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80 하얀 거짓말 (2)
약 한 명이 회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가운데 회의는 무난하게 마무리됐다. 도중에 양심에 찔린 홍유리가 참지 못하고 개소리 말라며 판을 엎으려 했지만, 늑대가 나서 사전에 제지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숙연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끝난 회의.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홍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고 하나 둘 회의실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고생했다."
하연이나 구진하가 어깨를 두드렸을 땐 그냥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지만.
"아 거. ……휴. 미안하다. 고생했어 인마. 들어가서 쉬라고."
강태호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자 홍유리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굴러가자 이제 와 사실대로 말하기가 꺼려진다. 홍유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마치 뾰족한 바늘로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강태호를 멍하니 보던 홍유리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말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수고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쉬도록. 원한다면 휴가는 얼마든지 줄 테니. 아니, 그래야겠지. 누구보다 심란한 건 너일 테니까."
"……."
"종족이 변했다는 건 유례없는 일이다. 내 눈에도 드라코 페일이라고 보이는군."
스퀘어의 걸작인 감정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안경으로 확인한 결과였다. 드라코 페일― 전례는 없지만 옅은 피를 가진 용이라고 해석하면 되리라.
과하게 용혈을 탐한 이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강태준은 잘 알고 있었다. 홍유리는 특이케이스. 지성을 가진 채로 변혁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사례. 앞으로 할 일이 많으리라. 단순한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이들도 있을 테고 이유 없는 악의를 표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쌓여 그녀를 지치게 하리라.
신분이나 여권…… 전례가 없는 만큼 그런 것들을 구비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을 터. 물론, 있는 힘껏 도울 생각이었다. 강태준은 머리를 주억였다.
"한동안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알리고. 재촉하는 일은 없을 테니. …힘내라."
그렇게 강태준마저 떠나가자 멍하니 있던 홍유리는 곧 늑대를 향해 쌍심지를 켜며 눈을 부라렸다.
"너…! 진짜 뭔 개지랄을!"
"왜 그러지?"
샛노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치켜 떠지는데도 늑대는 뻔뻔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모습에 홍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미친…!"
무어라 소리 지르려는 홍유리의 입을 늑대는 촉수를 뻗어 틀어막았다. 강태준의 예민한 감이라면 그렇게 소리치면 들리고 말 테니까.
"……!"
"일단 진정해라."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에 길길이 날뛰려던 홍유리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일단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고 생각해서. 그 대상이 늑대가 아니었다면 말보다 주먹 혹은 마법이 먼저 나갔을 게 분명하리라.
"나쁠 건 없지 않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눈빛에 늑대는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었으니까."
홍유리는 기어이 입을 막은 것을 떼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뭔 개소리야?"
"네가 원한다면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늑대는 굳이 아공간을 열어 모조 엘릭서가 담긴 플라스크를 보여주었다. 짤랑이는 액체를 본 홍유리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러지 않은 건 네 선택이었지."
"그건."
"상황이 널 떠민 게 아니다. 누구도 그러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네가 선택했을 뿐."
시선이 마주해오자 홍유리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귓가를 파고드는 진중한 저음은 그런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질병을 쓰러뜨릴 수 없었을 거다."
"……."
"적어도, 내게는 사실이다."
그 붉은 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마치 자신은 어디까지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듯. 그에 홍유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어느샌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촉수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고맙다."
이어진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여전히 홍유리 본인만이 모르고 있었다.
***
"……아무튼, 그렇게 홍 부팀장이 돌아왔고 알파 또한 클랜 내에 체류 중입니다."
구진하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제외하고 상황을 알렸다. 새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알파를 적대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물론 적대는커녕…… 구진하는 쓰게 웃었다.
역병과 질병. 여태 인류가 죽이지 못한 재앙의 짐승들을 쓰러뜨린 마랑에게 어찌 적대할 수 있으랴.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구획 보스 정도가 아니라 이젠 여명의 전원이 덤비더라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지금의 알파가 얼마나 강할지는 그저 막연하게 상상할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떨떨한 건 다른 누구보다도 구진하 자신이었다. 알파와 이런 식으로 대면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네버랜드부터 시작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물론 전해 들었지만……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게 참 놀라울 따름이다.
숲의 던전, 대전의 밤. 계속해서 알파와 대립했던 때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는데……. 아니, 그런 건 나중에. 구진하는 고개를 털어 잡생각을 날려 보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가능하면 홍 부팀장이 변한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게끔 주의해 주세요."
아카데미 시절부터의 악우가 용종이 됐다는 말에… 그저 복잡한 심경일 뿐이었다.
물론 그 덕에 재앙이 쓰러져 인류는 호황을 맞고 있다지만.
"고결한 희생이었습니다. 만약에라도 헛소문이나 험담을 하고 다닌다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 부팀장님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어느 팀원의 반응에 구진하는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래도 성격이 더러운 거였지 그런 것과는 별개로 묘하게 책임감은 있다. 이번 일도 분명 그 일환이었으리라.
"그리고 이건 노파심이지만, 섣부른 위로를 하겠답시고 함부로 찾아가지 마십시오."
위로받을 일도 아니고 안타까워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 그에 누군가가 움찔거린 게 보였지만, 구진하는 애써 모른 척 넘겼다. 어차피 알아들었을 테니까.
"이상입니다.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길 바랍니다."
그렇게 늑대가 했던 하얀 거짓말은 일파만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알파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잠깐이지만 마랑과 요정용이 있었던 그 나날들이 클랜에 제법 영향을 끼쳤었으니까.
쓰다듬으려 시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걸 허락하게 두지 않는 도도한 용과 강아지. 그건 이미 여명내에서 나름 챌린지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저번엔 실패했으니 이번엔 꼭 성공하고 말리라고 의지를 불태우는 이들마저 있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는 페리와 시간을 보낼 뿐 달리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늑대는 피하거나 쳐냈고, 페리는 꼬리를 휘둘러 보복했다. 물론 그동안 자란 만큼 페리가 진심을 내비친다면 일반인은 심하게 다칠 정도였지만, 페리도 그 정도 구분은 하는지 힘 조절은 하고 있었다.
"악, 감사…!"
맞고 있는데 왜 고맙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늑대는 질렸다는 듯 고개 저었다. 고작 몇 시간 체류했을 뿐인데 벌써 몇 명째인지…
그나마 시도하려는 이들이 커피와 코코아를 공물로 바치지 않았다면 진작 자리를 떠났으리라.
거의 무한 리필에 가깝게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레드 스퀘어, 홍유리의 저택에서 마셨던 그 맛이 영 아쉽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수납 안에 조금 챙겨둘 걸 그랬을 텐데.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하고 쳐내며 무패 신화를 기록해가던 늑대는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
두 눈을 크게 뜬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이은하를 혜견으로 확인한 늑대는 그녀의 마력이 이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증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환계에 있었다지만 그 마력이 벌써 400대 중반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범상치 않은 성장세… 그에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
원작에선 역시 죽었던 걸까? 아니면 헌터를 그만뒀었기 때문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계속 살아서 헌터를 했었더라면 이름난 헌터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금세 다가온 이은하는 방금 온 거냐, 몸은 괜찮으냐, 부팀장님도 오신 거냐는 둥 재잘거리는 듯한 물음들을 쏟아내더니 옆에 종이컵들이 쌓인 걸 보곤 눈을 비볐다.
"이게…"
그러는 사이에도 커피잔이 내밀어지고 늑대는 촉수로 가볍게 쳐냈다. 기묘한 풍습이 굳어져 가는 걸 본 이은하는 실소하며 알파의 옆자리에 앉으려다가,
"뀨~!"
거긴 제 자리라는 듯 페리가 성을 내자 결국, 알파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과연 늑대는 늑대라는 건지 거친 털의 감촉이 쓰다듬을 때마다 손가락 사이에 남아 맴돌았다.
"환계는 어땠지? 다친 곳은 없나?"
"어, 응. 괜찮았어."
홀린 듯 쓰다듬던 이은하는 퍼뜩 정신 차리곤 고개를 주억였다.
"그, 부팀장님은."
"쉬고 있을 뿐이다. 정 걱정되면…"
"아니 괜찮아."
구진하의 말을 떠올린 이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의외의 답에 늑대는 그녀를 올려다보다 끄덕였다.
"그럼 안부만 전해주겠다."
"고마워."
잠깐의 정적. 그 사이에 몇몇 이들이 부럽다는 듯 쳐다보는 눈길에 이은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게 챌린지 비슷한 게 됐나 싶어서.
"환계에선 어땠지?"
"응~ 글쎄?"
그 물음에 이은하는 떠올리듯 턱을 검지로 짚었다.
그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혜견으로 보아 알고 있었지만, 아직 멀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용이 되기 전 홍유리의 수준 정도는 되어야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아무리 자신이라지만 한 손으로 여러 곳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탕아들의 습격에 인류가 직접, 가능한 한 피해가 적게끔 막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제 놈들이 다시 움직이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늑대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은하는 이내 환계에서 겪은 일들을 즐겁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록과 요정들하고 상당히 친해졌다던 요정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던가. 저번에 봤던 라이혼보다 강한 몬스터도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는 등. 늑대의 작은 반응에도 좋아라하며.
"아…"
그렇게 한참 쏟아내던 이은하는 자기 얘기만 해버렸단 걸 알았는지 민망해했다.
"상관없다. 내가 물어본 거였으니."
"……응. 근데 소율이는 역시."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눈부신 성장을 이룬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변혁한 홍유리겠지만 용혈이라는 특이 케이스일뿐이다. 그걸 제외하면 역시 백소율이리라. 부유섬에서 마력까지 받아들인 지금, 그녀의 마력은 나비의 딸인 아넬라와도 엇비슷한 수준이었으니. 마법에 대한 이해 자체는 낮겠지만 졸업도 하지 못한 일개 학생이 가질 만한 마력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식이 있었던가.'
아마 앞으로 한 달 가량. 그때까지 한국에 있는다면 아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늑대는 머리를 털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잠깐 딴 생각을 했다."
"…응."
"스퀘어가 추락하긴 했지만 안심해도 좋다. 백소율은 마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니까."
묘한 표정으로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곤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고 하자 늑대는 가만히 촉수를 흔들었다.
……슬슬 시스템. 단세혁을 만나러 갈 때가 된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