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85 일상
옅은 자색 마력이 연기처럼 떠오르더니, 섬세한 손끝을 따라 휘몰아치다 여러 형상으로 바뀌고는 주먹을 쥠과 함께 사라졌다.
"제법이네요. 이제 제가 가르칠 부분은 없겠어요. 적어도 기초만큼은."
"감사합니다."
그 말에 백소율은 고개를 숙였다. 담백한 인사에 아넬라는 가볍게 끄덕였다.
"스퀘어 마스터까지는 몰라도 아주 허풍은 아니었네요. 알파가 기대할만했다고 해두죠."
"알파가 그런 말을 했나요?"
"그럼요. 아주 의심도 안 하시던걸?"
찰떡같이 믿고 있더라는 말에 백소율의 표정이 환해졌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지만, 고작 말을 전했을 뿐인데…… 의외로 당돌한 이 소녀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표정을 드러내는 게 그 마랑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물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 알게 된 만큼 알파에게 의존하게 된 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래 뭐… 따지고 보면 능력 있고 성격 좋고, 행동도 고결하고 사려도 깊으니까. 대화하고 있다보면 지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거기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재앙을 쓰러뜨렸다는 위업도 이뤘으니 영웅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누군들 설레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면.
물론 자신이 그렇다는 거지 백소율에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저렇게 좋아라하는데 응원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좋나요?"
"……네."
일부러 히죽거리며 놀리는 말에도 백소율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붉어진 얼굴로 끄덕였다. …평소에는 차갑게 보이는 인상인데 알파 이야기만 나오면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된다는 게 퍽 귀엽기도 하고. 능글거린 아넬라는 백소율의 뺨을 꼬집었다.
"정말 아깝네요. 지금 소율 양 모습을 보여주면 아주 한방에 넘어왔을 텐데~ 아, 혹시 모르니 찍어둘까요?"
"……."
"장난이에요. 근데 참 부럽네~ 내 낭군님은 언제 오신담?"
아넬라의 놀림이 끝날 기미가 없자 백소율은 종종걸음으로 감마에게 향했고, 그렇게 방 안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아넬라는 픽 웃음 지었다.
방 안, 테이블 위에 동그랗게 똬리 튼 조그마한 생명체. 백소율은 잠든 감마의 볼을 찔렀다. 손가락 끝에 보드라운 감촉이 닿자 감마는 불편하다는 듯 뒤척였다.
"뀨웅."
테이블에 몸을 엎드린 채 백소율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사흘…"
졸업식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사흘. 새삼 졸업식 같은 게 기대되는 건 아니지만 알파라면 분명히 와줄 거라고 백소율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
"♪~."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설마 거절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말을 꺼내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불안했으니까. 근데 설마 클랜장님이…… 아니, 오히려 덕분에 이상한 오기가 생겨 말을 꺼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건가?
홍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조건이 까다로워 매물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돈은 썩어 넘칠만큼 있으니까. 결국 돈으로 후려치니 구해졌다.
집, 집. 그러니까 동거를… 하게 됐다는… 뜻인데…
매운 걸 먹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기는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처음 해보는 것들뿐이다. 역시 그때 지르길 잘했지……?
홍유리는 혼자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이지 않으려 알파보다 앞장서 걸어야만 했다.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홍유리의 뒤를 늑대는 천천히 따랐다. 페리의 덕에 환계로 거닐고 있는 이상 누구에게도 들킬 일은 없으리라.
이제 머지않은 집. 유난히 발걸음이 가볍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2층 주택이었는데 마당이 있어 주변 건물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
늑대는 그 집을 바라보며 실소했다. 어쩐지 스퀘어의 저택과 다소 비슷해 보여서. 설마하니 이 짧은 시간 만에 지어졌을 리는 없을 테고 이 도시 한복판에 이런 집이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하게도 느껴진다.
클랜에서 생활하던 것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르리라.
유난히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꼬리가 양옆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와는 달리 늑대의 머리는 다소 복잡한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
백소율의 졸업식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사흘. 본능을 깨우친답시고 생각보다 더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그래도 할 일은 다 마쳤으니 한동안은 여유를 가져도 되리라.
……홍유리의 집에 불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안다. 그게 기쁘기도 했지만, 덕분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 달밤, 백소율은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분명 배신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대답이었으니까. 그녀에게 끌렸다는 걸 부정할 순 없으니까. 어떻게 완곡하게 거절하더라도 결국 상처입히고 말리라.
물론,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거다. 여태껏 자신이 보아온 백소율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이 관계를 감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마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 그건 백소율을 기만하는 행위고 동시에 홍유리를 실망하게 만드는 행동이니까.
우유부단하고 멍청했다. ……홍유리와 깊은 관계가 된 걸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백소율에게 상처입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좀 더, 제대로 했어야만 했다.
이제 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상처 입을 터. 그게 혼자만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형편 좋은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자신뿐만 아니라 백소율과 홍유리의 관계마저 어그러질지 모른다……
"왜 그래?"
"뀨웅?"
홍유리와 페리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에 늑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 저었다. ……설령 답이 없더라도 고민은 계속 해야 한다. 그래도 생각에 잠겨 홍유리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꺼낸 말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늑대는 겉으로 티 내지 않은 채 생각을 계속했다.
……이런 시간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날들이 오래갈 리 없을 테니까…….
***
외관만이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도 깔끔한 편이다. 잘 정리된 안이 새집임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방은 네 맘대로 해."
스퀘어에서 했던 말과 같은 말. 끄덕인 늑대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흥미를 보이는 페리가 얼른 오라는 듯 잡아당기자 늑대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뀨우웅!"
호기심 많은 페리가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서랍이나 꽂혀있지 않은 책장을 만진다던가. 마치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그럭저럭 가구들은 채워져 있었지만, 새집이기도 하고 집이 워낙 넓어 그런 듯 보인다. 천천히 둘러보던 늑대는 페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유독 커다란 방을 볼 수 있었다.
얼른 열어달라는 재촉에 문을 열어본 늑대는 연구실과 같은 방을 볼 수 있었다. 마법사라는 이미지에서 떠오르는 고대 연금술의 칙칙한 방 같은 게 아니라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연구실. 아직 시료나 자료는 비어있지만, 설비는 준비된 거로 보아 조만간 차곡차곡 채워지게 되리라.
작정했구나 싶다가 방 한편에 놓인 가운과 안경을 보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걸 쓰고 있는 홍유리의 모습이 상상되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페리가 구경하고 있을 때, 마침 짐을 풀어놓았는지 다가온 홍유리가 와보라는 듯 턱짓했다.
"왜 그러지?"
"둘러봤어?"
가볍게 묻는 말에 늑대는 끄덕였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도 입술만 달싹이던 홍유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게 알파에게 보이지 않을 반대편에서 홍유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벽에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아 씨, 돌겠네…"
일단 어떻게 미친 척하고 집까지 부르긴 불렀는데 여기서 한 걸음 더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다. 태연한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도저히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꾸 저번 일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그 날은 진짜 좋았는데. 원래 진짜 하려던 말은 정 마음에 드는 방이 없으면……
홍유리의 목울대가 꼴깍 넘어갔다.
아니 시발 진짜 미쳤나. 도리도리 고개 저은 홍유리는 푹 한숨을 쉬었다. 늦어도 너무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 자꾸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
퇴근한 이은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팔을 들어 올렸다. 씻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들질 않아서. 천장의 무늬를 세다가 이은하는 눈을 끔뻑였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언제부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부팀장님이랑 알파가 언제 저렇게 된 건데? 뭐가 어떻게… 대체 스퀘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영문을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혼란으로 머리가 따라가질 않는다. 서로 목숨 걸고 싸웠다가 화해했다는 건 알고 있는데… 동거? 동거한다고? 이렇게 갑자기?
아니, 아니야. 어쩌면 반려동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른다. 알파도 계속 클랜에서 지내는 게 불편 했을 수도 있고. 그래. 분명 그럴 텐데… 부팀장님 새빨개졌던 얼굴을 떠올려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반려동물이 아니라 반려로밖에 생각이 안 들어……!
이은하는 침대 위에서 데구르르 몸을 굴렀다. 복잡한 머리가 푹 익어버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거… 동거면 분명 그런 거겠지? 하고서.
이어진 생각에 이은하는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부럽다아."
근데 대체 어떻게 했을까……? 한 번 물어볼까? 아니아니, 미쳤다고 물어봐?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나름대로 그 모습을 홀린 듯 상상하던 이은하는 익어버린 머리로 데굴데굴 침대 위를 굴렀다.
그날, 이은하는 밤잠을 설쳤다.
***
퀭한 눈으로 비몽사몽 출근한 이은하는 팀원들이 전부 모여있는 걸 보고 눈을 끔뻑이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팀장님 가시는 날이었지. 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회의실로 들어온 구진하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빠짐없이 모여있는 걸 확인하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다 모였네요. 미리 들어 아시겠지만 전 오늘로 휴직하게 됐습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 구진하는 빈 소매를 건드렸다.
"아예 돌아오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팔이 다 나으면, 치료가 끝나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니까요."
구진하는 그 이후 잠깐 시덥 잖은 농담이나 덕담 같은 짧은 말을 나누었다.
"그동안 저 대신 팀장직을 수행하게 되는 건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홍 부팀장입니다. 이제 홍 팀장이겠네요."
뒤이어 주머니에 푹 손을 찔러넣은 홍유리가 터덜터덜 걸어들어오자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그렇게 기분 좋게 들어간 것 치고는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넌 또 뭘 꼬라봐?"
이은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팔짱 끼고 그리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팀장 자리를 맡기 싫어하는 것 같기는 했는데 그것 때문일까?
"너 진짜…"
그런 홍유리에게 뭐라 말하려던 구진하는 한숨과 함께 말을 거뒀다. 이제 팀장은 그녀인데 마지막까지 왈가왈부하는 건 모양새도 좋지 않다. 그냥 믿고 맡기는 게 나으리라.
"그녀가 팀장이 됨에 따라 비어버린 부팀장 자리를 수행하게 될 건 전우택 헌터입니다. 그동안 여러 일을 도맡아 했고 최근에 A클래스로 승격도 했으니 다들 불만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구진하는 마지막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무튼, 여러분 모두 다시 복귀했을 때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구진하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 취임식임에도 불구하고 홍유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깐 둘러보던 그녀는 다만, "존나게 굴릴 테니 뒤질 준비나 해라"고 말했을 뿐.
그에 이은하는 연신 갸웃거려야만 했다.
어제 분명 잘 들어가셨는데 대체 왜 기분이 언짢으신 건가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