 이리저리 헤치고 한참이나 앞서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늑대는 나무들이 비틀리고 멋대로 춤추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 옅은 안개가 낀 너머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길함이 엄습해오는 것만 같은 스산함. 신나하는 페리와는 달리 백소율은 방울 소리를 듣고 한 차례 몸을 떨었으나, 자신이 안고 있는 게 역병조차 쓰러뜨린 마랑인 알파라는 걸 깨닫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랑― 늑대의 눈은 수많은 장애물을 꿰뚫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엿보았다.

[클리즈야티(나알들루시)]

[신장 2.21m] [체중 281kg]

[힘 231] [민첩 242] [체력 271] [마력 554]

[보유 스킬]

[경직의 마안(C)] [사역(C)] [둔갑(C)] [독 내성(D)] [질주(E)]

마력을 주로 사용하는 계열. 보기만 해도 놈이 주로 사용하는 힘이 마력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외형이었다.

비쩍 마른 기형적인 몸은 얼핏 보기에 인간과 흡사하지만 놈은 절대 인간이 아니다. 커다란 사슴의 두개골을 쓰고 있었지만 사실 그 자체가 놈의 머리였으니까. 거기에 목과 손목을 비롯한 신체 곳곳에 뼈와 힘줄을 엮어 만든 기분 나쁜 장신구를 두르고 있다. 또 놈에게서 나는 악취와 그 뒤에 쌓인 시체 더미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냉정한 눈으로 보자면 그렇게 강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지금의 홍유리에게는 쉽지 않을 터. 비록 마력이 앞서고 있지만 그 마력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데다가 바닥나기 직전이었으니까.

늑대는 일단 백소율을 제지했다. 물론 홍유리를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대마력을 얻기 위해선 그녀를 몰아붙여야 할 테니까.

***

불길한 안개와 숲속을 헤치며 홍유리는 성큼성큼 나아갔다. 길을 헤맨다는 것 따위는 그녀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

추적의 마안이 발자국과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숨기더라도 이 눈에서 벗어날 순 없다.

그 앞에서 홍유리는 잠깐 멈춰 섰다. 이 앞으로 더욱 짙은 안개가 깔려있어서. 거기에 마력이 담겨 있다는 것쯤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검은 안개를 넘어 침범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홍유리의 마력을 억누르고 있는 검은 안개는 반대로 외부의 마력 또한 갉아먹어 버렸으니까. 그 순간, 홍유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 안개나 숲의 분위기로 미루어봤을 때, 숲의 보스는 십중팔구 마력을 주로 이용하는 계열이리라. 승산이 희박할 거라 생각했지만… 꼼수기는 해도 알파의 검은 안개를 잘만 이용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산해져 가는 주변. 음산한 분위기와 함께 듣기 싫은 소음들이 귀를 어지럽게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 홍유리의 집중을 깨는 건 무리. 그 속에서 예민한 청각이 사부작거리는 발소리를 듣고 홱 고개를 돌렸을 때, 무언가의 시선이 안개 너머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살의는 없다. 단지 지켜볼 뿐인 시선이지만 오히려 그 아무 감정도 없는 무기질적인 시선이, 비어있는 눈이 더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여기서 돌아서야 하나? 고민하던 홍유리는 조금 더 가기로 했고 마침내 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비쩍 마른 몸을 가진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다. 언뜻 인간과도 흡사하지만, 사슴의 두개골을 쓰고 있는… 아니, 그 두개골 자체가 놈의 머리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몬스터. 하지만 놈이 이 던전의 주인이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역시 생각했던 대로 마법사에 가까운… 홍유리는 침을 삼켰다. 쉽지는 않겠지만 마력을 주로 사용하는 놈이라면 한 번 해볼 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가갔을 때,

순간, 놈이 흠칫거리며 홱 고개를 돌렸다.

마치 무언가를 본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떤다. 기어이 그 목울대가 넘어가는 순간, 어딘가에 놈의 시선이 팔린 그 기회를 홍유리는 놓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다가간 홍유리의 주먹이 요술사의 두개골을 부술 듯 뻗어졌지만, 요술사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잡혔다. 잡혔지만… 마력을 사용해 잡힌 그대로 한 번 더 추진하자 요술사의 손목이 기이하게 꺾이고 말았다. 그 상태로 발길질한 홍유리는 놈이 물러나자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신체 능력만큼은 거의 호각. 아니, 자신이 좀 더 앞서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서로 간에 거리가 벌어졌을 때, 요술사는 무언가를 던졌고 홍유리는 눈 하나 감지 않았다.

그건 마력탄. 아니, 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다. 그저 자신의 마력을 뭉뚱그려 냅다 던졌을 뿐이니까. 당연하다는 듯 검은 안개 속에 사라지자 요술사는 사슴의 머리를 모로 꺾었다.

…역시 마력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력이 다하기까지 몰아붙일 뿐. 시간을 끌어봤자 불리해진다 여긴 홍유리가 냅다 달려들었다.

***

일견 호각으로 보이는 싸움. 홍유리의 주먹이 몇 번이나 닿았고 그녀의 발길질에 요술사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반대로 홍유리도 빈도는 적지만 얻어맞기는 하고 있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을 늑대는 그저 담담히 지켜보았다.

"선생님… 괜찮으실까요?"

불안한 듯한 백소율.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짙은 안개와 스산한 숲의 풍경뿐이었으니까. 늑대처럼 저 너머를 볼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리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에게 늑대는 안심하라고 말했다.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대마력을 얻기 위해 구르고 있을 뿐이니까.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환영의 나비에게도 협력을 구했지만, 거기에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결국 그녀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싸우게 만드는 거였고.

"……."

백소율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믿겠다는 듯 늑대를 끌어안았을 뿐.

***

눈앞의 암컷은 이상하다. 자신의 마력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불길한 검은 안개는 요술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건 이 암컷이 가진 힘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잠깐 느껴졌던 불길한 시선― 불가사의하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그 존재의 힘의 일각. 혹여 암컷이 총애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시험해봤지만 그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앞의 암컷 정도는 죽일 수 있다. 다가오는 주먹을 덜렁거리는 손으로 받아낸 요술사는 자신의 어깨가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정말 질리도록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이를 갈며 요술사는 어깨가 빠진 팔을 휘둘렀지만 홍유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되려 한 걸음 더 나아가 탈골된 요술사의 어깨를 부서뜨리며 눈을 빛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만 한다. 이젠 정말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시간적 여유가 남아있지 않다.

거친 호흡을 애써 숨기며 홍유리는 요술사의 옆구리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물러나며 막아낸 요술사는 홍유리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단번에 꺾어 분질러놓자 기겁하며 발을 차올렸다. 하지만 홍유리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피해 다시 달라붙었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되는데 정작 그 시간이 나질 않는다. 요술사는 물러나려다 그러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홍유리의 발이 요술사의 발등을 밟고 있던 것.

"―――!"

이 암컷은 강하지 않다. 하지만 자신보다 몇 수나 앞을 읽고 있다. 요술사는 여기에 와서 홍유리의 기량이 자신보다 한참이나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역량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요술사의 턱이 벌어진 순간, 그가 사역하고 있던 것들이 쏟아져나왔다. 뱀과 지네. 그리고 온갖 벌레들. 제멋대로 움직이는 부정의 무리가 드러누운 사슴의 두개골에서 거꾸로 토해지자 요술사를 마운트하고 있던 홍유리는 급히 떨어졌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아주 작은 벌레가 그녀를 물었으니까. 재빨리 떼어냈지만, 정신 고갈의 전조와 함께 현기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동자 속 초점이 조금 흔들린다. 그나마 독 내성이 없었다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으리라.

그러는 사이 거리를 벌린 요술사는 등 뒤에 있는 시체로 달려가 그것을 집어던졌다.

잠깐 시야가 흔들렸던 홍유리는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해 눈을 크게 뜨고 물러났다. 날아오던 시체는 산산이 부서져 살점과 뼈가 이리저리 비산했다. 눈앞에서 시체가 폭발하는 모습에 홍유리는 이를 갈았다.

마력 그 자체는 안 되더라도 마력으로 시체를 터뜨린다면 가능하다. 핏물이 아주 조금 피부에 닿자 홍유리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게 됐다― 그 생각은 틀렸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요술사가 우락부락한 팔을 휘둘렀으니까.

"……!"

우락부락한 팔. 거친 갈색 털이 듬성듬성 일어난 그건 여태까지의 비루한 요술사의 팔이 아니었다. 명백한 짐승의 것. 굵은 털이 뒤덮고 있음에도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바닥을 구른 홍유리는 굵은 나무가 단번에 부서지고 그 파편이 바위에 박혔음을 깨닫고 침을 삼켰다.

무식한 힘.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력을 주로 사용하는 건 맞았지만 놈의 특기는 둔갑과 사역에 있다. 마법사와는 다소 타입이 다르다는 뜻.

"―――."

사슴의 두개골에서 한기가 서린 입김이 새어 나온다.

요술사는 이제 완연한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비쩍 말라 볼품없던 몸은 부풀어 올랐고 단단한 근육이 알알이 박혀 있다.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울부짖는 괴물이 달려들자 홍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무식한 괴물의 긴 팔이 휘둘러졌을 때, 홍유리는 물러나고 물러나다가 이채를 띠었다.

그건 한쪽 팔밖에 쓰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니,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쓰지 못하는 거였다. 모습은 변했지만, 요술사의 손목은 아작나고 어깨는 빠진 상태였으니까.

부족한 체력과 마력. 확신은 없지만 할 수밖에 없다. 괴물의 팔이 휘둘러지자 홍유리는 상체를 숙여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소름 돋는 무식한 힘에 느껴지는 풍압. 순간 오싹해졌으나 그녀는 자신의 작은 체구마저 장점으로 승화시켜 품속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공격은 오지 않는다. 한쪽 팔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사슴의 두개골, 비어있는 눈구멍이 빛을 발했지만, 홍유리는 눈살만 찌푸리고 말았다.

어떤 종류의 마안인지까진 모르겠지만 그녀가 가진 추적의 마안이 보다 낮은 격을 지닌 마안을 파훼한 것. 되려 그 반동으로 경직된 건 괴물이었다. 남은 마력을 쥐어짜듯 내뻗은 주먹은 두개골에 훌륭히 적중할 뻔했다.

―어떤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경직에서 깨어난 괴물은 바로 지척에서 멈춘 그녀의 주먹에 흠칫거렸다. 하지만 그게 움직이지 않음을 깨닫고 재빨리 손을 뻗어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

괴물의 손아귀가 조여들어 숨통이 틀어막혔다. 괴로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홍유리의 신경은 괴물에 있지 않았다. 목 뒤가 미칠 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마치 불타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홍유리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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