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78 vs 질병 (2)
검은 숲 사이를 늑대는 계속해 달렸다. 숲은 살의를 가지고 늑대를 죽이려 했고 마찬가지로 늑대 또한 숲을 새까맣게 불태워갔다.
사방팔방에 가득한 검은 가지들은, 질병의 촉수는 그 하나하나가 끔찍한 위력을 지녀 스치기만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폭풍을 두르지 않으면 소리의 벽을 넘어 공기를 찢은 바람에 치이게 될 테고 흑무는 흩날리고 그림자는 담긴 마력에 찢어발겨지리라.
먹어 치우느냐 혹은 잡히느냐의 싸움. 한순간의 실수가 생사를 가르는 사선 위의 싸움이나 불합리는 거기에 있었다. 잠깐의 실수와 오판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
더 빠르고 강하고 압도적인 괴물을 상대로 늑대가 점할 수 있는 우위는 오로지 예측 하나뿐. 촉수를 밟고 파편 사이를 뛰고 또 달렸다.
그런데도 도무지 숲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당연하다. 늑대 자신이 벗어나려 하는 만큼 질병 또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늑대 자신보다 훨씬 더 빨랐으니.
거대한 턱이 마침내 뒤쫓아왔을 때, 늑대는 탄력을 발함과 동시에 몇 바퀴나 굴렀다. 대지가 출렁여 균형을 잡기 어려운 와중 촉수는 늑대의 발을 꿰뚫었다. 꿰뚫은 채로 몸 속을 파고들어 오는 그것이 몇 갈래로 나뉘어 살점과 가죽 아래를 멋대로 뚫고 들어와 덩굴처럼 휘감겨 오르기 시작했다.
"……!"
다리가 멋대로 움직여 질병에게 다가가려 하자 늑대는 공허를 일으켜 다리를 먹어 치웠다. 그런데도 파고든 촉수는 질병의 끔찍한 스테이터스로 인해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그것이 다시 한번 늑대를 잠식하기 위해 달려들다 겁화에 타들어 사라졌다.
그 사이, 아까 허탕 친 질병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그 거대한 턱에 씹혀 삼킨 거라고는 흙더미와 부서진 대지뿐. 아쉽다는 듯 기다란 혀로 입맛을 다시는 괴물로부터 뚝뚝, 떨어진 타액이 땅을 녹여갔다. 타액 혹은 소화액. 역병의 그것에 감히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 또한 산성. 늑대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을 때는 영창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검은 숲을 벗어나 놈과 거리를 벌려야 한다. 부차적인 목표라면 용린을 부숴 안쪽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 그래야만 대마법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리라.
물론 최우선은 살아남는 것. 다가오는 턱을 향해 늑대는 급작스레 몸을 돌렸다. 움직일 경로를 읽고 뻗은 촉수는 애꿎은 바닥만을 꿰뚫었다. 깊게 꿰뚫린 채 흔들리더니 늑대는 눈을 부릅떴다.
바닥이 들리고 있었으니까. 재빨리 발판을 밟아 오르려는 순간, 그것보다 더 빠르게 촉수가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가지에 꿰뚫려 뇌수가 흐른 채 처참히 죽어버린 자신.
그 미래를 벗어나기 위해 늑대는 고개를 숙였고 섬뜩한 검은 가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선 바닥이 90도로 기울어져 벽처럼 일어난 순간, 질병의 거대한 턱이 달리는 기차처럼 부딪쳐 바닥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질병의 턱이 씹어 삼킨 거라고는 흙과 모래일 뿐.
커다란 턱에 단번에 집어 삼켜지기 직전, 늑대는 그림자로 하여금 일어난 바닥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온 상태였으니까.
빠져나온 늑대는 곧바로 탄력을 이용해 뛰어오르고 폭풍으로 두른 불꽃을 터뜨려 흩날렸다. 숨 쉴 여유조차 없이 급박한 상황의 용혈에 잔뜩 머금은 산소가 늑대에게 다음을 선사했다.
흩날린 겁화와 쫓아오는 촉수. 그 가지를 타고 역류하듯 타오르는 검은 불길이 도화선을 태우는 불꽃처럼 달리자 질병은 촉수를 포기해야만 했다.
몇 가닥. 고작 몇 가닥의 촉수가 끊어졌을 뿐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괴물의 거신이 대지의 밑바닥을 긁으며 계속해 나아갔다.
그러는 사이, 내려선 늑대는 가시처럼 뾰족하게 솟아난 대지를 밟았으나 그것이 흔들리자 마력으로 발판을 만들었다.
불길은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촉수는 겁화에 쉽게 타오르지 않았지만, 겁화를 꺼뜨릴 수도 없었으니까. 검은 가지를 가연물로써 타오르는 불길이 경계를 긋고 있었다. 커다란 화마로 변한 겁화를 넘지 못한 채 질병의 동체가 멈추어 섰다.
"―――."
끓는 듯한 히싱과 함께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살기는 여전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흐르는 침에 대지가 녹았으나 섣불리 움직이진 않았다.
묘한 대치 사이에서 늑대는 자신의 다리가 다시 재생됐음을 깨달았고, 겁화에 둘러싸인 마랑을 검은 숲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질병은 이 싸움이 짜증난다고 느꼈다.
다양한 능력을 활용하는 늑대. 그러나 실상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건 두 가지뿐이다. 일렁이는 아지랑이와 검게 타오르는 불꽃. 그 나머지는 얼마든 몸으로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힘도 속도도 공격할 수단마저도 압도적인데 왜 자신은 이 검은 짐승을 죽일 수 없는가?
저 건방진 붉은 눈은 왜 아직 빛나고 있지? 왜 집어삼키지 못하고 있는가? 죽이기는커녕 불꽃에 타오르고 아지랑이에 씹어 먹힌 촉수를 보며 재앙의 괴물은 격노해 포효했다.
"―――!"
그 쩌렁쩌렁한 울림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
이변은 굉음과 함께 발생했다. 먼 곳의 잔해가 들리기 시작했다. ―잔해. 부서진 부유섬과 스퀘어의 건물들이 두둥실 떠올라 순식간에 날아든다.
"……!"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잔해들은 더 이상 파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 사방팔방을 가득 덮은 파편과 일대를 완전히 덮은 검은 가지로부터 피어난 가시가 단번에 쏘아졌다.
여태까지 없던 규모의 공격이 퍼부어지는 와중,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그 공격들이 위협적인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피하고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질병의 본체와 촉수가 아니라면 공허와 겁화로 먹어 치우고 불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향하는 방향은 오래된 용이 있는 곳.
물론 환계로 피할 수 있으니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겠지만, 늑대는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홍유리가 오래된 용의 등에서 떨어져 있었으니까. 붉은 마력이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지만, 늑대는 자신이 조금 늦고 말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날아오는 파편에 머리를 부딪치고 가시에 꿰뚫리는 붉은 머리 소녀. 정신을 잃은 채 창공에서 떨어져 촉수에 꿰뚫리고 거대한 턱에 집어 삼켜지고 만다. 이윽고 그 목울대가 넘어갔을 때, 늑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홍유리……!"
현실이 되지 않은 미래. 초감각이 보여준 예측을 깨트리기 위해 달렸으나 늑대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그 예측을 깨트릴 수 없을 거라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미래의 자신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달리고 있다.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거나를 떠나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탄력을 발하고 폭풍을 터뜨려 그 끝에 촉수를 뻗었다.
어느새 파편은 지척까지 다가왔다. 뒤늦게 깨달은 홍유리가 황급히 손을 뻗어왔으나 늑대는 결국, 그 손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부서진 스퀘어의 잔해가 홍유리가 있던 곳을 덮치고야 말았다.
***
우지끈 밀려드는 검은 숲과 출렁이는 대지. 그 안에 있을 보이지 않는 마랑. 질병이 움직일 때마다 걱정이 앞섰지만 그건 오히려 알파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
하지만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리하여 홍유리는 집중에 집중을 더했다. 한시라도 빨리 마법을 완성해야만 도울 수 있을 테니까.
빨리, 좀 더 빨리…!
성급한 마력이 마법을 이어갔으나 무언가 맞물리지 않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태 그렇게나 잘 되던 것들이 어긋나 달라져 있었다.
도무지 마법진이 떠오르지 않는다. 주문을 영창함에 따라 의문이 커지고 있었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되질 않는다.
"……."
초조함은 더 커져만 갔다. 속으로 욕을 지껄인 홍유리는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홍유리!"
몇 번이고 들어봤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싸우다 말고 갑자기 왜…? 고개 돌린 홍유리는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과 함께 자신을 향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대지와 검은 가시를 보았다.
"……!"
집중한 나머지 보지 못했다. 아니, 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수한 파편이 날아와 시야 한 켠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시가 날아오고 질병의 턱은 알파를 삼키려 뒤따라오고 있었다.
손을 뻗었으나, 알파의 촉수를 잡진 못했다.
―그때는 이미 다른 공간에 있었으니까.
방금 있었던 모든 일이 거짓이라는 듯 부유섬의 파편도 괴물의 모습도 알파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었으니까.
"뀨우우웃…!"
정신 차리라는 듯 꼬리로 자신을 두드리는 요정용. 그 모습에 홍유리는 작은 안도를 느꼈다. 페리가 자신을 환계로 데려 와 살린 모양.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닦았을 때, 돋아난 뿔에 걸려 눈살을 찌푸렸다. 식은땀이 가득 묻어나온다. 그러다가 문득 불안이 엄습했다. 자신은 살았지만, 알파는…?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혹시 하는 의문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다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홍유리가 그리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페리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게 아니라는 듯.
"뀨~~!!"
이제 좀 깨달으라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답답해하는 페리의 모습에 홍유리는 그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한시가 급한데 대체 뭘? 아니, 됐다. 일단 돌아가서…
다시 세계가 변한 순간, 홍유리는 지척에 촉수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곧바로 수인을 맺어 진홍의 사슬을 만들었으나 아주 미세하게조차 저지하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힘에 이를 악물고 마력으로 자신을 밀어낸 순간, 풍압에 수십 미터나 날아가고 말았다. 옆이 아니라 아래로. 스치지도 않았는데 고작 풍압일 뿐인데도 공기가 벽이 되어 자신을 쳐낸 것만 같았다.
"……!"
그렇게 바닥으로 내쳐져 몇 번이나 구른 홍유리는 새삼 이 괴물이 재앙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입으로 피를 토하고 아주 잠깐 의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변혁해 앞으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멀다.
대체…… 대체 이런 거랑 어떻게 싸우고 있던 거야?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 찼을 때,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검은 촉수들이 주변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순간, 검은 불꽃이 타올라 자신을 감쌌다. 순식간에 타올라 죽을 거라 생각했으나 불꽃은 따뜻하기만 했다. ―당연하다. 겁화와 공허는 늑대의 권능이나 다름 없었으니. 무엇이든 불태울 수 있었으나 늑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불태우지 않는다.
검은 가지가 자신을 덮치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무언가 허리를 휘감아오더니 자신을 끌어당겼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 어느새 알파의 등에 올라 타 있었다.
―붉은 눈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구해졌다는 사실보다 알파는 무사했다는 사실에 홍유리는 무언가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보다 먼저 살아남기 위해 궁리해야 했다. 촉수와 질병은 계속해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피해도 피해도 거리는 좁혀진다. 자신을 태우고 있는 이상, 알파에게 제약이 있음은 알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짐 덩이가 되는 한 알파에겐 한계가 찾아오리라.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그리 생각한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 별안간 느껴지는 한기에 고개를 돌리자 촉수가 얼어붙고 있었다.
겨울의 주인. 인디고 스퀘어의 마스터와 그 혈족이 발한 대마법이 질병을 얼린 것이다. 그럼에도 겁화를 두른 알파와 자신에게만큼은 대마법조차 침범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울의 혈족이 올라탄 오래된 용과 눈이 마주쳤을 때, 홍유리는 침을 삼켰다.
"……아."
아까 페리가 알리려던 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아서.
얼어붙은 질병은 순식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마법이라도 질병을 죽이기엔 요원한 게 사실이었으니. 얼어붙은 재앙의 괴물은 금세 다시 깨어나 쫓아오리라.
……그래도 이젠 괜찮다.
홍유리는 자신의 역린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정말 착각일까? 아니, 상관없다. 이젠 알았으니까.
이제야,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남은 변혁이 완료되는 계기가 되어 그 의지, 생물 종의 끝에 위치한 용의 의지와 피에 따라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 소용돌이치는 나선의 흐름은 더 빨라져만 갔다.
"……."
그에 늑대는 탄식했다.
[변혁 중(99%)] → [드라코 페일(Draco Pale)]
이젠 모조 엘릭서로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까. 홍유리는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용종이 되고 말았으니까.
멈출 수 없는 흐름이 용솟음치는 순간, 홍유리는 가슴으로도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고. 마법이 잘 엮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전혀 달랐으니까. 사람이 네 발로 걷지 않고 개가 두 발로 달리지 못하듯 용이 된 자신 또한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또한 그렇게 사용한 결이 다른 마법은 여태까지와는 격이 다르다.
"……!"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꿰뚫듯 보는 순간, 창공에 떠오른 진홍의 마법진이 맹렬히 회전해 밝은 빛을 흩뿌렸다. 손을 들어 올린 홍유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흑점은 길게 비틀리며 나선의 창이 되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창공을 꿰뚫었다.
그것을 질병 또한 느꼈을 땐―
"Arde în abis și transformă-te într-o suliță neagră―!"
이미 나선으로 빚어진 비틀린 검은 창이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