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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80화 (180/407)

〈 180화 〉 #74 달밤, 약속

던전 안이라 시간의 흐름을 알기 힘들었지만, 돌아와 홍유리를 눕혔을 땐 이미 밤이 되어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들떠 있었다.

역병을 물리쳤다는 고무적인 소식에 들뜨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오랜 인류의 숙원이었으니까. 아직 질병이 남았다지만 군세는 사라졌고 견제해야 할 재앙이 하나로 줄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역병과 질병의 침공 당일 죽은 이들 또한 많았기에 축제까지 벌어지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지고 활기가 들어찬 건 당연한 일이었다.

"……뀨우?"

오직 붉은 저택만을 제외하고. 상처는 페리의 빛가루로 회복했지만, 변혁과 대마력이 섞인 데다가 정신 고갈까지 찾아와 쉽게 깨어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

일단, 홍유리가 깨어나야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다. 그전까진 좀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할 뿐.

실전에서 대마력을 획득한다는 것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홍유리의 진전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실제로도 용화로 인해 일시적으로나마 대마력에 닿았으니까.

한 번 다다른 만큼 대마력을 획득하기란 쉬울 터. 허나 그건 변혁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쓰러진 홍유리를 간호하다 백소율을 눕힌 늑대는 저택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

늑대는 밤중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밤중에 기약 없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비의 성은 늑대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쓸쓸하던 고성은… 이제 그렇게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올 거라 생각했어요."

"…여기서 지내는 건가?"

끄덕이는 아넬라를 늑대는 묘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

의외였다. 아멜리아라면 내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넬라는 쓰게 웃었다.

"……제가 고집부리는 거예요."

"……."

"이거 볼래요?"

잠옷 소매를 걷은 곳엔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아넬라는 숨을 토해내듯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늑대는 그런 아넬라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준 건 다름 아닌 늑대 자신이었으니까.

만상의 주인. 수십 년이나 지속된 굴레. 아멜리아는 비밀로 하고 평생을 안고 갈 생각이었겠지만… 거기에 늑대는 멋대로 끼어들었다.

그 자신에게 어떠한 권리도 의무도 자격도 없음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고통받은 아넬라만큼은 알 자격이 있으리라 여기고.

진실을 알았다 해도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아넬라 모레스트라는 인간의 의지요, 용기였을 테니까.

아넬라는 성의 안쪽을 고갯짓했다.

"자, 들어가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 안내에 따라 늑대는 나비의 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

홍유리의 방. 그 침대에 걸터앉은 백소율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셨네요."

피곤함을 감추지 못한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다시 일어나 있었는가… 물을 필요도 없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이리라.

"……방법은 찾았나요?"

그 말에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환영의 나비는 자신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지만 용의 피로 인한 변혁은 케이스가 적다. 애초에 용의 피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홍유리가 알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마신 자들의 대부분은 변혁은커녕 죽음을 맞이했다. 당연하다. 터져 죽거나 용화를 견디지 못한 채 으스러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용종의 몬스터가 되어 사람들의 손에 죽어야만 했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살아남을 수 있던 이들은 두 번 다시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짧으면 사흘. 가장 오래 버텼던 이 또한 고작 3년. 그 이후에는 변혁이 진행되어 용이 되고 말았다.

…이미 한 번 용이 되었던 홍유리는 그 기간이 훨씬 짧을 터. 언제 변혁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된 셈이다.

외부 요인에 의한 긍정적인 변화. 그 변화라는 건 어디까지나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생물종의 정점에 위치한 용의 피를 받아들이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 쉽지 않으리라. 평생을 갈망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냥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백소율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다리가 풀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은 답답함 … 마치 심장이 멈춘 것만 같다.

마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해도 선생님이 그 말을 들으실까? 그 성격에 말리기도 힘들겠지만… 설령 말린다 해도 언제 용이 될지 모른다는 뜻.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떨어지기 전, 늑대는 백소율의 눈가를 대신 쓸어 훔쳤다.

"하지만 답도 얻었다."

대마력을 얻게 한다는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외부의 힘에 저항할 만큼 마력을 기른다면. 용의 피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다면.

사흘에서 3년까지. 모두 죽기는 했지만 용의 피에 저항한 이들이 살아남은 기간은 명백히 마력과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그들 중 누구도 대마력을 가지진 못했다. 멸망 초기에 대마력을 가진 이가 많을 리 없으니까. 용혈의 대항마로서 대마력을 일깨운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다 인간에 가까운 용종으로서나마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그 사실을 알리며 늑대는 시선을 맞춰왔다. 붉은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확신과 믿음을 간직한 채였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자신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네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그 말에 백소율은 마른침을 삼켰다. 고개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혼이 저당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습격 이후, 쭉 함께했던 선생님. 따지고 보면 그 시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자신을 구원한 게 알파라면 늘 옆에 있어 주었던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덕분에 마법을 배울 수 있었고 여태까지와는 달리 혼자가 아닐 수 있었으니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가족이요 친구요 스승이었으니까…….

……비록 방향성은 다르지만 알파가 소중했던 만큼 선생님도 소중하다.

그리고 알파는 그런 선생님을 반드시 구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왜?

"약속하겠다. 반드시 살리겠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흔들림 없는 붉은 눈에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묻고 말았다.

"……왜요?"

이유를 묻는 말에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저번과 같은 이유로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홍유리는 이미 자신에게도 동료요 친구가 되어 있었지만… 침묵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는 것뿐.

"……."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백소율은 조심스레 늑대를 끌어안았다. 역시 이번에도 대답해주지 않는구나… 그 안타까움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늑대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불안은 씻은 듯 사라진 뒤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를 안은 채 창밖을 올려다보았지만, 아쉽게도 보름달은 아니었다. 초승달도 그믐달도 아닌 어정쩡한… 그게 조금 아쉬웠다.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하지만 꼭 말이 오가야 알 수 있는 건 아니듯이. 부드러운 손끝에 달을 보고 있던 늑대의 눈은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을 때, 들려온 목소리에.

"기다릴게요."

……말을 잃고 말았다.

아까 그녀가 그랬듯, 눈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언제까지나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약속 지켜주세요."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백소율은 웃을 수 있었다. 그가 약속했으니까. 그는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을 테니까.

대답하지 못했단 것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맺힌 눈물에 흐려진 그녀의 눈에 비친 달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여태 살아온 날의 그 어느 때보다 더.

***

"……뀨!"

어쩐지 뾰로통한 페리와 함께 부유섬을 내려왔다.

지상에 내려왔을 때, 악취는 여전히 남아 코를 찔렀지만, 오염은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무수한 요정용들이 이곳저곳을 비행하고 있다.

기껏해야 사람 손가락만 하던 녀석들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몸집을 불려 제법 커져 있었다. 이제 생쥐 정도는 되지 않을까.

페리와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단기간에 성장한 걸 보면 과연 역병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성장의 원동력이, 이만한 숫자의 요정용이 몇 년간 먹어 치워야 할 양이 남아 있다는 것 또한.

"뀨우."

그 오염과 부정을 보면서도 페리는 뾰로퉁한 채 그대로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 건지 어르고 달래봐도 말을 듣기는커녕 눈도 마주쳐 주려하지 않는다. 페리를 만난 이후 처음 있는 일…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은 늑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잔뜩 깔린 시체와 사체들… 군인들이 수거하거나 처리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짧았던 모양. 역병은 처리했지만, 질병은 남아 있었으니까.

애초에 무리가 사라진 이상 군인들이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철수하는 게 옳다. 총기와 화기 따위로는 어떻게 해도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 이 깊은 땅속 어딘가에 버젓이 남아있을 테니 시체를 수거할 수도 없었을 테고.

마찬가지 이유로 스퀘어 또한 나설 수 없었을 거다. 언제 질병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테니까.

그런 이유로 시체와 사체들은 이렇게 방치되고 말았다.

생각의 도중 페리가 제멋대로 날아가자 늑대는 한숨 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동안 칭얼거린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정도가 다르다. 마치 따라오지 말라고 흘기는 듯한 눈초리에 늑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실소에 페리는 완전히 성이 난 것처럼.

"――뀨우웃!"

홱 고개를 돌려 날아가 버리자 늑대는 고개를 흔들고 뒤를 따랐다.

따라간 곳에 페리는 오래된 용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남들에겐 그저 재잘거리는 거로 보이겠지만, 늑대만큼은 억울함으로 가득 찬 한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아주 잠깐이지만 오래된 용이 어이없어하는 듯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지만, 애초에 페리가 삐친 이유조차 모르겠다. 잠깐 기다리고 있자니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페리가 다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바로 쫓아가려던 늑대는 오래된 용의 부름에 잠깐 멈춰 섰다.

"자네도 참 대단하군."

질렸다는 듯한 말. 오래된 용은 푹 한숨 쉬자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넌 페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같은 종족이니까."

"……."

늑대의 빤한 시선에 오래된 용은 떠보듯 물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

"…그만 가보게. 어찌 됐건 쫓아가 보는 게 좋을 테니."

더 할 말이 없어 보이자 늑대는 페리가 사라진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멀리 가지도 않은 곳에서 페리는 부정을 삼키고 있었다. 이번에도 피할 거라 생각했는데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이자 내심 안심할 수 있었다. 오래된 용에게 칭얼거렸기 때문인지 조금은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뀨."

힘 빠진 울음에 늑대는 픽 웃었다. 뭐에 그리 분하고 억울했는지 몰라도 이 정도 칭얼거림을 들어주는 건 어렵지도 않으니까.

손길이 지날 때마다 페리의 꼬리가 강아지의 그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페리 자신만 모르는 버릇이기도 했다.

한참 쓰다듬어주자 이젠 됐다는 듯 달라붙는 녀석을 데리고 늑대는 길고 긴 길을 천천히 걸었다. 수십 수백만에 달하는 역병의 군세. 아니, 역병의 군세였던 이들.

장례라도 치르듯 불을 일으킨 늑대는 오래전에 죽었을 그들을 하나둘 불태워갔다. 일어난 겁화에 재 하나 남기지 못하고 타오르는 그들 사이에서 엉키고 엉킨 무리를 구분했다.

질병과 싸우기 위해선 그만한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놈은 분명 머지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내리라.

어떤 근거도 없지만, 늑대는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놈과 싸우는 건 피할 수 없으리라고. 당장 인류를 위협으로 모는 멸망을 걷어내야만 한다고.

둘만이 걷는 길. 늑대는 불태우고 먹어 치웠으며 페리는 부정을 받아들여 갔다.

걷던 걸음은 어느새 달리기 시작했고 이란 전역에 널린 무리를 처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불길한 마랑(먹어치우는 자{Swallower}) Lv.49]

[EXP 3102171 / 3102171]

그러자, 한계까지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질병이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늑대 또한 마지막 준비를 마친 셈. 그리고 그를 증명하듯 시스템은 늑대 자신이 바라는 길을 비추어 주었다.

[Lv.50 달성 조건 : '대지를 병들게 하는 자'를 쓰러뜨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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