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83 본능
"뀨~? 뀨~뀨~!"
클랜장실에 들어온 순간, 곤히 자고 있던 페리가 날아와 달려들더니 바로 앞에서 멈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눈 사이를 좁히던 페리는 평소와 같은 손길이 턱 아래를 쓰다듬자 금세 좋아하며 헤실거렸다.
강아지일 때의 자신보단 커다란 페리가 뺨을 비비자 늑대는 픽 웃으며 마주 비벼주었다. 자는 동안 어딜 갔었냐는 듯 앙탈 부리는 녀석을 달래줬을 땐, 강태준이 빤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가는군."
"시간이 아까우니까."
"……시간이 아깝다라."
그 말에 강태준은 책상 위로 리듬감 있게 손가락을 튕기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
위기가 다 사라진 건 아니라지만, 인류를 멸망으로 몰던 직접적인 원인인 역병과 질병이 쓰러진 이상 조금쯤은 여유를 가져도 괜찮을 터. 물론 그가 말한 대로 만상의 주인이 탕아들의 수장이라면 아직 안심할 수는 없을 테지만.
"탕아들의 소식은 알고 있나?"
"……글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한국 땅에서는 뿌리를 뽑았다지만 외국에도 놈들은 숨어 있고 물 밑에서 작업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놈들에게도 상당한 피해가 있었으니까.
저거노트를 쓰러뜨리고 침묵하는 입을 쓰러뜨렸다. 스퀘어에서 나비의 날개가 꺾이는 것도 막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거기까지. 강훈은 네버랜드에서 살아남았고, 그 외에도 아직 간부들은 남아있다.
물론, 만상의 주인을 제외한다면 새삼 자신에게 닿을 수 있는 탕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스퀘어 마스터와 칠영웅을 포함하더라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들 다수와 싸운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아무튼, 싸우는 건 두렵지 않다.
걱정되는 건 오히려 그 반대. 그들과 싸우지 못할 경우.
탕아들이라고 바보는 아니니까. 세간에 알리지는 않았다지만, 자신이 역병과 질병을 쓰러뜨렸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수장부터가 스퀘어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었으니.
따라서, 놈들이 자신에게서 숨으려 하는 건 당연한 일.
물론 찾아내 물어뜯을 생각이지만, 전 세계에 숨어있는 놈들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혼자서 그들 전부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그러니 헌터들이 성장할 필요가 있다. 하나라도 더 뛰어난 헌터가 나타나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게끔 만들 필요가 있다.
이은하에 대한 투자도 그 일환. 재능있는 헌터들에게 환계 던전을 클리어하게끔 만들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 자신이 없더라도 탕아들과 맞설 수 있도록.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뜻이다.
……그래도 분명 성과는 있었으니까. 돌아올 때까지 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두는 게 나으리라.
"알게 되면 알려주겠다."
"부탁하지."
끄덕인 늑대는 방을 나서기 전 강태준이 옅게 웃으며 다시 강조하듯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잘 부탁한다."
***
아직 클랜원들이 출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여명의 옥상으로 올라왔을 때,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강태호가 말을 걸어왔다.
"가냐?"
가볍게 묻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리만치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온 그가 푹 한숨을 쉬었다. 잠을 자지 못했던 걸까? 드물게 피곤해 보인다. 곧 몸을 일으킨 강태호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말했다.
"너 인마. 수련하러 간다며. 나도 같이 가자고."
그 말에 늑대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완곡한 거절의 반응에 강태호는 콧등을 긁었다.
"뭘 그러냐. 나도 칼질이나 좀 하고 싶다는 건데."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만큼 단호한 태도. 그에 강태호는 멋쩍게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늑대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분명, 강태호는 강하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지간한 탕아의 간부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헌터와 마법사라는 차이는 있어도 스퀘어 마스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 정도로 안심할 수 있다면 지금의 홍유리도 데려갔을 거다.
[공허―격의 상승 1/3]
격은 상승했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이전과 별다를 게 없다. 격의 상승을 이룩한 건 이성을 가진 자신이 아니라 본능이었으니까.
짐승이 다루었던 공허의 힘은 자신이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고 원초적이었다. 겁화를 비롯해 온갖 스킬들을 구사하면서도 밀어붙이지 못했던 질병을 깨어난 본능, 짐승은 공허와 잠식만으로 숨통을 끊었었으니까.
그 모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이성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전부 집어삼켜 먹어 치우는 괴물― 자신의 안에 도사린 흉폭한 짐승, 그것이야말로 먹어치우는 자의 본성이리라.
……물론, 통제권을 잃고 본능에 지배당하는 짐승으로 전락했던 건 최악의 기분이었다. 다신 맛보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기억이었고 그 때문에 홍유리를 죽일 뻔했다. 하지만 덕분에 자신이 미숙하단 걸 알게 됐다.
모르는 것과 아는 건 전혀 다르다.
모르는 채 진화했다가 먹어치우는 자가 아니게 된다면, 지금의 본능과 마주할 기회는 더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공허를 제대로 다룰 기회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걸 위해선 필연적으로 내면의 굶주림 짐승을 깨워야만 한다. ……그러니 아무도 데려갈 수 없다. 날뛰는 자신이 무엇을 할진 차마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건 강태호 또한 예외가 되진 않는다.
그 단호한 의지를 느꼈는지 강태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시험해보고 싶기는 했는데 뭐…"
"대신 원한다면 그런 장소를 알려줄 수는 있다."
"오, 어딘데?"
근질거린다는 듯 흥미를 보이는 강태호를 인도했지만, 페리는 질색하며 떨어지려 했다. …대체 얼마나 업보를 쌓아온 건지. 늑대는 고개를 저으며 한참을 달랬고, 그렇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강태호는 환계로 가 그가 만족할 때까지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홍유리는 힘겹게 눈을 떴다. 원래라면 조금 더 자도 괜찮았을 텐데 용종이 되면서 필요한 수면 시간도 적어진 모양…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몸을 일으켰을 땐, 예상과는 달리 어젯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난장판이 돼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깨끗하게 정리돼 환기까지 끝마친 방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누가 그랬을지는 뻔하니까. 언제나처럼 당연하다는 듯한 배려가 심금을 울려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이 남아 있어서. 사라졌다고 여긴 파과의 흔적이 아직 통증으로 남아 있었다.
흔적은 다 지워져 있는데 그 아픔만이 남아 새벽의 일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졌다. 지고 말았다.
벌써 떠난 걸까? 그래도 일어났을 때 정도는 옆에 있어 줬음 했는데……
"……개새끼."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린 게 야속해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럴 거면 좀 더 버텨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아니, 그래도 안 된 거잖아. 언제는 안 버텼나?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해도 소용없다. 대신, 알파가 돌아올 때까지 할 일을 하자. 복수는 돌아온 다음에 하면 되니까…….
어제까지 느꼈던 조급함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지고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잠깐 멍하니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양쪽 볼에 발그랗게 홍조가 떠올랐다. 입가는 제멋대로 부르르 떨리고, 계속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누르다가 그게 되지 않자 이불 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애써 들뜬 가슴을 누르며 심호흡한 홍유리는 진정하고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은하부터 굴리자. 그리고 신분증도 만들고 집도 사 둬야겠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꾸 딴생각이 들어서. 애써 잊으려 해도 쉽게 잊혀지 않는다. 자꾸 새벽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만다. 머리를 마구 헝클어도 잡념이 사라지지 않자 홍유리는 침대에 드러누워 대자로 뻗었다.
뭉게뭉게, 천장에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꼴깍 침을 삼켰다.
잠깐이나마 변했던 그 모습은…… 야성적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 넘겨져 있었는데 마치 야생에서 살다 온 사람 같았다. 아쉽게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긴 했는데, 그래도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편에 속했다. 아니, 그냥 잘 생긴게 분명해.
혼자 끄덕거리며 납득하던 홍유리는 왠지 수마가 찾아오는 걸 느꼈다. 일어나려면 일어날 수야 있겠지만… 아직 전신이 욱신거린다.
그냥 참고 일어날까 하다가 순순히 거기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고작 며칠 쉰다고 새삼 잔소리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쪼금만 더…….
열락의 밤을 지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피로. 늑대의 하얀 거짓말에 기대어 홍유리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다시 잠을 청했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꼬리만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
한참이나 달려 밤이 되기 전에 늑대는 목표한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환계의 테헤란. 여기라면 얼마든지 날뛰어도 상관없을 테니까. 역병과의 싸움 이후, 요정용들이 오염을 거뒀다고는 하지만 아직 생명의 씨는 마른 채 그대로였다.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폐허로 돌아왔다는 아이러니한 감상을 품은 채, 늑대는 가만히 조금 먼 곳을 보았다.
거기에 있는 건 기다랗게 몸을 웅크린 오래된 용과 그의 옆에 죽어 쓰러진 채 남아있는 질병의 사체. 자신이 부탁했던 대로 오래된 용은 질병의 남은 사체를 지키고 있었던 거다.
"돌아왔군."
용의 말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걸 가지러 왔는가?"
끄덕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본능을 일깨워야만 하니까. 지금 질병의 사체를 먹는 건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일이다.
"그렇군."
가볍게 설명하자 오래된 용은 웅크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질병의 사체에 접촉한 그대로.
"그럼 어린 용들이 오지 못하게끔 타일러두겠네."
그 배려에 감사를 표한 늑대는 페리를 부탁했다.
기왕 여기까지 오게 된 이상, 페리도 할 일을 하는 게 나을 테니까. 아니, 옆에 아무도 없기만을 바랐다. 혹시 모를 불상사가 일어날 일말의 가능성조차 배제하고 싶어서.
얌전히 오염을 먹으며 기다리게 하는 게 나으리라.
"뀨우."
늑대의 귀를 깨문 페리가 잘근잘근 씹었지만, 그렇게 칭얼거려도 이번만큼은 옆에 둘 수 없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니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떠나갔다.
……
그렇게 혼자가 됐을 때, 늑대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본능을 어떻게 끌어내야만 하는가―― 그게 문제였다.
생각해 둔 방법은 둘 있었지만…….
첫 번째는 강화도에서 홍유리와 싸웠을 때처럼. 감정이 격렬해져 이성의 끈이 끊어지면 본능이 튀어나오게 되리라. 하지만 50에 이르는 극기가 그걸 용납지 않을 터…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감정이 쉽게 끓어오르진 않을 테니까.
따라서 이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남은 한 가지 방법은 질병과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계의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본능이 드러나게끔 하는 것.
결국,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늑대는 공허를 불러일으켰고 공허는 곧 늑대 자신을 집어삼켰다.
***
"아……!"
은자의 숲에 의탁하고 있던 아넬라와 백소율. 마법을 가르치고 배우던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질렀다.
조그마한 알껍질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그런 게 아니라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우화하고 있었다……!
"소율 양!"
멍하니 있던 백소율은 바삐 움직이는 아넬라의 호통과 같은 말에 정신 차리고 뭐가 필요한지 알 수 없어 떠오르는 것들을 일단 전부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가져왔을 땐, 흔들림은 커져 있었고 당장에라도 우화할 것처럼 금이 간 알껍질을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올 것 같네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조금 기다렸을 때, 알껍질을 밀어내고 조그마한 요정용의 머리가 아주 잠깐 올라왔다.
"뀨이잉."
하지만 힘이 부족했는지 차마 껍질을 치우지 못하고 나오지 못했다. 그런 시도가 계속되자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다가, 아넬라의 손에 제지당했다.
"내버려 두세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있나요. 어련히 알아서 나올 거예요."
단호한 말에 백소율은 뻗은 손을 거뒀다. 곧, 아넬라의 말마따나 알껍질을 비집고 가까스로 기어 나온 조그마한 용의 모습에 백소율은 혹시 몰라 준비해둔 따뜻한 물로 피부에 묻은 점액을 닦아주었다.
뀨뀨거리며 날개를 파닥거리는 어린 용이 울어젖히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백소율은 혹시라도 다칠까 조심스레 두 손에 담듯이 안아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울음이 멎었고, 그렇게 눈이 마주친 요정용이 작은 팔을 뻗어오자 소중하다는 듯,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뀨웅."
혀가 닿아 볼을 핥았을 때, 백소율은 탄성을 질렀다. 정말로 태어났구나해서. 처음 만났을 때의 페리보다도 훨씬 조그마한 갓 태어난 새 생명…… 하물며 누구보다 소중한 이에게 받은 아이.
"아……."
벅차오르는 감정에 제 멋대로 눈물샘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넬라는 픽 웃으며 백소율에게 물었다.
"이름은 정했나요?"
"……네. 감마로 하고 싶어요."
별로 좋은 어감은 아닌 것 같은데……? 원래 네이밍 센스가 없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넬라는 이내 픽 웃어 버렸다.
"무슨 뜻인지 알만하네요. 그럼 소율 양이 베타인가요?"
히죽거리며 묻는 말에 백소율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지만, 차마 붉어진 볼을 감추진 못했고 그에 아넬라는 실소했다.
"참 귀엽기도 해라~. 아, 저는 편견 없이 응원하고 있어요. 알고 있죠?"
백소율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날, 감마라는 이름의 요정용이 우화해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