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86 졸업식 (2)
"잘 있었나?"
가볍게 안부를 물으며 다가온 늑대에게 아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소리는 주변이 시끄러워 묻혔고 종종 누가 강아지를 데려왔나보다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기는 했지만 금세 거두어졌다.
"오랜만이네요. 홍유리 씨도요."
"그러게. 그래서 걘 어딨어?"
아넬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줄의 중앙쯤에 서 있는 백소율의 모습에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끝나가나 보네 뭐."
입장할 때 받았던 팸플릿에 적힌 절차도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두리번거리는 백소율과 눈이 마주친 늑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티 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마지막으로 교가를 제창하고서 졸업식이 끝을 마쳤다. 오래 지나진 않았는데 약간 쌓인 눈을 밟으며, 친구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백소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목도리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작은 요정용. 한 달 남짓이면 시간은 충분했으리라. 아무래도 그사이에 우화한 듯싶었다.
뛰지는 않지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백소율이 홍유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그러게."
"잘 지내셨어요?"
잠깐 생각하는 듯싶던 홍유리도 백소율의 등에 손을 둘러주었다. 서로 장갑 낀 손으로 토닥여주는 둘의 모습에 아넬라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만 외톨이네. 어디, 한번 껴안아볼래요?"
장난으로 말했더니 찌릿한 시선이 돌아와 찔끔한 아넬라는 느릿하게 얼굴을 들어 떨어지는 눈을 보는체하며 딴청 피웠다. 늑대는 실소하며 단답으로 거절했다.
재회의 포옹이 끝나자 백소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부터 심장이 시끄러웠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쩐지 가슴 떨려 마주보는 게 힘들다. 고작 한달 남짓한 시간이었을 뿐인데 사무치게 절절한 감정을 담아 백소율은 마침내 늑대를 보았다.
조그마한 강아지의 모습으로 있는 그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이에요. 와주셨네요."
언제나처럼 담담한 눈이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럴 필요 없었는데…"
이렇게 와 준 것만 해도 충분한 선물이니까. 그래도 자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는 건 기쁘게 느껴진다. 끌어안은 손이 강해지자, 늑대는 그녀의 팔을 두드리며 방향을 알렸다. 그렇게 둘이 멀어지자 뒤에 남은 아넬라는 눈 사이를 좁혔다.
"언제부터였어요?"
"뭐가."
"아~무것도요? 에휴. 괜히 소율 양만 불쌍하게 됐네."
"……."
"제대로 말해요. 그게 더 나을 테니까."
홍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페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기로 했어."
***
함박웃음을 지은 백소율을 보고선 차마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졸업식 날을 망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늑대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의 마지막까지는 그녀에게 있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인적이 드문 곳.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낸 늑대는 그걸 백소율에게 건넸다.
"선물이… 이건가요?"
의아한 듯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은 다소 뜬금없는 것이었다. 꽃다발이라도 주려나 싶었더니, 검은색 패딩. 의아하긴 했지만 입어보라는 시선에 백소율은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고 늑대가 건넨 패딩을 입었다.
제법 두꺼운데도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그리고 가벼운데도 따뜻하다…….
문득, 그리운 냄새를 맡은 백소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패딩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왜 패딩을 선물로 줬는지 알 것만 같아서.
"설마 이거……"
가만히 끄덕이는 것에 조금 큰 사이즈의 패딩을 다시 보았다. 누군가는 싫어할지 몰라도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다.
아니, 설령 어떤 선물이라도 분명 그러했으리라. 중요한 건 선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내게 주었다는 것이니까…….
그에게 안긴 듯한 감각을 음미하듯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백소율은 이내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정말, 고마워요."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섞여 나왔다. 떨리는 눈동자가 그 심정을 알리고 있었다. 가만 보던 늑대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백소율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랜만에 새하얗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눈 내리는 졸업식 날, 나는 그에게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
***
졸업식은 끝났는데 새삼 실감 나진 않았다. 애초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옷을 바꿔입은 백소율과 늑대가 돌아오고 넷은 홍유리가 예약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백소율은 계속해 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예약이 아니라 아예 전세를 낸 고급 식당. 고작 짜증 난다는 이유로 서울 한복판에 집을 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지만, 돈을 쓰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식당에 가는 게 곤란하지 않겠느냐― 자신뿐만 아니라 용종이 됐으니 시선이 몰릴 거라는 말에 근처 식당을 전세 내버렸으니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귀찮으면 다른 사람이 없으면 된다는 차원이 다른 발상이었다. 요리사들만이라면 입막음을 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뭘 놀라는 척을 해?"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홍유리는 고개를 까닥였다.
"너도 썩어 넘칠 만큼 있을 텐데."
그 말에 아넬라는 자신은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애초에 나비의 혈족에다가 그 자신이 마법사인데 돈이 모자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와본 적 있는 식당인가?"
"아니."
늑대가 묻는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돈 찍어 발랐으니 어련히 잘 내오지 않겠느냐는 말에 백소율은 어색하게 웃었다.
식사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얘기가 오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간단한 것들부터 마법에 대한 이야기까지. 당연히 본능을 얻었을 때의 일 같은 건 말하지 않았다.
마법. 그 주제가 나왔을 때 늑대는 새삼 자신을 제외한 이들 셋 전부가 마법사임을 실감했다. 도무지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 잠자코 듣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어느새 백소율도 훌륭한 마법사가 됐다는 뜻이다.
"뀨웅!"
"뀨우?"
감마라 이름 붙였다는 페어리 드래곤과 페리가 식당 안을 제멋대로 날아다닌다. 페리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감마의 이름을 들었을 때, 홍유리는 어쩐지 눈 사이를 좁혔지만.
그렇게, 식사는 별다른 일 없이 끝마쳐졌다.
***
추운 날씨에 너무 오래 밖을 돌아다닐 순 없었기에 2차로 홍유리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 백소율은 정체 모를 위화감을 좀 더 강하게 느꼈다. 느꼈지만, 이내 자신이 받은 옷 때문에 착각한 거라 치부하고 말았다.
"뭐해? 빨리 오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알겠다고 답한 백소율이 들어간 순간, 이미 세팅이 끝나 있었다. 오프너로 마개를 따자 진한 향이 흘러나왔고 백소율은 자신의 앞에도 놓인 잔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스무 살이 된 지는 한 달도 더 지났지만 아직 마셔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명실상부한 첫술인 셈이었다.
"거기, 집어."
홍유리의 말대로 잔에 가볍게 손을 올리자 와인이 따라지기 시작했고 백소율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런 술을 마실 땐 절차 같은 게 있지 않나 하고서. 그렇게 잔을 가만히 들고 있으니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마셔."
어디 한번 마셔 보라며 턱짓하는 것에 끄덕이며 잔을 기울였고 그 순간, 백소율의 눈이 커졌다.
"와아…"
사실 기대는 있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선생님이 종종 마시는 걸 봐왔으니까. 처음 마시는 술은 생각보다 신맛이 강했지만, 어쩐지 입에 맞았다.
"알바로 팔라시오스… 레르미타?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예요? 진작 단종됐을 텐데……"
뚱한 얼굴로 보는 홍유리가 귀찮다는 듯 답했다.
"마시기 싫음 말든가."
"아녜요. 소율 양 덕분에 마셔보네요."
정작 그 말을 들은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자체가 처음이니 그냥 비싼 와인인가보다 싶어서.
"……."
아넬라의 반응을 보고 늑대는 새삼 떠올렸다. 역병과 질병의 등장으로 유럽 일대가 멸망했으니 대부분 와인은 단종된 게 당연한 거라고.
아무튼, 그렇게 잔이 돌기 시작했다.
***
술이 돌고 돌며 취기가 올랐는지 건배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도수가 그리 높지 않아 백소율 또한 첫술임에도 제법 마실 수 있었다.
"으……"
이미 나머지 둘은 뻗어있었다. 온갖 술이 있다는 기쁨에 맘껏 마시던 아넬라는 해롱해롱 취해버렸고 지지 않겠다는 듯 마시던 홍유리마저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래놓고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알파가 만류하긴 했지만 괜찮다고 자꾸 들이켜는 모습이 아무래도 아침에 깨나 고생할 것 같았다.
"소율 야아앙~"
난처하리만치 들러붙는 아넬라를 떼어놓은 백소율은 어지러운 머리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입안에 달짝지근한 향이 남아 맴돌고 있다.
베란다로 나와 바람을 쐬니 새삼 머리가 멍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서 이게 술을 마시는거구나 하면서 혼자 끄덕거렸다.
"괜찮나?"
옆에서 묻는 말이 들려오자 백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마시는 거라 그런지 조금 힘드네요."
"그 정도면 잘 마시는 거다."
마신 양에 차이가 나기는 해도 홍유리가 먼저 취했다는 건 백소율도 보통은 넘는다는 뜻이니까.
"그런가요…?"
갸웃거리는 백소율은 멍하니 얼굴을 들어 달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구름에 가려져 있던 모습이 드러난 달은 어느 날과는 달리 아름답게 가득 찬 보름달이었다.
언젠가, 달이 차지 않았던 날을 떠올린 멍하니 떠올리다가 마침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그날, 네가 기다리겠다고 했던 말."
"……."
"지금 말하겠다."
홀린 듯 백소율은 고개를 돌렸다. 쭉 기다려왔던 대답. 어쩌면 몇 년 혹은 평생 걸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답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가슴 한 편이 서늘해졌다.
베란다의 찬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듯 취기를 날려버리고 시끄러운 심장 소리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기다리던 답이 돌아왔음에도 찾아온 건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불안.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만 같아 백소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졸업식이 끝나면서부터 자꾸 느꼈던 여러 위화감이, 직감이 제멋대로 답을 도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아서,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저 먼저 들어가……"
베란다 문을 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열리지 않게끔 늑대가 붙잡고 있었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백소율은 안간힘을 쓰며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천천히 늑대의 입이 벌어졌다.
"나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백소율은 그렇게 애원했다. 이미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듣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속눈썹이 떨린다.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어떻게든 듣지 않으려 애쓰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제발 부탁이라고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는 백소율에게 늑대는 기어코 그 말을 뱉어내고야 말았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다. 천둥처럼 컸던 심장 소리가 뚝 멎어버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생각이 흐르지 않았다.
이젠 기다리지 말라는 그 말에 백소율은 손을 입가로 가져가려다가 그러지 못했다. 갈 곳 잃은 손이 어쩌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처럼 굳어버렸다.
"……."
이렇게 되리라는 걸 늑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상처 입히기 싫었지만, 그 이상으로 기만하기 싫었으니까. 달래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건 그녀에게 미련을 남기고 말 테니까.
"…왜, 왜요?"
떨리는 목소리가 물어오는 것에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눈꼬리 끝에서부터 뺨을 타고 선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왜 저는 안 되나요?"
"……."
"왜 선생님인가요? 제가 옆에 있지 않아서요?! 제가……!"
어떤 심정으로 당신 곁을 떠났는지 알고 있지 않으냐고. 함께 있고 싶어서 떠난 거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렇게 소리 질러본 적이 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소리 질렀다.
그렇게 한참을 부르짖다가 목이 메어왔다. 언제부터인가 주저앉아 있었다. 누군가 심장을 조이기라도 하는 것 같아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내 앞에 있었다.
"왜…"
차라리 나쁜 꿈이었으면 좋겠다. 눈물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싫었던 꿈마저 지금처럼 아플 것 같지는 않아서. 한참이 지나 베란다의 찬 공기가 불어와 머리를 식게 만들었다.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이 얼어붙었다. 내리던 눈은 그쳐 이제 오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그렇게 말하지 마셨어야죠."
몇 번이든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지 않으냐고 백소율은 구차하게 보이듯 매달렸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저 혼자 착각했던 건가요…?"
쉬어버린 목소리에 늑대는 한숨 쉬었다. 그럴 리 없으니까. 그랬다면 그날 기다리겠단 말에 그러지 말라고 즉답했을 테니까. 다만, 이미 늦어버렸다. 자신이 제멋대로 등 돌리고 말았다. 원망을 받아도 좋다.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지난 사흘간,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내보려 했지만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형편좋은 방법따위가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하든 간에 백소율이 상처 입는 건 분명할 테니까…….
그러면 하다못해 모질게 끊어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게 서로를 위함이었으니까.
"그래."
평온을 가장해 가면을 쓰고서 가장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거짓말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음에도 백소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바랐던 대로 베란다 문이 열렸지만 나가지 못했다. 흘러내린 눈물이 얼어붙을 때까지 앉아있었다. 걱정하는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채 가만히. 멍하니.
눈 그친 졸업식 날, 그는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돌려받고 싶지 않았던 것을 돌려주고 말았다.
가지 말라고 애써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홀로 남아 차디찬 손을 메만지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렸다.
혹시 돌아온 게 아닐까하는 작은 기대와 어설픈 희망은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아까까지 그렇게 마시던 게 거짓말이라는 듯, 취기가 사라진 얼굴로 선홍색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