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82 감정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병을 내려놓자 구진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회식. 말이 좋아 회식이지 남들이 퇴근한 클랜 식당에서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더 정확히는 외모와 신분증 문제로 술을 사러 갈 수 없는 홍유리 대신 술 심부름을 부탁받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답답하다는 듯 홍유리는 연거푸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아니, 들이킨다는 것보다 들이붓는다는 게 더 맞으리라.
"적당히 마셔 인마."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강태호는 테이블 구석을 곁눈질했다. 세지 않아도 10병은 훨씬 넘었는데 그 대부분을 홍유리가 마신 거였다.
마시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안주는 사라질 생각을 않는다. 강태호와 구진하는 서로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물론 힘들었으리라. 역병과 질병이라는 답도 없는 괴물과 싸워야 했고 그 와중에 인간을 벗어나고야 말았으니까. 전례도 없는 일이었으니 그 심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희생을 치르며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이젠 그만 마시게 해야 할 터. 잔에 술을 따르지 않자 아예 병나발을 불려는 그녀를 구진하와 강태호가 기겁하며 뜯어말렸다. 심기 불편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노려보자,
"너 인마…"
고개를 저은 강태호는 한숨과 함께 술을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용종이 된 게 역시 어지간히 심란했던 모양… 혼자 내버려 두는 것보단 잠자코 술이라도 따라주는 게 나으리라.
물론, 실상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개좆같네……'
거의 8, 9병은 마신 것 같은데 용이 되면서 주량이 늘었는지 아직 견딜 만했다.
'기다리고 있기는 개뿔이…!'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뭐? 위험하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시발, 그게 말이야 방구야?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뭐 언제는 안 위험했나? 왜 새삼스레 지랄이지?
어이없어 황당해하고 있는 걸 납득했다고 받아들인 건지 그대로 나가더니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걸 생각하니 빠드득 이가 갈렸다.
'이 개새…'
다시 열불이 치솟아 잔을 들이켰다. 들이켰지만, 쓸데없는 걱정으로 반 밖에 차 있지 않은 잔에 감질맛을 느낀 홍유리는 병째로 들이켰다.
"야!"
기겁한 구진하가 뜯어말리려 했지만, 강태호의 손에 저지당했다. 뭐 하는 거냐고 묻는 눈빛에 강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냅둬라. 말해봤자 듣지도 않을 건데."
"2팀장님."
"어허. 형님 인마."
강태호의 턱짓에 구진하는 그 방향. 아직 남은 술병들을 보았다.
"차라리 우리가 빨리 마시고 치우는 게 낫다고. 알아들어?"
구진하는 입술을 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마실 거라 생각해 사 온 거였지만, 홍유리가 폭주해 달리는 이상에야 얼른 마셔버리는 게 나으리라.
그러는 사이, 홍유리는 기어코 한 병을 더 비워냈다.
바득바득 이를 갈아가며 오징어 다리를 씹었다.
어, 그래. 위험하니까 기다려라…?
그렇게 진중하게 도와준다고 했던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딴소리지?
아니, 애초에 누가 하라고 했나? 지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놓곤 뭐 얼마나 지났다고?
'어떻게 변하든 도와줄 테니. 어떻게 해서든.'
그 말을 떠올린 순간, 홍유리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멍한 눈으로 손을 멈춘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구진하와 강태호는 이때다 싶어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유리는 머릿속에 가득 찬 상념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 떠오르는 것들……
엇갈렸다가 다시 이어진 관계. 처음은 어디였더라? 숲의 던전이었던가? 사실 그때 일은 뒤늦게 들었을 뿐이지만… 그다음은 강화도. 페리를 인질로 잡아 붙잡았었는데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배려받았으니까. 네버랜드가 끝나고 여명에서 지냈을 때… 서리 계곡에서 끌어안겼을 때… 화산각룡과 싸우며 얻은 유대감… 그리고 스퀘어에서 알파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다가 홍유리는 고개를 떨궜다.
그냥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으라고.'
고작 며칠 전에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린 홍유리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누군, 누군 떠올리기만 해도 아직 쪽팔리는데…!
계속 옆에 있으라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던 주제에. 그게 물론 24시간 밀착해 있으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하루 이틀 만에 깨 버릴 거면 대답은 왜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끝도 없다.
두근거림과 쪽팔림. 짜증과 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감정의 순환 속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빡쳐있지 하는 의문. 사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위험하니까 기다리라는 게 이렇게 열 뻗칠 일인가 싶어서.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던 홍유리는 그 의문을 파고들어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곤 자기감정을 곱씹어보았다.
이게 맞는가하고. 맞은편의 두 사람이 억지로 술을 마시건 말건 홍유리는 계속 곱씹다가 끄덕였다.
아무래도 맞는 거 같다고.
그럼 그냥, 그냥 확 질러버릴까……?
술기운과 함께 함께 한 마디 쏘아붙이려 벌떡 일어난 홍유리는 어쩐지 눈앞이 빙빙 돌기 시작하자 비틀거리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아니 뭐. 그래. 평소 주량보다 더 마시기는 했지…?
그렇게 납득한 순간, 홍유리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졌다.
***
"……오자마자 간다고?"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묻는 강태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왜? 도울 일이라도 있나?"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닌데… 그냥 널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쉬워하겠군."
"……?"
늑대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만날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만났으니까. ……누가 있었나? 곰곰이 떠올려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급한 게 아니라면 하루 이틀 쉬었다 가도 될 텐데?"
잠깐 고민하던 늑대는 이내 끄덕였다. 사실, 홍유리를 그냥 두고 간다는 게 찜찜하긴 했으니까.
일단, 설득해보자.
이번엔 정말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에 의해서. 공허를 다뤘던 건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안에 잠든 본능이었으니까. 필연적으로 공허를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는 그 본능을 일깨워야만 한다.
한데 그 과정에서 이성이 가라앉고 본능이 깨어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당장 질병을 쓰러뜨렸을 때도 그랬고, 강화도에서 홍유리와 싸웠을 때가 그랬다.
약속했다고는 해도 그 약속이 홍유리 본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면 없으니만 못하다. 그녀의 손을 먹어 치웠던 그런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다.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절대로.
더 오가는 말 없이 강태준은 서류를 휘갈기기 시작했고 늑대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눈살을 찌푸렸다. 밤이 깊어 느껴지는 기척은 거의 없지만 아래층에서 알싸한 냄새가 올라왔으니까.
냄새의 근원지로 다가간 늑대는 별안간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는 홍유리의 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
얼떨떨한 표정으로 구진하와 강태호가 쓰러진 홍유리를 보고 있었다.
"이거, 올려놔야겠지?"
"휴… 예."
"위로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는데 지 혼자 뻗네. 참 나."
귀를 후비더니 후 불어버리는 강태호는 테이블에 늑대가 다가오자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오. 뭐여."
"……."
"너도 마시려고 왔냐? 얼마든… 거의 없긴 하네."
헌터 셋이 빠르게 달린 결과, 그나마 있던 술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태호는 멋쩍게 옆머리를 긁었다.
"쩝…"
아쉬운 대로 남은 술이라도 주려는 모습에 거절하려던 늑대는 잠자코 받아 마셨다.
홍유리가 술판을 벌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둘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몇 번을 생각해도 두고 가는 게 맞으니까. 말은 못 해도 벌주라는 생각에 들이킨 늑대는 역시 새삼스레 취기 같은 게 올라올 리 없단 걸 깨달았다.
그럴 기미조차 없다. 이런 소주가 아니라 그 어떤 술이라도 마찬가지이리라.
극기와 완화까지 가지고 있는데 고작 술에 취할 리 없었으니까. 그에 늑대는 조금 묘한 감상을 품었다.
"미안하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들이 자신을 보자 늑대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홍유리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으."
취해 쓰러진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을 늑대는 그저 묵묵히 닦아주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홍유리가 왜 이러는지는 알고 있다. 그녀 입장에서는 서운하게 느껴지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래도 이게 맞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위험한 곳에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으니까.
"…이 개새."
잠꼬대겠지만 늑대는 쓰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나. 할 일도 많을 사람들을 굳이 불러 마셔야 했나 싶어서. 그러다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빤한 시선들이 자신을 보고 있어서.
"……."
"……."
그제야 늑대는 자신이 뒤척이는 홍유리의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젠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에 두 사람이 놀라 하는 걸 뒤로한 채, 늑대는 그녀를 들어 계단을 올랐다. 연신 중얼거리는 잠꼬대를 애써 못 들은 체하며.
***
날이 밝았을 때, 늑대는 강태준이 말했던 자신을 기다렸다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자루 창을 옆에 세워 두고서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성의 모습을.
"……오랜만이군요. 알파. 은공."
그 말에 늑대와 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지 제법 시간이 되기는 했었으니.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찾아올 줄은 몰랐다.
"많이 변했군요."
놀란 듯, 은자림은 페리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는 다소 달라졌으니까. 크기도 모습도 전부 다.
"뀨!"
꼬리를 늘어뜨리며 은자림의 양어깨를 점령하다시피 누운 페리는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이듯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며 늑대가 물었지만, 눈썹이 조금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감사?"
그 말에 은자림은 자신의 창을 감싸고 있던 천을 헤쳐 보였다. 그 속에서 드러난 건 이전과 같은 백색의 창이 아니라 붉고 검게 빛나는 기다란 창이었다.
"이건……"
"여명에서 가지고 있던 재료죠. 당신이 쓰러뜨렸다고 하더군요."
한눈에 보더라도 화산각룡의 뿔임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홍유리의 몫으로 분배된 걸 클랜에 넘긴 것을 그녀가 일부 구매했던 모양.
다만, 그저 깎아냈을 뿐 어떤 처리가 되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대단하더군요. 제련할 방법이 없었을 정도로."
"……."
"이것마저도 처형자의 낫으로 간신히 깎아낸 거예요.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의 형태로 만드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강태호도 무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지 의문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었더니 답도 없었던 모양.
홍유리가 깨어나면 설득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곯아떨어졌으니 제법 시간이 걸리리라. 그동안 조금 도와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아침이 밝았을 때, 홍유리는 깨질 듯한 머리를 싸맸다. 술을 마셨던 건 기억나는데 언제 방으로 돌아왔나 싶어서.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덮고 있는 모습에 눈을 끔뻑였다.
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거기에 머리가 띵해서 움직이기가 어렵다. 술에 취한 자신을 누가 올려다 줬는가보다 하고 말았다.
그러다, 밖이 이상하게 소란스럽단 걸 눈치챈 홍유리는 그게 옥상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코트를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갔을 때, 이상하리만치 몰려있는 인파. 클랜에서 시간이 남는 사람들은 죄다 몰린 것만 같다.
도대체 뭘 하나 싶었던 홍유리는 사람들의 탄성이 새어 나오자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보이지 않아 마력을 발판처럼 만들어 보았더니, 거기에 알파가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엇, 부팀…"
그러는 사이 자신을 눈치챈 이은하가 쫑알거리려 하길래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찌릿한 눈빛이 자신을 노려보자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봐. 이게 뭔 개지랄인지."
"…설명요?"
"어."
"저도 지금 와서 잘…"
혀를 찬 홍유리는 다시 저 너머를 보았다. 촉수를 꺼내 무언가를 자르고 찢는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그 무언가가 화산각룡의 뿔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별생각 없었을 텐데…… 역시 심기가 불편했다.
그 옆에 누가 서 있다는 게. 태연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결국, 홍유리는 한숨을 쉬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부팀장님?"
의아해하는 이은하를 내버려 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