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75 전야
"……용혈은 그대의 피였구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제자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은 아스터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믿을 수밖에 없다. 비록 극히 일부라고는 하나 늑대에게 둘린 업을 꿰뚫어 본 눈이 제자, 홍유리의 상태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잠깐 멈췄을 뿐이지 언제 변혁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
수긍하는 늑대의 말에 아스터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제자는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걸까. 굳이 용혈을 들이켜야만 했을까… 오만가지 상상이 들었다.
겉으로는 여전한, 속으로는 메마른 목소리가 아스터로부터 흘러나왔다.
"…이 아이가 바란 것이오?"
용혈을 요구한 것이 홍유리냐는 물음에 늑대는 끄덕였고 아스터는 한숨지었다. 조금이라면 영약으로서 기능해 끝났을 거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을 삼키고 말았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도로시의 진전이 홍유리를 성급하게 만든 것일까? 어차피 홍유리 또한 대마력까지 닿는 데 얼마 남지 않았었거늘…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분명 닿았을 텐데.
"널 부른 이유는 혹시라도 변혁을 막을 방법이 있느냐는 거다."
이어서 늑대는 같은 질문을 이미 환영의 나비에게도 했다고 알렸다. 같은 스퀘어 마스터인 아스터라면 그녀가 모르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여 그를 불렀다는 뜻.
거기에 더해 대마력에 관한 이야기까지 알리자 아스터는 고개를 흔들었다. 영약이란 건 때때로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하는 법. 역량 이상의 용혈을 받아들였으니, 용혈 이상의 역량을 가지는 수밖에는 없다.
다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깨어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뿐. 아스터의 손끝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손길이 이마를 쓸었을 때, 잠든 홍유리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곧 깨어날 거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엔 없구려."
한탄하는 아스터에게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려낼 테니."
확신은 있다. 최악의 경우에도 모조 엘릭서를 사용한다면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하지만 그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도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 모조 엘릭서는 늑대에게도 최후의 보루와 같은 것이었다.
"……어찌 장담할 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스터는 스스로 말을 끊고 침중하게 끄덕였다. 변혁을 막을 방법은 없다. 굳이 자신을 불러 물어볼 정도라면 마랑 또한 방법을 찾지 못한 게 분명하리라. 한데도 이리 자신한다는 것은…
그 뒤, 잘못된 말로조차 각오하고 있다는 뜻.
설령 이성을 잃고 용이 되더라도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도출되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만큼 마랑은 진심이라는 뜻이리라. 설령 제자의 이성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못할 만큼이나.
이제야 그가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리겠다 나섰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인류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가 바란 것이 곧 그가 바라는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명확한 동기가 있었던 거다.
언제 어떻게 왜… 수많은 의문조차 마랑의 흔들림 없는 붉은 눈앞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에 아스터는 한탄했다. 포기시킬 수 없을 테고 포기하지도 않을 테니까.
지그시 눈을 감은 아스터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다만 그 이해가 오해라는 걸 깨닫지 못한 채, 각오를 다진 그는 마랑에게 고개 숙였다.
"……제자를 잘 부탁하겠소."
"그래. 나중에 보지."
***
백소율이 자색 도시로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아스터의 말대로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유리는 머리를 싸매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시발?"
하루 가까이 기절해 있었다는 말에 그녀가 보인 반응이었다. 적나라한 욕설에 늑대와 백소율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했잖아. 호들갑 떨지 마."
별거 아니라는 듯한 말답게 실제로 상처는 없다. 페리의 빛가루가 전부 회복시켰으니. 문제는 변혁. 곧바로 그에 대해 설명을 해주니 홍유리의 눈가가 떨렸다.
"……마력 쓰지 말라고?"
"아니, 생각해 두라는 뜻이다. 널 살릴 방법은 있으니까."
"……."
"혼란할 테지. 식사부터 하고 남은 이야기는 마저 하도록 하지."
홍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식사하는 동안 당장 내일 백소율이 퍼플 스퀘어로 가게 됐다는 말에 빤한 시선으로 보던 홍유리는,
"너 내일 출발하는데 준비는 했어?"
"네."
"다시 보러 가."
백소율이 자신의 방으로 향하자 홍유리는 늑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그래서 어쩔 생각이야?"
"……?"
"원래 하려던 일은 진작 끝났잖아."
그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퀘어에 온 건 역병과 질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둘은 아직 닿기란 요원한 괴물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환영의 나비의 배신을 막으려 했을 뿐.
하지만, 스퀘어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만상의 주인과 환영의 나비에 얽힌 이야기. 굴레 속에 갇힌 일그러진 어느 가족들. 아가일을 죽였다는 걸 속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무기력한 스퀘어와 인류. 그들 가족들에 작은 희망이라도 심어주기 위하여. 죽어 나가는 이들의 넋이라도 빌고 살아있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렇게, 도움과 협력을 구해 늑대는 약속을 이행했다.
본래 목적은 진작에 달성했고 역병을 쓰러뜨리는 건 무리해서 당장 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역병은 쓰러졌고 무리는 사라졌다. 수십 년이나 이어진 기나긴 재앙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
홍유리가 묻고 싶은 말은 여기서 더 하겠냐는 말. 즉, 질병을 쓰러뜨리겠냐는 물음이었고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멈출 순 없다. 무엇보다 늑대 자신이 바라고 있었으니까. 땅을 갉아먹는 벌레. 질병을 쓰러뜨려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괜찮겠어?"
그 말에 늑대는 다시 끄덕였다.
그날, 만상의 주인을 만나고 다시 실감했으니까.
여기서 멈춰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령 무리라 해도 나아가야만 한다고.
재앙은 걷어가고 있지만, 인류는 언제라도 그녀의 변덕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
***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고, 부름에 따라 스퀘어의 중심부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환영의 나비가 도착했을 땐 이미 회의실의 좌석은 늘 그렇듯 한 자리를 제외하고 전부 채워져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북풍의 주인의 말. 호출의 이유를 묻자 환영의 나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야."
그 단답에 북풍의 주인은 아스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아닐세."
"설마…"
호출한 두 사람이 모두 아니라 하지만 그들이 장난칠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닌 제삼자가 그들을 통해 스퀘어 마스터를 소집했다는 뜻. 단서조차 없음에도 겨울의 주인과 북풍의 주인은 곧바로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문이 열렸을 때, 들어온 것은 한 마리 강아지. 조금 특이한 강아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그들의 부탁에 따라 그리 행세하고 있을 뿐이다. 그 증거로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으니까.
역병이란 재앙을 집어삼킨 늑대는, 마랑은 명백히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정말 질병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늑대는 잠깐 빈 자리를 쳐다보다 장내를 둘러보았다.
붉은 현자. 북풍의 주인. 겨울의 주인. 환영의 나비까지 네명의 스퀘어 마스터가 착석해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이목을 받은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자신이 부탁했던 대로 환영의 나비는 이들을 모아주었다. 그럼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자신의 몫이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
늑대는 천천히 운을 뗐다.
"질병. 아직 남아있는 재앙을 쓰러뜨리기 위해."
그들 모두가 바라마지않던 말로서.
…….
의견은 있었지만, 이견은 없었다. 네 명의 스퀘어 마스터가 찬성표를 던졌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를 끝낸 늑대는 부유섬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과 탐지로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질병은 분명 잠들어있다.
다음에 나타날 위치를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질병을 쫓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유인한다는 건 불가피한 요소. 질병이 움직이게 되면 그 때, 토벌은 시작되리라.
―사전 준비는 마쳤다는 뜻이다.
"할 생각이구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늑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비어있는 한 자리…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착석해있었으니까. 늑대 자신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깨닫지 못했을 뿐. 전과는 달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기척도 마력도 위압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을 생각인가?"
"고민하고 있어."
시선의 방향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늑대는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닐 테고.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
"참, 얄팍한 장난을 쳤구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여태 느껴지지 않던 시선이 갑작스레 느껴졌다. 여태 누구도 엿보지 못했던 업을 가볍게 들추고 그 너머, 더 깊은 곳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건 분명…
"……양보하는 건 여기까지야. 다음부턴 없을 거란 걸 명심해."
늑대는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경고인 동시에 온전히 자신에게 향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어느샌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이 올려져 있다. 목소리는 분명 거리가 느껴지는데 손은 안심하라는 듯 자신을 쓰다듬고 있다. 어느샌가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가 일변해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아주 짧은 일순이었다.
"……!"
늑대는 홱 고개를 돌렸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탐지를 펼쳐도 전혀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환각이라도 본 것일까? 그럴 리 없다. 털 끝에 남아있는 감촉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를 악물었지만, 동시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시스템과 해야 할 이야기가 늘었단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가 대화했던 건 자신이 아니라 그 내면… 시스템임에 틀림없을 테니. 단세혁은 분명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
환계에서 현계로 돌아온 이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농도 짙은 마력에 몸이 적응하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현계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진다. 탁하고 옅고… 머리를 흔들어 생각하지 않기로 한 이은하는 거리를 거닐었다. 어느새 시간은 저녁이 가까워져 있었지만, 클랜에는 들러야 할 테니까.
그러던 중,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고 활기차 있어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오늘이 무슨 날인가? 갸웃거리며 남들이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야 클랜에 도착한 이은하는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꼈다.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다고.
"……."
집부터 들를까 싶었지만 그래도… 심호흡한 이은하가 클랜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는 휙 몸을 돌렸고 거기엔 한쪽 팔을 잃은 사내가 이채를 띠고 있었다.
"아, 팀장님?"
크게 다쳐서 환계에 가기 전까지 입원해 있던 3팀장, 구진하. 그의 모습에 이은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됐어. 이제 돌아왔니?"
"네. 지금 막… 몸은 괜찮으세요?"
구진하는 팔이 사라진 어깨를 건드리며 끄덕였다. 퇴원한 지는 제법 됐지만, 아직 적응이 덜 됐다.
"이것만 빼면."
"……."
"그렇게 걱정 안 해도 괜찮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나을 수 있을 테니까."
홍유리보다 시간은 더 걸릴 테지만 고통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다.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면 빈말은 아닐 거라 생각한 이은하는 안심해 다행이라 말했고, 그가 퇴근하고 내일 오라는 말에 맹렬히 끄덕였다.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구진하는 작게 감탄했다. 자신이 병상에 있는 동안 참 많이 발전했구나 싶어서. 감출 생각은 없었다지만 분명 자신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것이었으니. 느껴지는 마력량도 상당히 늘어 어지간한 B클래스 헌터보다도 많다.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그러다 저 멀리 들려오는 폭죽 소리에 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스퀘어가 역병을 쓰러뜨렸단 말이 널리 퍼진 지금 인류는 연일 축제 분위기였으니. 그 실상, 이면에 존재하는 마랑에 얽힌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한 줌밖에 되지 않으리라.
그렇듯 알게 모르게 세상은 점차 변해가고 있다. 언젠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냥 꿈은 아니리라.
"……."
그럼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역병을 쓰러뜨려 재앙을 몰아낸 기적이 일어난 지금. 탕아들조차 보이지 않아 고요한 지금이 어째선지 그에게는 마치 폭풍이 오기 전날 밤처럼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