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84 나아가는 길 (2)
검은 마랑이 부풀어 오른다. 아니, 더한 어둠에 휘감기는 것만 같았다. 아침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실제로는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았으니까. 단지 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
그것은 본래 늑대만이 볼 수 있었던 업. 하지만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업의 밀도에 환각으로나마 어렴풋하게 접하고 있었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장막이 눈을 가리고 불길함이 스며들어왔다. 이대로 어둠속에 파묻혀 자신들마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나 업을 환각으로나마 보게 된 것처럼 이 어둠 속에서도 색 없이 빛나는 선을 보았을 때, 말을 잃어버렸다.
이윽고 선은 장막을, 공간 자체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저게 도대체 뭐길래? 곧 어둠은 걷히고 장막은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진화와는 너무나 달랐으니까.
그런 진화 따위와는 너무나. 그렇게 밤이 걷혔을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멍하니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화 속에서나 묘사될 법한 위용이었으니까.
검은 몸체는 이전보다 몇 배는 커졌고 사자와는 또 다른 갈기가 목 주변에 자라나 있었다. 분명 검은 마랑임에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글거려 녹아내릴 것만 같다. 마치 그 속에 작고 검은 태양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머잖아 진화를 끝마쳤는지 그 고개가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공포나 두려움을 느낀 게 아니라 그저 아득한 생물로서의 격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요정용이나 용종이 된 홍유리조차 예외가 되진 못했다. 종의 정점인 용종보다 아득히 높은, 마치 생물이라는 규격과 태 바깥에 있는 듯한 존재.
머잖아 그 존재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격은 여전해 그 위용이 사라질 리는 없다. 넋을 잃고 쳐다보고 말았다.
그 시선들을 보며 늑대는 확신했다. 더는 육신의 제약 같은 게 없다고. 자신이 원한다면 더욱 커질 수도 훨씬 작아질 수도 있으리라.
정신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육신은 얼마든 변화할 테니.
"……정말 놀랍군."
그 감탄에 늑대의 시선이 향한 순간, 오래된 용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아득한 격의 차이가 생물로서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이다.
아주 적게, 그 편린의 극히 일부나마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오래된 용의 혜견으로도 늑대를 전혀 읽을 수 없게 됐으니까. 이제 그가 어떤 곳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게 됐다.
자신이 아는 한 그런 존재는 여왕을 제외한다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그와 거의 비슷한 느낌인데……"
침을 삼키며 그라고 부르는 말에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라는 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분명, 자색의 흑호를 이름이리라. 인류가 대적할 수 없어 손을 놓아버린 괴물…… 동시의 단세혁조차 쓰러뜨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제는 닿았을까. 혹은 아직도 닿지 못했을까.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색의 흑호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굳이 싸우려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뀨우우…"
오래된 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페리마저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변한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촉수를 뻗어주니 잠깐 움찔거리더니 그 끝에 노닐며 이내 헤실거렸다.
"너 정말… 맞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묻는 말에 늑대는 끄덕였다. 어차피 진화하는 모습도 봤을 텐데. 페리의 반응도 그렇고 구태여 묻는다는 건 그만큼 적응되지 않는다는 걸까.
떨떠름하게 따라오는 둘에게 촉수 대신 그와 비슷한 갈기를 뻗어 허리를 감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하는 홍유리와 이은하를 태우고서 조금 먼 곳을 보았다.
질병의 사체가 남아있는 곳. 그리 빨리 달리진 않았는데 진화 전과 비슷한 속도가 나왔다. 수백 킬로미터를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해 다시 환계로 돌아왔을 때, 늑대는 질병의 사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에 오래된 용에게 감사를 표했다.
마침내, 이 순간을 위해 남겨두었던 사체를 먹어 치울 준비가 됐으니까. 커다란 아지랑이가 부풀어 질병을 덮었다.
***
[불길한 마랑(재를 거두는 자) Lv.16]
[EXP 472281 / 2641029]
[업 5.38%] [영량 654.49m³]
[체장 ―] [체고 ―] [체중 ―]
[힘 537] [민첩 575] [체력 628] [마력 691] [극기 71]
획득한 경험치의 양은 물론 상당했지만 생각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질병의 사체중 적지 않은 양을 짐승이 먹어 치웠었기 때문이리라. 그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의외로 예상과는 달리 조건은 붙어있지 않았다. 그 이유를 얼추 알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늘 제한받던 달성 조건이 사라진 이유. 이제 길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나아갈 테니까. 멈추지 않을 생각이니까. 또한, 이제 늑대 자신이 사용한 업이 남아있는 업보다 많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
[보유 스킬 목록]
[外] - (0)
[A] - 마정↑(3)
[B] - 폭풍 (5)
[C] - 초감각 (8)
[D] - 아공간, 육감↑ (12)
[E] - 투시 (1)
[F] - 요정어 (1)
[남은 스킬 포인트 37]
새로이 얻은 스킬의 이름은 마정.
겁화와 공허처럼 의지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아니었지만, 대마력의 상위호환 격인 스킬이었다. 대마력은 거기에 통합돼 녹아들었고.
약간의 기대는 있었다. 혹여 이번 진화로 흑린과 같은 등급불명의 스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실제로 획득한 건 A등급의 스킬 하나뿐이다.
의미 없는 건 아니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알 수 있었으니까. 격을 완성해 그다음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또 등급 외라는 스킬의 존재를. 여기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여력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이제부터는 격의 상승을 꾀해야만 한다. 공허와 겁화가 1/3에 다다른 것처럼 언젠가는 등급이라는 틀 자체를 넘어설 수 있도록.
마침내 목표했던 일을 전부 끝마친 늑대는 떠날 준비를 했다. 여기 남아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오래된 용은 테헤란에 남기로 했고 늑대와 일행은 돌아가기로 했다. 짧은 작별. 가볍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출발한 이은하와 홍유리는 늑대의 등 위에 올라타 높은 곳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그리 빨리 달리고 있지 않은데도 풍경이 휙휙 변한다. 경치라고는 했지만 사실 구경할 순 없었다.
"……존나 빠르네."
그 말 그대로 다시 밤이 되기 전에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가던 중에 늑대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어 섰다. 먼 곳을 향하는 늑대의 시야에 보인 것은 어느 산이었다.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지만, 늑대의 눈은 그 거리를 뛰어넘어 그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존재 또한,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다. 서로에게 거리 따위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뭐해?"
홍유리의 물음에 늑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국에 입성하기 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이은하가 물었다.
"아, 근데 부팀장님."
"뭐."
"……저희 출국심사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와도 괜찮은 거예요?"
그 말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입국심사가 상당히 귀찮아졌다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여명에 돌아온 늑대는 해가 떨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 것도 있었지만. 클랜 내부의 사람들도 슬슬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진작에 이전처럼 모습을 되돌려놓은 상태였지만, 조만간 홍유리나 이은하가 보고할 테니 자신이 진화했다는 걸 알게 될 사람은 알게 될 터.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새삼스레 그들이 자신을 적대할 리도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할 테니까.
"오, 이 자식. 오랜만이다?"
강태호의 말에 늑대는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었는데 어느새 2월이 돼 있었다.
"근데 인마. 너 뭔가 좀 바뀐 것 같다?"
턱에 검지와 엄지를 가져다 대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태호. 과연 감이 좋다 싶었지만 위화감을 짚어내진 못했다.
"검은 어땠지?"
떠나기 전, 환계에서 실컷 휘둘러보라고 데려다줬었던 일이 기억나 물어보니 씩 웃어 보인다.
"존나 최고지! 와 존나 시원하더라고."
그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던전이더라도 어지간한 넓이가 아니면 강태호가 전력으로 휘두를 만한 장소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강태호와 작별한 늑대는 문득 든 생각에 벽 한편에 걸린 달력을 잠깐 바라보았다.
***
"……이제 돌아온 건가?"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사무적인 말투의 홍유리. 변혁해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아직 잘 적응되지 않았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다만 목이 쉬어있는 게 조금 의문이기는 했다.
"아, 이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던 거겠지."
어차피 얘기할 테니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 곧 홍유리는 있었던 일의 경과를 보고해 알렸고 강태준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진화했다라."
손가락을 튕기며 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마랑 알파. 고작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몇 번이나 되는 진화를 반복한 지성을 가진 괴물인 동시에 인류의 재앙을 걷어준 존재.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알파는 이미 구획 보스를 한참이나 넘어있었다. 자신도 동생도 알파에게 닿기란 요원하리라. 그 자체가 재앙이나 다름없는데 지성까지 가지고 있는…… 그가 원한다면 인류의 멸망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다.
결국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오고야 말았다.
이미 몇 번이나 고결함을 행동으로 증명한 그였기에 새삼 변심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는 늘 대비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비한다고 지금의 알파를 막을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다행이었다.
"홍유리. 집을 샀다고 들었는데."
뜬금없는 말에 홍유리는 잠깐 눈을 끔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답했고 강태준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방은 뺄 생각인가?"
"네. 그럴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군. 바로 옮기나?"
"필요한 건 새로 사놨는데……"
"혹시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다. 최대한 돕지."
떨떠름하게 끄덕이긴 하지만 대체 왜 이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강태준은 책상 위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수고했다. 이만 나가봐도 좋다. 잘 부탁하지."
잘 부탁한다고? 뭐를? ……팀장직을 말하는 걸까? 잠깐 물어볼까 하다가 그것말고 또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 클랜장실을 나온 홍유리는 내려가다, 자판기 옆 벤치에 앉은 알파와 이은하를 보았다.
잠깐 가슴에 손을 올렸지만, 역시 이전과 같은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확신이 있었으니까…… 헛기침하며 홀로 끄덕이던 홍유리는 이제 집으로 갈 생각으로 알파를 부르려다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잘 부탁한다는 말의 뜻을 뒤늦게 알아차리고서.
***
"……."
퇴근 중이던 이은하에게 부탁해 아카데미의 졸업식 날짜를 찾아달라 부탁한 늑대는 고심했다.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 그전까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아니, 생각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이미 홍유리를 받아들였으니까. 다만, 가능하면 그녀가 상처 입지 않았으면 하는 게 본심이었다.
"……."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은하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늑대는 생각에 잠겼다. 입술을 달싹이던 이은하가 무언가를 묻기 전에 계단에서 내려온 홍유리가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뭐, 뭐해? 집 가야지."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던 이은하는.
"그래."
알파가 대답하자 아래턱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