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86 졸업식
다음날, 홍유리의 화풀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수련 자체는 여전히 고달팠지만, 어제에 비하자면야. 그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대부분의 이들은 알파가 홍유리의 비밀이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
유난히 잔뜩 쌓인, 얼음이 녹거나 식어버린 커피를 보고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원한다면 플라스틱까지도 처리할 수 있겠지만 커피는 어디까지나 맛을 보려고 먹는 거였으니 이래선 곤란하다.
"뀨웃~"
거기에 눈치 있는 몇몇은 페리의 몫까지 챙겨 가져왔다. 대부분 달달한 아이스 초코. 물론 그래봤자 방법을 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믿지도 않을 테지만.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며 페리가 행복해하는 미소를 띠자 늑대는 그 배를 두드려주었다.
"뀨우웅~!"
그러자 꼬리로 마주 토닥여온다. 어차피 부정을 먹는 게 아니면 자라지 않으니, 아무리 먹어봐야 살이 찌지도 않으니 안심이었다.
괜찮은 시간, 평온한 일상이다. 그리고 어느새 당장 내일이 백소율의 졸업식. 가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뭐라도 사 들고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서. 백소율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아는 거라곤 원작에서 납치돼 마녀가 되었다는 점.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잘 웃는다는 점. 생각 외로 고집이 있고 생각보다 더 노력한다는 점.
그러나 그 전부는 내게 보여주는 모습일 뿐 정작 그녀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 것들.
예를 들어, 페리는 기분이 좋으면 얼굴을 비벼오고 단 것을 좋아한다던가. 홍유리는 기분에 따라 꼬리가 움직인다던가 승부욕이 강하다던가 그런 것들.
그런데, 제법 오랫동안 함께했던 백소율에 대해선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한참을 떠올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꽃을 줄까 하다가 문득 그녀가 자신에게 달라고 말했던 게 있기는 했다는 걸 떠올린 늑대는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러고는 자기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졸업식 선물로 괜찮은 게 떠오른 것 같아서. 아직 겨울이 끝나려면 좀 더 걸릴 테니까.
***
강태준이 말했던 것에 승낙하자, 그 길로 늑대는 강태준과 함께 고원으로 향했다. 광휘는 자리를 비운 모양이지만 아직 창선은 남아있었으니까.
다소 도시에서 떨어진 곳.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 여러 개가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모습은 마치 과거의 세력가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높은 담벼락과 현판이 붙은 대문. 소리 내 기척을 알리자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삭막한 풍경. 감지를 펼친 순간, 늑대는 이곳에 제법 많은 헌터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은은한 기운이 한옥 전체에 널리 퍼져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 스퀘어 마스터들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는 기운은 과연 칠영웅. 인류의 정신적 지주되는 이들의 수장이라 부를만했다.
인원은 적지만 그들 전원이 두말할 것 없는 A클래스의 최상위 헌터. 그것이 명실상부 최고의 클랜, 드높은 고원의 실체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강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행원 하나 보내지 않는다라…"
의도가 너무 뻔하다. 그렇게 충고했음에도 기어코 확인해볼 생각인 모양. 하기야 직접 본 게 아니라면 알파의 존재를 믿기란 어려울 테니. 자신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늑대 아무렇지 않게 한옥을 가로질렀다. 곧 늑대는 창선이 있을 방의 문 앞까지 도착했고 은은하던 기세는 위협을 더해 강렬하게 변했다. 스무 명에 가까운 최상위 헌터와 칠영웅의 수장인 창선의 압박은.
"――――――!"
오싹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강태준은 그들 중 몇몇이 주저앉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알파가 무언가를 했다― 그건 분명하지만, 그 옆에 있던 강태준조차 정확히 무엇을 한 건진 알지 못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한숨과 함께 대신 변명하려는 강태준의 말을 듣기도 전에 늑대는 알고 있다는 듯이 끄덕였다. 순간, 미닫이문이 저절로 열리며 그 너머에서 백발을 기른 도포의 노인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바로 그가 창선 주백운. 칠영웅을 소집한 최초의 헌터이자 인류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과연."
그가 위아래로 천천히 손뼉을 쳤고, 갈채를 받으며 늑대는 준비된 방석에 앉았다.
"너무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말에 늑대는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고 창선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확실히 지성이 있다.'
과연 검성이 말했던 대로 인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시험했음을 이해해주는 관용마저 있다. 마랑이 협력해준다면 능히 인류의 위기를 걷어낼 수 있을 터―― 그 생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괜찮다. 네 제자에게 받은 거스름이 남아있었으니까."
"……."
"이제 사라졌군."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목소리에 창선의 이마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겉모습은 고작 검은 강아지. 본신조차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어느샌가 창선에 눈에 비치는 늑대의 모습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자신의 뒤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그를 살피려다 눈을 감았다.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질렀는데 같은 실수를 또 할 수는 없다. 검성이 했던 충고를 떠올리고선 늑대를 꿰뚫어 보려는 시도를 애써 그만두었다.
"……명심하겠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렇게 시작된 창선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 각지에서 놈들이라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됐고 광휘는 요청에 의해 파견돼 조사하고 있다는 것. 전에 강태준이 말했다시피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확실한 흔적을 잡으면 그때, 협력해줬음 하네."
"……."
"물론 강요는 아니네. 그럴 수도 없음이니."
아까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그 실체를 들여다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랑은 현 인류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음은 틀림없다. 그건 강훈을 비롯한 탕아들의 간부에게도 예외가 되진 않으리라.
재앙을 쓰러뜨린 마랑의 소문은 허풍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가 협력해주면 변절자들을 뿌리 뽑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
그런 창선의 계산 앞에 늑대는 가만히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설사 저들이 자신을 사냥개처럼 생각한다 해도 상관없다. 자신 또한 그리 생각할 테니.
멸망은 어차피 막아야만 한다. 그리고 멸망을 막은 이후에야 종말을 막을 가능성이 생길 터.
그러기 위해선 성장해야만 한다.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이 짧은 일상조차 오래가진 못하리라. 달성조건이 사라진 이상, 레벨은 한계에 걸리지 않는다. 조만간 환계의 남은 던전들을 처리할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알아서 냄새를 맡아 탕아들의 소식을 가져온다면 좋은 일이다. 변절자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남은 업을 획득하는 게 용이해질 테니까. 거기에 네버랜드까지 클리어하면 아직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업을 모두 가져올 수 있을 터. 남은 업으로 무엇이 가능할진 몰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리라.
늑대는 기꺼이 창선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간단한 인사치레를 받으며 고원을 나섰다.
***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은 흘러, 마침내 백소율의 졸업식 당일이 되었다.
"근데 너 그거 진심이야?"
아직 아침이 밝기는 다소 이른 시간, 홍유리가 묻는 말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이상한가? 백소율이 좋아하는 것에다 나름 실용성까지 챙겼다고 생각하는데.
"걔가 그걸 받으면……"
홍유리는 잠깐 그 모습을 상상해보곤 꾹 입을 다물었다. 백소율이라면 알파가 주는 건 다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 좋아할 게 분명하니까.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할 것 같다.
"괜찮겠나?"
늑대가 묻는 말에 홍유리는 떨떠름하게 끄덕였지만,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물은 게 아니라는 듯이.
"선물을 줘도 괜찮겠느냐는 뜻이다."
"뭔 쓸데없는 걱정을 해?"
홍유리는 코웃음 쳤고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벼운 입맞춤, 버드 키스.
"나도 알아. 걔가 너 좋아하는 거."
"……."
"왜? 맨날 그 지랄해놓고 모를 줄 알았어?"
늑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으니까. 하지만, 알고 있든 아니든 물어보는 게 맞아서였다. 그게 지금의 그녀와 자신의 관계였으니. 그게 정답이기는 했다는 듯 홍유리의 손이 머리를 쓸어왔다.
"근데 그거랑 이건 별개야."
"……."
"졸업식에 네가 왔는데 선물도 못 받으면?"
겉으로 티를 내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홍유리는 그렇게 말했다. 의외로, 전혀 신경 쓸 것 같지 않은데도 세심한 부분을 신경 쓰고 있다.
"걔가 너 좋아해봤자."
"……."
"어차피 이미 내가 이겼어."
자신에 찬 웃음을 지어 보이는 선홍색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늑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졸업식 당일날 아침이 밝았다.
***
쌀쌀한 이른 아침에 백소율은 목도리를 두른 채 바깥으로 나왔다.
"축하해요. 이제 학생티는 완전히 벗겠네."
그 말에 백소율은 끄덕였다. 졸업식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졸업한 다음 날부터 환영의 나비께 마법을 배우게 되는 건 기대된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 얼마나 더 지나야 알파와 함께할 수 있을까?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보지 못했을 뿐인데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리움을 눌러야만 했다.
그래도, 그래도 분명 오늘은 와줄 테니까…….
백소율은 목도리 끝을 꽉 쥐었다. 이상하리만치 검은 털이 엮인 목도리를. 곧 아넬라가 차를 몰고 오자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면허 있으셨어요?"
"왜요? 이상해요?"
그 말에 백소율은 끄덕였다. 평생 스퀘어에서 살았으면 면허를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싶어서.
"있을 리 없잖아요. 자, 얼른 타요."
백소율이 눈살을 찌푸리자 아넬라는 꺄르르 웃어 보였다.
"장난이에요. 전에 한국에 있었을 때 취득한 거 맞아요."
"……."
"삼 년이나 있었다니까 못 믿으시네. 거짓말 같아요?"
기어이 지갑을 열어 보여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백소율은 그제야 안심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차를 사신 것 같진 않은데…"
"자림 씨가 빌려주던걸요."
빌려줬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전혀 그녀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스포츠카였다. 동감한다는 듯 아넬라도 끄덕였다.
"뭐 아무렴 어때요. 자, 달려볼까요~?"
벨트를 채 매지도 않았는데 아넬라가 신나게 밟아대기 시작하자 백소율은 한숨을 쉬었다. 감마를 품에 안은 채로 가슴 졸였지만 아슬아슬하기는 했어도 사고 나진 않았다.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대전에서 서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반파됐던 아카데미는 거의 재건된 상태였다. 아직 공사가 끝나진 않았지만 분명 새 학기가 시작될 때쯤에는 완공되리라.
"어때요? 감회가 새롭나요?"
그렇게 묻는 말에 백소율은 순순히 끄덕였다. 좋든 싫든 3년간 지냈던 곳이니까.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겠죠. 그래도 힘내요. 마지막이잖아요?"
백소율은 다시 끄덕였다. 어차피 그날의 기억은 이미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됐으니까. 그렇게 운동장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쌀쌀한 겨울날이 추웠는지 목도리 안으로 숨어들어와 머리만 빼꼼 내놓은 감마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손가락 끝으로 그 턱을 쓸어주며, 백소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알파와 선생님의 모습을 찾아봤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지 않은 걸까? 하긴 졸업식이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기는 했으니까.
아직 분주한 준비가 한창일 때, 졸업식에 불참한 학생들이 제법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오지 못한 거겠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빈자리가 채워지는 일은 없으리라. 새삼스레 실감하자 한숨이 나왔다. 문득 걷다가, 백소율은 무언가 떨어지는 감촉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눈송이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장갑에 닿은 눈꽃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대로 눈이 쌓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단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졸업식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하나둘 차례가 지나가는 와중에 졸업식의 끝이 다가올 때, 백소율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걸까. 혹시 잊어버린 건 아닐까. 미리 연락해야 했을까 많은 생각이 드는 와중에 저 멀리 있는 아넬라와 그 옆에 선 얼굴들을 보고 그제야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