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82 감정 (2)
촉수가 닿는 곳마다 창이 깎여나간다. 분몃 처형자의 낫으로도 힘들었는데 너무 쉽게 잘려 나가는 모습에 은자림은 눈을 끔뻑였다.
"이 정도면 만족하나?"
그 물음에 은자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검붉은 창이 뜨겁게 달아올라 만지기만 해도 화상이라도 입을 것만 같았다. 고민하다 힘겹게 잡았을 때, 창 자루에선 따뜻함만이 느껴질 뿐 의외로 뜨겁지는 않았다.
물론, 늑대가 제련하는 방법을 알 리 없다. 무기 따위는 쓰지 않으니까. 다만 은자림이 원래 쓰던 창처럼 모양만 깎아 만들었을 뿐. 진짜 장인이 만든 그런 무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전 그녀의 창처럼 연성이 있어 휘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스퀘어의 물품들처럼 특수한 힘이 담겨있는 것도 아니다.
"아……"
하지만 은자림은 탄성을 질렀다. 특수한 처리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마치 뗀석기처럼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던 뿔이 제대로 된 형상을 취한 것만으로도.
형태만 본래의 것에 근접하더라도 더 없는 무기. 그도 그럴 것이 다름 아닌 화산각룡의 뿔이었으니까. 구획 보스조차도 깔아보는 각룡의 뿔은 그 자체가 최고의 소재였다.
"더 필요한 게 있나?"
그 말에 은자림은 고개를 저었다. 장인의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써 온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손에 꽉 맞는 무구… 이보다 더한 선물이 있을 리 없으니까.
혜견. 그 눈썰미가 그녀의 손에 맞게끔 깎아 만든 것.
숨을 토해낸 은자림이 가볍게 창을 휘두르더니 홀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휴. 또 빚이 생겼군요."
"빚이라고 할 것까지는…"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겠어요."
진중히 고개 숙이는 그 모습에는 빚을 졌다는 말과는 달리 일말의 비굴함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마저도 고결하게 보일 뿐. 편한 대로 하라고 늑대가 끄덕였을 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늑대는 발을 멈췄다.
"아, 그리고… 백소율 양은 지금 저희 클랜에 있어요. 아넬라 모레스트 씨와 환영의 나비께서도."
"……."
"만나게 되면 안부 전해달라더군요."
늑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쿵- 떨어진 물건에 옆을 돌아보았다.
"하는 김에 내 것도 해 주면 안 되냐?"
"……."
"아 그렇게 보지 말고 인마. 우리가 어떤 사이냐? 어젯밤에는 같이 술잔도 기울인…"
강태호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는 시선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코트를 입은 누군가. 인파가 몰려있어도 늑대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약해지는 듯했지만 번복할 생각은 없다. 다만, 떠나기 전에 찾아가 설득할 뿐.
"뀨우우웃!"
잠깐 한눈판 사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강태호는 페리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이전에 그가 사용하던 패태검처럼 만들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늑대가 그렇게 대검을 만들어주고 있는 사이, 은자림은 한 소녀의 모습을 보곤 이리 오라 손짓했다. 그렇게 다가온 이은하를 은자림은 놀란 눈으로 살폈다.
"대단하네요… 정말 그때 그…"
"네. 오랜만에 뵙네요, 선자님!"
"그래요. 오랜만이기는 하네요."
선자, 은자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랜만이라고 해봤자 두 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선비는 사흘만 보지 못해도 눈을 비비고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혹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요?"
"네? 그럴 리가요!"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지만, 믿기 힘들었다. C클래스 수준에 불과하던 소녀가 이 짧은 시간 만에 어지간한 B클래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성장했으니까.
그건 고원에서도 자신의 클랜에서도 본 적 없는 성장세. 여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아니, 한 명 있었지.'
은자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거기에 있는 건 검은 강아지… 그래. 그를 제외하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장을 이뤄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유심히 보던 은자림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알려줄 수 있나요? 그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를."
***
"오……!"
강태호가 완성된 검을 휘두르려 하기에 얼른 붙잡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가 가볍게 휘두르기만 해도 옥상은 쑥대밭이 될 테니까.
멋쩍게 웃은 강태호는 슬그머니 대검을 아공간 속에 집어 넣었고, 사람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검공이라 불리는 이가 새로운 무기를 휘두르는 걸 보고 싶었던 모양.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안 된다.
아쉬워하는 강태호를 뒤로 하고 은자림과 대화하고 있던 이은하에게 다가간 늑대는 그 대화를 들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비상식적인 청각이 제멋대로 소리를 가져오고 만다.
"……그, 그게."
곤란하다는 듯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이은하. 진작부터 대화를 듣고 있었기에 늑대는 픽 웃어버렸다.
그동안 뭘 하고 지냈는가 하는 물음.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환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만 그냥 적당히 둘러대면 될 텐데… 이은하답다면 이은하다운 모습이었다.
괜히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여긴 은자림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이은하는 당치도 않다며 쩔쩔맨다. 페리는 그걸 보며 좋아라 날고 있었고… 그래. 도와줘야지. 어느새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구름 없이 하늘은 맑고 아무튼, 그런 평화로운 날.
늑대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혼자 술병을 기울이던 홍유리는 문득 밖을 보았을 때 제법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와 있다. 그걸 노을 녘이 질 때까지 그냥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일어나서 숙취를 견디고 맨정신으로 생각해봤을 때, 냉정하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서.
그야, 그런 게 아니라면 혼자 이 지랄 궁상을 떨고 있을 리 없으니까.
억지로 들이켜는 술. 아까부터 더럽게 맛없다. 원래 이렇게 썼나 싶어 퉤퉤 뱉었을 때, 누군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 없는 손길이 참 익숙해서.
남은 잔을 들이키려다가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뭐. 왜."
"……."
"왜 잡는데."
그래도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괜히 지금 눈을 보기가 싫어서.
"어제도 쓰러졌으니까."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지?"
손목을 잡은 손길이 놓아졌다. 그래도 차마 들이켜진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힐끔 돌아보고 말았다.
"……!"
거기에, 빤히 보고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곤 당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 씨…"
거기에 한술 더 떠 예상했다는 듯, 잔을 들어 올리기 전에 하는 말에 맥이 빠졌다.
"그만 마셔라."
"……네가 뭔데?"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다."
곰곰이 생각하던 홍유리는 순순히 잔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대신에 홱 몸을 틀어 돌아앉았다.
"야."
마주 본 그대로 붉은 눈이 자신을 보자 홍유리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안주도 없이 혼자 마시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취기가 심하게 올라와 있었다.
어지러운 걸 누르며 홍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넌 내가 짐이야?"
그렇게, 묻고 말았다. 아니라고 대답은 하겠지만 정말 그 속이 어떨지는 몰라서. 붉은 눈을 뚫어지라 유심히 쳐다보았다.
사실, 지금의 알파에게 누가 짐이 아닐 수 있을까? 적어도 역병과 질병에 맞서 싸우던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다. 짐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그런 자신이. 말로는 아닐 거라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한참이나 정적이 깔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초조해질 무렵,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어쩐지 달라진 분위기와 진중한 목소리에 홍유리는 꼴깍 침을 삼켰다. 혹시 뭔가 잘못 건드렸나 싶어서.
순간 움찔했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여긴 홍유리는 담판을 지을 생각으로 그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기다리라며."
"위험하니까."
"언제는 안 위험했어?"
"……."
"네가 말한 거잖아."
답답하다는 듯, 홍유리는 가슴을 두드리다가 목이 메어오는 것에 술을 들이켰다. 타는 듯한 속과 빨라지는 고동 소리. 그런데, 정작 꾹 입을 닫고 있는 늑대에게 눈을 부라렸다. 짜증이 치솟아 화가 되자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제멋대로 쏟아져나왔다.
"도와준다면서."
"옆에 있어 주겠다면서?"
"근데 왜 혼자 가려고 지랄인데!"
호소하듯 소리치는 말에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물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금방 돌아오겠다던가, 네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라든가 그런 말들.
하지만 그걸 그녀라고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똑바로 노려보는, 세로로 찢어진 샛노란 동공과 선홍색 눈동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짐이냐는 그 물음이 최후통첩같이 느껴져서. 약속을 되묻는 것처럼 여겨져서.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씩씩거리는 그 눈이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늑대는 답했다.
"미안하다."
그 짧은 단답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 마주 본 눈동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뜨였다. 붉은 입술이 한참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채 다물어졌다.
힘이 빠진 손에 들려있던 잔이 떨어져 깨졌다. 그 시끄러운 소리조차 정적을 깨진 못했다.
"……."
입술을 짓씹은 모습에 늑대는 머릿속으로 변명을 궁리했다. 그러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변명을 내뱉는 것보다 빠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 들었다.
"……그럼 왜, 왜."
그 떨리는 목소리에 늑대는 침을 삼켰다.
"약속은… 왜 한건데?"
울먹이는 듯 호소하는 목소리와 술기운에 꼬여버린 혀. 서로 답을 알고 있음에도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는 문제여서.
늑대는 홍유리가 위험을 겪지 않길 바랐다. 곁에 있겠다는 약속 또한 그 일환이었으니까.
반대로 그녀는 함께 가기를 원했다. 설령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두 고집쟁이는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늑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설득하는 게 절대 쉽지 않으리란 것 또한.
분명,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으리라.
이성으로 건네는 말은 눈꽃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져버린다. 이 순간, 필요한 건 말과 논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늑대는 그녀를 껴안았다.
처음에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놓으라며 애를 쓰고 밀쳐냈지만 늑대는 담담히 받아냈다. 악을 쓰고 울고 불고. 그런데도 뗄 수 없도록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익…!"
결국 제풀에 지친 홍유리가 먼저 늘어지고 말았다. 괜히 움직이느라 술기운이 핑 올라와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은데…… 어느새 끌어안은 손길이 자신을 토닥이고 있었다.
……아, 그래. 이래서였다.
말로 하지 않은 배려가, 그런 행동들이 좋아서. 또,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왔는지 봐버렸으니까.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해서……
끌어안긴 그대로 홍유리는 멍한 머리로나마 생각했다.
아, 내가 졌구나 하고서.
어느새 또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으니까. 그 품에 안겨 따뜻함을 느껴 버렸으니까. 쓸어내리자 손가락 사이로 거친 털이 빠져나갔다.
그 분함에 주먹 쥐어 때려봐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게 더 열 받았다.
"그거 알아?"
"……."
"넌 진짜 개새끼야."
그 말에 늑대는 실소해버렸다. 그래. 고집은 말과 논리로는 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감정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서 알아버리고 말았다.
새삼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억지로 두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관계가 어그러져 깨져버린다는 게.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지도 모른다는 게 더 싫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 품 안에 있는 홍유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겠다고 멋대로 놓아버리는 것보다 감정에 호소해서라도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그걸 서로가 알고 말았다…….
늑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참았던 숨을 뱉었다.
개새끼라는 말에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대답, 안 할 거야?"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채, 뚱한 눈으로 물어온다. 명확한 답을 요구한 건 아니었지만 얼버무릴 수는 없다. 서로가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거기에 망설임은 있다.
"……넌 그걸로 괜찮은 건가?"
자신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백록이 말했던 것처럼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괴물이 지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괴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생략한 말을 서로가 알아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홍유리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나도 아냐."
마치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태도. 어느샌가 늑대는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목을 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난 그냥 너라서…!"
마지막 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달빛이 비춰오는 가운데, 서로의 그림자가 겹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