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83 본능 (4)
퍼스트 클래스에서 다리를 꼰 채로 홍유리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뭔가, 뭔가 거슬리는데 그 정체를 모르겠다. 초조함? 불안함? 그런 막연한 것들일까? 어쩌면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그런 알 수 없는 것들이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짜증이 치밀어오르자 홍유리는 짧게 혀를 찼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뭔 개지랄을 떨고 있길래 이렇게 안 오는 건지.
먼저, 나막 호로 가서 요정용 한 마리만 찾으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터. 환계로 갈 수만 있으면 찾는 건 금방일 테니까.
그 옆 좌석에서 강제로 끌려온 이은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퍼스트 클래스는 고사하고 비행기를 타본 경험 자체가 손에 꼽는데… 벌써 몇 시간째 타고 있지만, 도무지 이 화려한 좌석이 적응되지 않았다. 아마 내릴 때까지 그럴 것 같다.
스크린에 와인. 심지어 잠옷에 슬리퍼까지. 자신이 호텔을 온 건지 비행기를 탄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고객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과하게까지 느껴지는 친절. 승무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은하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렇게 승무원이 떠나가자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저는 왜……?"
"너 저번에 환계 말 할 줄 안다며."
"네. 그건 그런데요……"
연신 말을 흐리는 게 답답해 홍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시발. 말 좀 똑바로 하지?"
"대체 왜 절 데려오신 건지 모르겠어서요."
"환계 말 할 줄 안다며? 배웠다며."
"아. 요정어요? 네."
"그럼 요정용한테 환계로 보내 달라고 말만 하라고."
"네에에?"
왜 또 말꼬리가 늘어지고 지랄이지? 꼬집어 뜯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니 쭈뼛거리던 이은하가 우물쭈물 답했다.
"그, 걔네가 모르는데요?"
"뭐?"
"걔네 말 못한다고요…"
그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멀뚱멀뚱 교차했다.
"……?"
***
굶주림. 통각에 이어 두 번째로 찾아온 감각.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찾아오자 늑대는 이제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고행은 의미 없지 않았다. 이 감각이야말로 본능이 깨어나는 게 멀지 않았다는 무엇보다 큰 증거였으니까.
먹어치우는 자― 마랑으로서의 본능. 굶주림을 모르는 이가 식탐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적어도 늑대는 그리 믿고 있었다. 허기짐에 저도 모르게 지천으로 널린 자신이었던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참기 힘든 굶주림이 먹으라고 소리쳐왔다. 눈앞에 먹을 것들이 잔뜩 쌓여있는데 왜 먹지 않느냐고. 이렇게 지쳐 비루해지지 않았느냐고……
늑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본능이란 걸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상 그 또한 분명 하나의 방법이리라.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방법을 바꾸는 건 이게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여야만 한다. 아직 좀 더 견딜 수 있다.
더 굶주려야만 한다.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원하고 원해 자신도 모르는 새 먹고 있기 전까지는.
……원한다면 얼마든 먹을 수 있다는 게 괴롭게 느껴졌다. 비록 자신의 것이라 하나 눈앞에 널린 건 분명 고깃덩이였으니까.
침이 고이다 못해 뚝뚝 흘러내렸다. 우습게도, 그 때문에 갈증이 찾아왔다.
참기 힘들어질 때마다 아픔으로 자신을 눌렀지만, 이젠 그것조차 무뎌지고 말았다. 이미 고통이 아무렇지 않게 됐으니까. 후각을 없애고 눈을 짓뭉개면서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먹을 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굶주림을 자극하고 있었다.
……과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바보 같네. 그래서 얻는 게 뭐가 있다고?'
비웃는 듯한,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고막을 터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시스템의 목소리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감정을 먹는 검은 도깨비불. 흑린. 자신을 유혹하는 목소리의 정체였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것이 찾아와 망가진 눈. 자신의 안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왜~? 네 알량한 본능이란 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그것이, 키득거렸다. 자신이 하는 짓이 멍청하고 아둔하다며 비웃었다.
'정말 그럴 가치가 있어?'
그 말에 늑대는 침묵했다. 어쩌면 그럴 가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질리도록 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할 수 없으면 거기까지일 뿐이고.
'차라리 더 좋은 제안이 있는데…… 들어볼래?'
그러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머리칼을 비비 꼬더니 제멋대로 속삭였다.
'지금 포기해. 그럼 빌려줄 수도 있는데~?'
아득한 위에서 내리깔아보는 시선으로. 그렇게. 그따위로. 지껄여댔다.
'같잖은 본능 같은 것보다 훨씬 낫잖아?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잠깐 맛보았던 흑린의 힘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도 여왕과 같은 초월자라면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 넘볼만한 존재는 아니리라.
'딱 한 마디면 돼. 도와달라고. 별로 힘든 건 아니잖아?'
그 말에 늑대의 턱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하자 흑린은 차오르는 기대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쭉 기다려왔으니까. 이런 기회가 찾아오기를. 늑대의 의지가 마모되어 미약해지기만을. 딱 한번 느껴보았던 그 강렬한 감정. 포기한 늑대가 자신에게 기대어, 허기를 채우려 자기 자신을 씹어 먹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리고 마침내……!
"……도와줘."
힘겹게 들려온 그 말에 황홀경이 찾아왔다. 오싹한 기쁨에 젖어 부르르 떨었다. 뒤이어 흘러 들어오는……?
'……?'
흑린은 의아해했다. 늑대로부터 어떠한 감정도 흘러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말했을 텐데."
이윽고 벌어진 입은 흑린이 원하는 걸 말하지 않고 있었다. 흑린은 뒤늦게 눈치챘다. 자신이 들었던 도와달라 빌었던 말소리는 현실이 아니었다고.
"멋대로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리는 낮은 울음. 망가진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와 함께 늑대의 안에서 끝없이 부풀어 오른 무언가―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순식간에 검은 도깨비불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힘.
환영의 나비가 만든 허상 세계가 그러했듯, 내면에 떠오른 상조차 예외가 되진 못했다.
그에, 흑린은 아연해 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늑대가 무너지지 않았으니까.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말았으니까.
늑대의 아지랑이는 이 순간, 그가 원래 다뤘던 격을 넘어서 있었다. 그가 바라던 짐승의 그것처럼.
공허에 둘러싸였을 때, 흑린은 언젠가의 선언을 떠올렸다. 잃어버린 자들과 자신들에게 알렸던 그 오롯한 선언을.
……이번에도 실패. 늑대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꺼져라."
즉답. 그 단호한 말에 흑린은 눈살을 좁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흐려지지 않은 의지…… 물론, 이깟 같잖은 아지랑이는 얼마든지 걷어낼 수 있다.
억지로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각별하지 않을 테니까.
그 의지가 꺾이고 무너져 자신에게 기대어 올 때.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정말,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찔하고 황홀해 흑린은 애써 인내심을 발했다.
그래도 아쉬워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바보 같기는.'
그렇게, 갑작스레 나타났던 때처럼 이번에도 흑린은 의뭉스레 사라졌다.
여전한… 아니 갈증과 함께 찾아와 더욱 심해진 굶주림. 허기를 참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거면 됐다. 아직 더 굶주려야만 한다. 그 감각이 다시 잊히지 않을 정도로 뼈저리게. 이젠 참을 수 없다 여길 때까지……
그래야만 자신의 본성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바보 같다고. 아둔하고 멍청하다고 비웃어도 상관없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결국, 언젠가는 자신이 전부 먹어치우고 말 테니까…….
끓는 듯한 낮은 울음소리가 환계에 널리 울려 퍼졌다.
***
"……존나 머네."
지도를 펼친 홍유리는 한참 남은 길에 눈살을 찌푸렸다. 새삼 알파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고산지대인 건 둘째치고 그냥 멀다. 그나마 차라도 빌리지 못했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
"안 따라와도 된다고 했잖아."
"운전할 줄 모르시잖아요……"
"알거든?"
"……면허 있으세요?"
"하, 어차피 외국이잖아."
할 줄 모른다는 걸 시인하는 말이었기에 이은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운전에 자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면허보다는 나을 테니까.
시동을 걸자 낡은 고물 같은 빌린 차량이 억지로나마 굴러가기 시작했다.
***
"……."
눈이 망가지고 귀가 멀어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하게 된 와중에 허기와 함께 갈증이 찾아왔다. 아니, 허기를 누르고 더 심해졌다. 가장 오래 굶어본 게 언제였던가 떠올려봤지만…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감각이 날카롭게 다듬어져 갔다. 미세하고 작은 소리가 바늘이라도 된 것처럼 귓가를 콕콕 찔렀다. 목구멍이 메말라 한 모금의 물이 간절해졌다. 목울대를 넘겼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마른침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목을 축일 방법은 있다.
그냥, 자신을 먹으면 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널려 있을 거다. 아니, 원하기만 하면 이런 결여 따위는 당장에라도 사라질 터. 어떻게든 말라붙은 목구멍을 한 번만 적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애써 참아냈다.
그렇게, 시간은 더 흘러갔다.
고통. 갈증. 굶주림. 몇 겹이나 쌓이고 쌓인 피로 속에서 늑대는 점점 지치고 말라갔다. 얼른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데도 우습게도 자신이 가진 극기가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아직 아니라고. 더 견딜 수 있다고.
그에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 견뎌야 본능이 찾아오는 걸까. 고행이라는 것. 누군가는 그 고행 자체를 견디는 것에 의미를 둘지 모르지만, 늑대는 그 반대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찍어누르고 없애버린 본능이, 약해진 이성을 누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렇게 어느 순간, 의식이 흐려지고 늑대가 원하던 때가 찾아왔다.
처절한 기다림 끝에 자신이 원하고 그토록 바라던 대로 극기를 넘어서 한계점에 도달한 것. 이미 머릿속은 뒤죽박죽 섞이고 이런저런 감각들은 엉망이 돼 있었다.
타는 듯한 갈증과 굶주림. 이젠 무뎌져 아무렇지 않게 된 통증 속에서 그렇게, 늑대의 의식이 끊어졌다.
***
"……찾았다."
샛노란 동공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은하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지만, 홍유리의 마안에는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단순한 추적을 넘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거의 없었으니까. 얼마 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별안간 문을 열고 홍유리가 차에서 뛰어내리자 이은하는 기겁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바퀴가 닳아 잘 멈추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대체 뭐가 보인단 거예요?"
"보면 알아."
그렇게 홍유리는 성큼성큼 나아갔다. 나막 호 근처, 카비르 국립 공원.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거대한 무언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
처음에는 작은 바위산이라 생각했으나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무언가의 사체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저기 파먹혀 원형을 유지하고 있진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저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인지 막연하게나마.
"이건……"
"질병."
짤막한 대답에 이은하는 침을 삼켰다. 인류를 좀먹던 가장 끔찍한 괴물의 이름.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눈앞에서 와닿은 괴물의 사체는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
말을 잃고 있던 이은하는 거기서 기다란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자 깜짝 놀라 마력을 일으켰으나, 그게 질병이 아니란 걸 깨닫고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그 모습. 자신을 보고 안심하는 모습에 오래된 용은 웃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보고 안심하다니… 물론 이 괴물에 비하자면 충분히 그럴 만 했지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 자신과 함께 싸웠던 붉은 머리 마법사를 보았을 때, 오래된 용은 직관적으로 그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쟨 말할 줄 아는 것 같더라. 물어봐."
"뭘요?"
"뭐겠어?"
그리고 그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마랑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되니까. 마랑을 위해서 그리고 이들을 위해서.
이윽고 소녀의 입에서 유창한 요정어가 튀어나오자 오래된 용은 놀라고 말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그러나 변하는 건 없다. 마랑의 행선지를 묻는 말에 오래된 용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가라고 말했을 뿐.
마지막으로 그가 보았던 마랑은― 정말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으니까. 이성 잃은 괴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까.
"……돌아가라는데 어떻게 하죠?"
오래된 용의 뜻을 이은하가 전해 알린 순간, 홍유리는 코웃음 쳤다.
"필요 없어. 어차피……"
마력을 일으킨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남은 흔적들이 자신의 눈에 똑똑히 보였으니까. 입을 꾹 다문 오래된 용이 오갔던 흔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